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내 멍에를 메고 (마태 11,25-30)

2017. 7. 9. 오전 5: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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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 내 멍에를 메고  (마태 11,25-30)

즈카르야 예언자는 시온에게,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실 임금님을 예고한다. (즈카 9,9-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0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바오로 사도는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이고,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한다. (로마 8,9.11-13)
형제 여러분, 9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시며,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서공석 신부님]<중요한 건 지혜가 아니다>- 2014년 7월 6일 (연중 제14주일) 마태 11,25-30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구원의 길입다. /서 공석 신부 강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실망한 제자들은 흩어져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차차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함께 회상하면서 그분이 그들에게 남긴 말씀들을 실천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실천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의 수는 늘어나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회상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회상한 바를 글로 남겼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진 복음서들입니다. 그 기록들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닙니다. 부활하여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그들이 기억해 낸 예수님의 정확한 말씀들이 있고, 또한 자기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깨닫고, 믿게 된 말씀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로 소개되었지만, 사실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들이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지혜와 슬기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이 일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신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당국은 예수님 안에 그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분을 거짓 예언자라 믿고 죽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은 모세와 더불어 시작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중심으로 시작한 유대교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율사들은 율법 준수를 절대화하고, 사제들은 제물 봉헌을 절대화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기원에 있었던 믿음을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지혜가 없거나, 그들이 슬기롭지 못하여,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제사의례를 절대화한 나머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하느님을 잊으면서 그들은 율법과 제사를 빙자하여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지혜는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외면하게 하였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물 봉헌은 사람이 노력하여 얻은 산물(産物)을 먼저 하느님의 시선 아래 갖다 놓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맏자식, 농사 수확의 맏물, 사육하는 동물의 맏배 등, 자기들이 얻은 맏물을 먼저 하느님 앞에 가져와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봉헌된 것은 하느님이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바치면,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고, 그때부터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인간의 이기적 시선을 교정해 줍니다. 따라서 제물 봉헌은 사람을 나눔으로 초대하고, 그 나눔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율사들은 인간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을 가상(假想)하여 지켜야 하는 행동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율법 조항은 많아지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도 많아졌습니다. 사제들은 성전에 많이 바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많이 바치면,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우리의 인과응보(因果應報) 관행을 동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의 관행을 하느님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와 슬기로움은 하느님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하느님이지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자비하신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혜롭고, 슬기롭기를 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슬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우리의 지혜와 슬기의 산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철부지들’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철부지’는 어린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입니다...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마르 10, 14-15). 예수님은 이렇게 철부지 어린이를 하느님의 나라와 연결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물론 어린이와 같이 유치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혜와 슬기에 의존하여 하느님을 상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부모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며 부모로부터 배워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심이 담긴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 곧 자비와 용서를 배워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슬기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지혜의 산물도 아니고, 우리가 슬기롭게 행동하여 감동시킬 수 있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많이 바쳐서, 많은 대가를 얻어내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배우고, 그 생명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단편적으로만 실천합니다. 우리는 어쩌다 한 번씩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용서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는 말씀으로 끝맺었습니다. 지혜와 슬기를 위해 ‘수고하고 짐을 진’ 우리는 예수님이 열어주신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배워 살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을 벗어나는 자비의 길이고, 이웃을 돕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길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보다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마태 11, 25-30 : 고생하는 이들아, 나에게 오너라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안식’(安息)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식은 우리가 지고 가야할 ‘짐’과 ‘멍에’를 없앰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방법을 통해서 얻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당신께 다가가,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난주에 있었던 ‘전국 신학교 교수 신부 협의회’에서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종류의 ‘중독’에 대해 논의하며, 중독에 빠져 있는 이들을 도와주는 방법을 찾으려고 고민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이 시대에 많은 이들이 중독에 걸려있고, 아니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독에 걸린 사람에게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약물, 격리 등의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나누며 알코올, 마약, 도박, 인터넷, 게임 등의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에 또 다른 모습의 무거운 짐을 고생스럽게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임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그 힘든 ‘짐’과 ‘멍에’의 무게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러한 ‘짐’과 ‘멍에’의 고통을 느끼면서 중독에 빠진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그 고생에서 벗어나 네 인생을 다시금 멋지게 살아가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너희는 스스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나는 너희를 도울 수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 어서 오너라. 그리고 아직 나에게 오지 못하고 중독의 고통에 빠져 있는 이들이 있다면, 함께 나에게 데리고 오너라. 내가 그들을 고쳐주겠다. 너희들이 정말 낫고자 하면, 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라. 그러면 나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중독에 빠지더라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배우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그 힘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고, 이를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치유의 여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독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독자에는 참으로 귀한 처방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명하는 마음,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마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십자가 상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음에도 인간에게 순명하는 마음, 배고프고 지친 이들과 병든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내시고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마음, 죽을죄를 지은 이들을 용서하시며 새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마음, 제자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예수님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 하느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순명과 사랑의 마음, 자기보다 더 큰 가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자신의 ‘짐’과 ‘멍에’로 여기고 받아들인다면, 중독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려고 목숨 걸고 노력한다면, 그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중독의 증세가 보일 때,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을 가지려고 5분만 온전히 노력하면, 이미 치유는 시작된 것이고, 이를 반복하면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담배를 끊지 못하던 사람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끊는 모습, 불륜을 끊지 못하던 사람이 성체조배를 매일 하며 정리하는 모습을 저는 실제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독에서 빠져나올 방법 또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매우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며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이러한 짐과 멍에로 힘들고 버겁게 살아가는 이들이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며, 편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도와주며 기도합시다.

최인각 신부(가톨릭신문)


연중 제14주일(7/04)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내 멍에를 메어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에서 ‘무거운 짐, 멍에’는 생활고, 병고 등의 고통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인생살이 자체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인생 자체가 멍에가 되고 짐이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율법들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런 해석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고,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입니다.

(멍에와 짐을 율법으로 해석하려거든 이천여 년 전의 유대교 말고,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의 교회법이나 규정들이나 제도들이

혹시 신자들에게 멍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해방시켜서

참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주겠다.” 라는 ‘해방 선포’이고,

그래서 사실상 ‘복음 선포’입니다.

‘안식’은 참으로 해방된 사람들이 참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해방, 자유, 평화, 행복이 없으면 안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인데,

‘구원’이라는 말은 해방, 자유, 평화, 안식, 생명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따르면 온갖 멍에와 짐에서 벗어나서 편안함과 가벼움을 얻게 된다.”,

또는 “해방과 안식을 원한다면 나를 믿고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멍에와 짐을 주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편해도 멍에는 멍에이고, 아무리 가벼워도 짐은 짐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멍에와 짐을 가벼운 멍에와 짐으로 바꿔 주신 분이 아니라,

멍에와 짐 자체를 완전히 없애 주신 분입니다.

만일에 무거운 멍에와 짐이 가벼운 멍에와 짐으로 바뀌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해방과 안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명들을 ‘예수님의 가벼운 멍에’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우리를 온갖 억압과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는 열쇠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을 충실하게 실천한다면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의 경우,

우리가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게 되면,

나를 짓누르고 억압하는 증오심과 분노에서 해방될 수 있고,

그러면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5-27).”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라는 말은,

유식한 척 하는 사람들, 잘난 체 하는 사람들,

기득권층, 부유층, 상류층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인간 구원 계획을 뜻하는 말입니다.

‘감추시고’ 라는 말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즉 인간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배척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감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철부지들’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신앙인들인데,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드러내 보이시니’ 라는 말은,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또는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철부지들에게만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과 예수님의 복음은,

관심 갖지 않고, 외면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찾고 구하는 사람만 보게 되는 법입니다.)

 

이 말씀을 ‘멍에’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칭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나에게는 멍에와 짐이 없다.” 라고 큰소리치는 자들,

또는 “내 인생의 멍에와 짐은 나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라고 큰소리치는 자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어떤 학문이나 사상으로

인생의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철부지들’은 “예수님이 벗겨주지 않으시면,

인생의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찾는 겸손한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참된 안식으로 들어가는 여러 문 가운데 하나의 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문’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앞의 예수님 말씀에서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참된 안식으로 가는 다른 길이나 다른 문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참된 행복과 평화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그것들을 주실 수 있음을 믿고,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 과정에서 십자가를 만날 때도 있지만, 십자가를 지나가면

부활과 생명과 안식을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연중제14주일 소성무일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고, 힘든 일이 하나도 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사제들에게 무릉도원과 같은 곳은 어디일까요? 강론 없는 미사, 모든 조직이 잘 갖추어진 본당, 재정이 풍족한 보당, 사목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보좌 신부를 만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수도자를 만나는 것이 무릉도원일까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을 배우고, 다른 문화에 적응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릉도원일까요?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기도 힘들고, 대화를 하고 싶어도 친구를 만나기 어려운 곳이 무릉도원일까요? 중요한 것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비록 가난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유해도 늘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을 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녔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요양 병원에 계신 분들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셨고, 제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에게 주님은 위로가 되셨고, 용기를 주셨고, 희망이 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청량리 성 바오로 병원으로 봉성체를 갔을 때입니다. 수술을 기다리는 자매님께서 기도를 청하셨고, 성체를 모시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고,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큰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매님께서는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다 잘 될 거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신앙을 갖는 사람들이 때로 고통을 받고, 시련을 겪고, 순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와 짐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육에 따라서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서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의 욕망에 따라서 살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뜻에 따라서 살면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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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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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가라지 비유 (마태 13,24-43)17.07.23조회 69[연중 제15주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 13,1-23)17.07.16조회 275[연중 제14주일] 내 멍에를 메고 (마태 11,25-30)17.07.09조회 95[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마태 10,17-22)17.07.02조회 149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용서 (마태오 18,19ㄴ-22)17.06.25조회 87[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살과 피 (요한 6,51-58)17.06.18조회 142[삼위일체 대축일] 사랑 (요한 3,16-18)17.06.10조회 297[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으라(요한20,19~23)17.06.04조회 347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청소년 주일)] (마태 28,16-20)17.05.27조회 324[부활 제6주일]진리의 영 (요한 14,15-21)17.05.21조회 201[부활 제5주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1-12)17.05.14조회 255[부활 제4주일(생명 주일·성소 주일)] 착한 목자 (요한 10,1-10)17.05.07조회 74[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엠마오 (루카 24,13-35)17.04.30조회 78[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보고서야 믿느냐? (요한 20,19-31)17.04.23조회 58[예수 부활 대축일]성경 (요한 20,1-9)17.04.16조회 55[주님 수난 성지 주일]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태26,14─27,66)17.04.09조회 83[사순 제5주일]라자로의 소생 (요한 11,1-45)17.04.02조회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