[부활 제5주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1-12)

열두 사도는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일곱을 뽑아 식탁 봉사를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사도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값진 돌이시고,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한다. (1베드 2,4-9)
사랑하는 여러분,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8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다. (요한 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부제에 임명되고 양식을 나눠주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6,1-7)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1~4)
본문에서 '불평'으로 번역된 '공귀스모스'(gongysmos)는 '투덜댐' 또는 '원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이것은 특히 70인역(LXX; 구약의 히브리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와 주 하느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본문의 단어와 동일한 명사와 그 동사형이라는 점(탈출16,7; 민수14,27)을 감안할 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불평이 하느님의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조직 내에 있는 구성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위기에 몰아 넣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에서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비해 자긍심이 강했지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계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사도2,45)를 소홀히 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온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지, 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도4,32). 다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을 관장하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행정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봉헌금(사도4,34~37)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신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특히 생계 유지가 힘든 과부들(사도4,31~37)은 매일 구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로 번역된 '엔 테 디아코니아 테 카테메리네'(en te diakonia te kathemerine)는 초대 교회 당시 매일 행해지던 구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명령(탈출22,20; 신명10,18)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계 과부들은 언젠부턴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
'홀대를 받았기'의 의미로 번역된 단어 '파레테오룬토'(paretheorunto)의 원형 '파라테오레오'(paratheoreo)는 '간과하다'(overlook), '소홀히하다'(neglect)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어떤 일의 반복이나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이것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서 단 하루 제외되어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외되어 온 데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해서 원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불평을 사탄은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는 기회로 사용하여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일치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유념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이는 '배급'(구제)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섬김'(1코린16,15), '직무'(2티모4,5). '봉사'(사도21,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구제'(자선, 희사)를 가리키는 단어는 '엘레에모쉬네'(eleemosine) 라고 따로 있다(마태6,2; 루카11,41; 사도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구제'를 표현하면서 굳이 '직무', '섬김',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단어를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에 함께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6장 4절에 '말씀 봉사'(말씀 전하는 것; te diakonia tu logu;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the ministry of the word)에서 '봉사'(전하는 것)으로 번역된 단어도 '디아코니아'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의 말씀 선포의 직무와 평신도들의 구제하는 등의 직무가 우열의 차이없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직무라는 사실을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다만 말씀 봉사와 구제 봉사는 직무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직무는 신도들에 대해 지시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의 직무처럼 신도들을 섬기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라는 것을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의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에페소서 4장 11절에서처럼 사도와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와 교사의 순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무의 우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는 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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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일 복음 (요한14,1-1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2)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0)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2)
'거처할 곳'으로 번역된 '모나이'(monai; mansions; rooms)는 '모네'(mone)의 복수형이다. '모네'(mone)는 목적격 단수로 여기와 요한 복음 14장 23절에서 쓰일 뿐,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단 한번도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네'(mone)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것은 여행중에 잠시 들러서 휴식을 하는 임시적 공간의 의미라기보다는, 제자들과 더 나아가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희망을 견고히 하는 항구적 거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여기서 갑자기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제자들에게 당신과 비록 헤어지더라도,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킴으로서,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또한 있다가 없어질 이 땅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처소에 희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강림 이후 성령충만을 체험한 후 하늘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 이 세상의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았으며, 주님과 교회를 위해 순교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요한 복음 14장 2절의 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중요한 이유에 대해 언급하신다.
'내가 ~간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poreuomai; I go)는 '포류오'(poreuo)의 현재 시제 중간태로서 '내가 스스로 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미래적 현재'라고 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용법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신적 통찰력과 예지력으로 미리 아셨고,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예고해 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을 덧붙이셔서 그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신다.
당신 자신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며, 그들 뿐만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반드시 지불하셔야 될 대가임을 밝히고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영혼들이 영원히 거처할 처소를 마련하는 이 일은 오로지 십자가상 대속의 구속사업을 통해,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유보된 일인 것이다(사도4,12).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0)
요한 복음 14장
10절은 삼위일체의 신비
가운데,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동질성과 하나되심을 보여
준다.
먼저 성부와 성자께서 각각 독립된 신적
위격(位格)을 지녔음을
드러낸다. 성자는 '에고'(ego), 즉 '나'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고, 성부 역시 '토 파트리'(to patri; the
Father), 즉
'아버지'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이란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도 '아버지',즉 성부 하느님과 '내', 즉 성자 하느님께서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여기에 또 다른 신적 위격으로서 요한 복음 14장 16절,
17절, 26절에 나타나는 성령
하느님까지 포함시켜 요한 복음
14장에는 삼위 하느님께서 모두
등장한다.
요한 복음 14장
10절에서 성자 하느님께서
성부 하느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하느님 안에 계시다는 것은 이 두 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는 분명히 독립된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체론적
동질성을 가지며, 신적 속성에 있어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 예수님을 본 자는 성자와 동일 본체이신 성부 하느님을 본
것과 똑같다. 이러한 영적 신비를 필리보를
비롯한 제자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며, 더 나아가서 성령 하느님도
하나이시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서도 유비(analogy)를 찾아 볼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는 오직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계시다는'으로 번역된 '에스틴'(estin; is)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에이미'(eimi)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이다.
희랍어에서 현재형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너는 믿지
않느냐?'
여기서 '믿지'에 해당하는 '피스튜에이스'(pisteueis; you
believe)는 현재
시제이므로 진행 중인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3년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거듭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필립보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너희에게'에 해당하는 '휘민'(hymin; to
you)이라는 복수 표현이 나오므로, 이 문제는 단지 필립보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과 메시지,
하느님의 마음 및 우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생각을 지니고 오직 그것만을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그분을 모시고 함께 헀던 제자들의 눈에는 여전히 이것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비롯한 영적 진리가 단순히 경험이나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현세적, 정체적 메시야로서 탁월하며 특별한 지도자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라는 영적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이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의 믿음의 부족과 영적 무지 때문이었고, 동시에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역시 이러한 믿음의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요한 복음 14장 10절 후반부의 '머무르시는'에 해당하는 '메논'(menon; dwells)은 현재 분사로서 중단없이 계속 거주하시는 상태를 나타내고, '하시는 것이다'에 해당하는 '포이에이'(poiei; does)도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잠시도 분리됨이 없이 당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던길 멈추고>
한 일주일 형제들과 꽤 ‘빡센’ 작업을 하고 왔습니다.
계속되는 육체노동에 힘겹기도 했지만, 따뜻한 봄 햇살에 기지개를 활짝 펴는 한적한 바닷가 풍경을 듬뿍 마음에 담아왔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올랐습니다.
아침 이슬을 잔뜩 머금은 작은 풀꽃들이 투명한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곤 했는데,
그 자태가 너무나 예뻐 자주 가던 발길을 멈추곤 했습니다.
작은 풀꽃의 아름다운 자태에 한껏 취해 자주 발길을 멈추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때, 너무나 하찮아 보이고,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고, 또 비참해보이기도 하겠지만,
하느님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 인간의 시선과는 달라도 확실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이 엄청나게 꼬이고 꼬였다 할지라도,
우리 삶이 갖은 죄로 얼룩졌다 할지라도, 우리의 나날이 실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 각자의 삶은 그런대로 봐줄만하리라 확신합니다.
너그럽게 봐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분 눈앞에 우리 각자의 인생은 너무나도 예뻐 하느님께서는 자주 가시던 길을 멈추실 것입니다.
우리의 향기에 도취되셔서 감탄사를 연발하실 것 입니다.
특히 흔들리고 방황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분 눈에 더욱 예뻐 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아룁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한번 뵙는 것,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당시 제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과제 중에 가장 큰 과제 역시, 하느님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을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 햇살에 빛나는 작은 한 송이 풀꽃의 자태 앞에 넋을 잃고 바라보듯이 하느님께서도 작디작은 우리의 인생 앞에 감탄사를 연발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별 볼 일 없는 한 송이 들꽃 앞에 오래도록 발길을 멈추듯이
하느님께서도 하찮아 보이는 우리 각자의 인생 앞에 오래도록 발길을 멈추고
사랑 듬뿍 담긴 시선을 지속적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