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용서 (마태18,21-35)
집회서는 분노와 복수가 아니라 용서하고 자비를 품으며,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한다. (집회 27,30─28,7)
30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28,1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그분께서는 그의 죄악을 엄격히 헤아리시리라.
2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3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4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5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6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7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한다. (로마 14,7-9)
형제 여러분,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임금에 비길 수 있다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신다. (마태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집회27,30-28,7)
집회서는 유다 지혜 문학의 총결산이라 부른다.
이 책의 원문은 기원전 18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벤 시라(집회50,27)에 의해 히브리어로 쓰여졌다.
기원전 130년경에 벤 시라의 손자가 이집트에서 이 책의 히브리어 사본을 발견하고,
히브리어를 모른 채, 그리스어만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을 위해 그리스어로 옮겼으며,
이 그리스어 본문이 현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집회서를 '리베르 에클레시아스티쿠스'
(Liber Ecclesiasticus:교회의 책)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치프리아누스 시대 이후 서방 교회에서
새로 입교한 사람들을 교육할 때에 이 책의 가르침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집회서의 원저자 벤 시라는 율법서와 예언서, 그밖의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을 읽고
해독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오다가,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율법에 맞는 삶을 한층 더 진지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집회서는 인생과 관련한 온갖 실천적 주제들을 두서없이 다루는데, 편의상 5부분으로 나눈다.
1부(1,1-16,23)~저자는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임을 천명한다.
여기서 '경외함'은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2부(16,24-23,28)~하느님의 창조위업과 창조주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위치를 서술하고,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자에 관한 금언들을 나열한다.
3부(24,1-32,13)~지혜와 율법에 관한 가르침과 기타 금언들을 포함한다.
4부(32,14-42,13)~하느님 경외와 올바른 처세를 강조한다.
5부(42,15-50,29)~하느님의 영광과 조상들의 올바른 삶을 기린다.
부록~51장
오늘 독서는 3부에 해당되는데, 3부는 25장~32장에서 여러 가지 격언과
애인.장사.언행.정의와 신의.위선.원망.빚보증.자선.자녀교육.건강과 재산.음주와 잔치등과
관련된 구체적 처세 지침들이 나온다.
오늘 1독서(집회27,30-28,7)는 <분노와 용서>에 대한 말씀을 주신다.
우리가 복수와 적개심이 전제된, 마음속의 화인 분노를 풀고 용서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교리에서는, 분노(Ira;Anger)란 칠죄종의 하나로서, 복수(앙갚음)하고자 하는 무질서한 감정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상처받고, 모욕입고, 손해보고, 고통 당했을 때,
의로운 분노(화)가 일어난다.
이럴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인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에 따라, 그리고 박해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라는 말씀에 따라
(로마12,9-21) 의지적 신앙의 행위로, 분노의 대상을 용서해 줄 수 있다.
내가 의지적으로 주님 말씀에 따라 의지적으로 용서한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렇다고 내 마음 속의 상처받은 감정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용서(Remissio;Venia;Forgiveness) 콤플렉스에 빠질 필요가 없다.
용서는 내가 상대방한테 찾아가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가 없다.
용서는 피해자의 특권이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과 관계없이 내가 혼자 하는 것이라 쉬운 것이다.
그러나 화해(Reconciliatio)는 다르다.
화해란 상대방과 직접 만나, 진실과 사실, 잘잘못을 따지고 나서,
서로 수용하고 인정할 것은 하고, 용서하고 악수하는 것을 말한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한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예수님게서 말씀하셨다.(마태5,21-24참조)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한다고 너무 성급하게 화해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에 겉으로는 형식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근본적인 마음의 상처 문제와 화해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다.
좀 시간을 가지고,작금의 문제를 복음적 관점과 자신의 영혼의 성화의 관점인 영성적 차원에서
깊이 성찰해 보아야, 본질적 문제가 해결된다.
Martin H.Padovani(신언회 선교사제,가정문제 전문상담가,정신요법가)는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우리가 화가 났을 경우, 안정될 때까지 우리 자신과 상대방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안정 체계 Cooling System 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안정을 찾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상처받고 화가 났을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이 잊어버리거나
치유하거나 안정을 찾을 시간을 줘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P57-77참조, 백승치 옮김,분도출판사)
그리고 내가 화해를 청했을 때,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럴 경우 로마서 13장 8절의 말씀대로 그에게 필요한 은총이 내리도록,
그가 회개하도록, 기도와 희생 바쳐 줄 사랑(애덕)의 의무가 있다.
연중 제24주일 복음 (마태18,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의 원형
'아피에미'(aphiemi)는 '~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근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는 '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는 '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로 '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나의 삶은 언제나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 시대의 소신과는 사뭇 대비되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그래서 죽음조차도 애초부터 내가 겪게 될 인간 존재의 상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과 결합되는 구원의 길임을 확신한다면, 과연 이 세상의 삶은 어떤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될까요?
오늘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용서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임을 일깨워 줍니다. 얼마만큼 용서하면 성숙한 인간이 되는지 묻는 베드로의 질문 속에는, 누군가를 용서함으로써 그보다 더 나은 인간임을 짐짓 드러내려는 우월감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만 탈렌트라는 상상하기 힘든 금액을 탕감해 준 임금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 겨우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으로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체험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용서는, 하느님 앞에 선 나약한 내 존재 전체가 이미 용서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신비를 깨달았을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 삶 전체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삶과 죽음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면, 내가 하느님께 진 빚을 어떻게 세상의 기준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용서는 하느님께서 하시고, 나는 그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내 이웃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