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용서 (마태오 18,19ㄴ-22)

2017. 6. 25. 오전 7: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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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용서 (마태오 18,19ㄴ-22)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는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모세는, 너희가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와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한다. (신명 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한다. (에페소 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신다. (마태오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 세워진 '참회와 속죄의 성당' (2013.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후2시 봉헌식) 내부 제단 뒤 성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 제1독서 (신명30,1-5)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낸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1~3) 

앞장인 신명기 29장에서는 계약을 위반한 자에게 닥칠 저주를 선포한 이후, 신명기 30장에서는 회복의 국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절 다시 번역하면 '내가 너희 앞에 둔 그 축복과 그 저주의 바로 이 모든 일들이 너희에게 찾아온다면'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앞장까지의 내용속에서 주로 다룬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선포였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먼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데까지 이르는 비참한 상황이 이루어지는 미래의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때로는 하느님께 순종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전 국가적으로 하느님을 배반하여 저주를 당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모세의 설교 가운데 이미 등장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로 번역된 '하세보타 엘 레바베카'(hashebotha el lebabeka)에서 '하세보타''돌이키다' 란 뜻을 가진 '슈브'(shub)동사의 사역형 완료  2인칭으로서 '네가 다시 돌이키다' 라는 뜻이다.  

원문은 사역형을 사용해서 능동적으로 곰곰이 생각하여 기억해 내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슈브' 동사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로부터 돌이켜 배반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여기 언급된 마음의 돌이킴은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배반과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다음 절에서도 사용된 것을 볼 때에 본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회개에 따른 불신앙으로부터의 회복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으로 번역된 '힛디하카'(hidihaka)'몰아내다'란  뜻을 가진 '나다흐'(nadah)동사의 사역형에 2인칭 단수 목적격 접미어가 붙은 말로서 '그가 너를 내몰았다'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몰아낸 것은 '콜 학고임'(kol hagoim) '모든 민족들'이다. 여기에서 '민족들'(나라들)이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장차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서 그들에게 포로됨의 고통과 갖은 핍박을 주게 될 이방 국가가 단 한나라에 그치지 않을 것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북왕국 이스라엘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하고, 그 땅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었으며(B.C.722년), 남왕국 유다 역시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3차에 걸쳐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B.C.605년/B.C.597년/B.C.586년)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돌아와서'로 번역된 '샤브타'(shabtha) '되돌아가다'뜻을 가진 '슈브'(shub)동사의 완료형 2인칭이다. 앞절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불신앙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 뒤에서 이 단어를 보완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쓰이는 '들으면'으로 번역된 '샤마타'(shamatha)는 문자적으로 '네가 듣다'(순종하다)이다.  

이러한 표현은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며, 그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회개와 그에 따른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번역된 '베콜로'(beqollo)에서 일반적으로 '말씀'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명사 '따바르'(dabar) 대신에 말씀의 내용보다는 소리를 발하는 것 자체를 가리키는 '목소리'라는 뜻의 '콜'(qol)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 말씀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서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임을 알려준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에서 '하는 대로' 번역된 '케콜'(kekol)에서 '콜'(kol) '모든'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케콜''모든 것을 따라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모든 것'이다. 

신명기 29장 28절에 나온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들어야 할 것바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내 주신 율법의 모든 말씀 것이다. 

또한 포로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들어야 하는 말씀'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으로 나타냄으로써 미래의 세대들이 들어야 할 말씀과 오늘 전하는 말씀을 일치시키셨다. 

이것은 비록 많은 세월이 지난 그때라 할지라도 오늘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변함이 없을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항구성을 나타내기 위해 '너희에게 명령하는'으로 번역된 '메차웨카'(metsaweka)에는 '명령하다'는 뜻을 가진 '차와'(tsawa)동사의 분사형이 쓰였다. 히브리어에서 분사형은 그 행동이 끊임없이 계속됨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는 신명기 4장 29절과 6장 5절에도 언급된다.  여기서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을 가지고'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다른 사람에 의해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정신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레바브'(lebab)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정신'으로 번역된 '나프셰카'의 원형 '네페쉬'(nepesh)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 '너의 온 영혼을 다해'(with all your soul)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참고로 신명기 6장 5절의 '힘'으로 번역된 '메오데카'(meodeka)원형  '메오드'(meod)를 더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메오드'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 전영, 전력'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너희의 운명'으로 번역된 '셰부테카'(shebutheka)는  '포로로 잡히다'는 의미를 가진 '샤바'(shaba) 동사에서 유래한 '셰부트'(shebuth)에 2인칭 단수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서 '너의 포로됨'(your captivity; your fortunes)이라는 뜻이다.  즉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포로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방 민족에 포로되어 있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계약(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 복음 (마태18,19ㄴ-22)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원형 '아피에미'(aphiemi)'~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근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지난 주간은 많이 더웠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특히 기온이 높으니까 상한 음식을 잡숫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남북통일기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 가까운 사람과도 용서하고 화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용서와 화해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성당은 6,25전쟁중에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기도 하였습니다. 육군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한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당시 인민군들은 유엔군이 성당을 폭격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여 전투 중에 사용할 방공호구축작업과 의용군 강제 모집을 위한 대책 등을 대성전 안에서 협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집회들을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단 중앙의 상단 동굴에 모셔진 성모상은 인민군에 의해 일곱 발의 총탄을 맞는 수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총탄 세례를 받고도 성모상은 부서지지 않았으며 탄흔만 남긴 채 오늘날까지 성당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 인민군이 성모상을 없애려고 사다리를 세워놓고 올라가 성모상을 부수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부술 수가 없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힐책하는 눈초리로 인민군을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성모님을 수난을 받으신 성모님, 기적의 성모님, 치유의 성모님으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총탄을 맞은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그 메시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 자비와 사랑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총탄을 맞고도 깨지지 않고 보존되었다는 것은 결국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으로 표현된 모든 것을 당신의 큰마음으로 품으셨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민군이 총탄을 쏘았다면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위한 용서와 화해를 이뤄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아울러 인민군이 더 이상 성모님께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은 그분의 치유의 능력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 매괴 성모님의 모습을 보면 시선이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천상을 향한 시선은 우리도 하늘을 보라는 모범입니다. 어떠한 처지, 상황이 오더라도 하늘을 보라!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 때 천상을 보라! 거기에서 모든 능력이 샘솟게 됩니다. 감당할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천상의 능력을 받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남북간의 통일을 위해서도 마음을 다해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하나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예,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쉽다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리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기가 힘든 데 하느님과, 예수님과 한 마음 되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가 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는 분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 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것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품어 끌어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크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 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 하건 데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너 잘 난척하지만 너도 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로 알아요. 의로운 줄로, 거룩한 줄로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마다 죄에 죄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을 떠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 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결코 용서 못한다.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렇게 앙갚음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할지언정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눈뜨면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진실을 알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 몸으로 손발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으뜸제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떠날 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막상 위험에 직면하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야 말로 본이 아니게 얼떨결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나는 의롭다, 떳떳하다.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별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주님의 으뜸제자로 활동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과거의 살인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도구로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대상은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웃 안에 공동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용서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친교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해를 재촉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화해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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