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어린이처럼 (마태 18,1-5)

2017. 10. 1. 오전 6: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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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어린이처럼 (마태 18,1-5)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사야 66,10-14ㄷ)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11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1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13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14 이를 보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그리고 주님의 종들에게는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리라.


바오로 사도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으니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한다.(1코린 7,25-35)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32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33 그러나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4 그래서 그는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5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 (마태 18,1-5)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제1독서 (이사66,10-14ㄷ)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13.12)

 

 이사야의 이름 뜻은 '야훼는 구원이시다' 또는 '야훼께서 구원을 주신다'이다.

이사야는 남부 유다 임금 우찌야가 죽던 해(기원전740년)에 예언자 소명을 받았다.

 

전반부는 바빌론 유배 훨씬 이전에 활동했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과 신탁을 반영하는

제1 이사야서(1~39장), 후반부는 유배 시대에 나온 신탁과 예언을 포함하는

제2 이사야서(40~55장) 유배 후 시대의 신탁과 예언을 포함하는

제3 이사야서(56~66장)으로 나뉜다.

 

제3 이사야서로 불리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남부 유다 백성의 상황 겨냥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사야서 1장에서 언급된 이사야서 전체의 중심 주제,

구원의 보편주의 재천명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당신께 충실한 남은 자들을 구원할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하느님의 도성인 시온 또는 예루살렘이

       참다운 예배의 중심이 될 것이다.

세째,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경계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미칠 것이다.

네째, 주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확장된다.

 

그리고 제3 이사야서에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느님을 남성적 표상 뿐 아니라

여성적 표상으로도 표현한다(용사와 해산하는 여인; 42,13~14/ 아버지와 여인; 45,10 /

주님과 젖먹이를 가진 여인; 49,14-15/ 주님과 자식을 위로하는 어머니; 66,13).

 

오늘 소화 데레사 대축일에 이사야 에언서가 채택된 것은 소화 데레사가

오늘 독서 이사야 예언서 66장 12~13절에서 완덕의 길, 성인되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언제나 성인이 되기를 갈망해 왔다.

 그러나 성인들과 나를 비교할 때, 내가 분명히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과 나 사이에는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산봉우리와

 발 밑에 밟히는 눈에 띄지도 않는 모래알과도 같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대신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크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불완전함을 가진,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는 하늘로 가는 작고도 아주 새로운 길을 찾겠다.

 완덕이라는 힘든 계단을 올라가기에는 내가 너무나 작기 때문에,

 나를 예수님께 올려다 줄 승강기를 찾고 싶다.'

 

 그래서 나는 성서에서 내가 원했던 것들을 찾아 냈다.

 그리고 영원한 지혜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다.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잠언9,4) 


   <소화 데레사가 읽은 성서는 이 구절이 "네가 만일 아주 작은 자라면,

  내게로 오라" 고 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았음을 알고 즉시 그분께 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한 작은 자(어리석은자)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시려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이것이었다.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이사66,13.12)

 

 저를 하늘로 올려다 줄 승강기는 예수님, 바로 당신의 팔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커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저는 작은 채로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점점 더 작아져야 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한없이 부족하고 어리석고 작은 자신이 구원의 길, 성인의 길,

완덕의 길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에

생명의 말씀 속에서 지혜의 길을 찾았다.

 

그것은 주님께 가는 것이고, 그 다음은 팔과 무릎위에 안기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무상으로 주님께 젖을 얻어 먹을 수 있고,

귀염(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믿음과 신뢰에 찬 소화의 길, 사랑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도 각자 믿음과 영성의 차이가 있지만, 소화 데레사 처럼 절대적 생명의 말씀속에서

완덕과 성인의 길, 쉽고 분명하고 단순한 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렵고 복잡하신 분이 아니시다.

 

나는 유아세례, 첫 고백, 첫 영성체, 견진, 신학교 추천서를 받은 본당이

소화 데레사 성녀가 주보였다.

 

그리고 사제가 되어 첫 본당 신부로 부임한 본당도

소화 데레사 성녀가 주보이셨다.

 

나의 성소길에 영육간에 도움을 많이 주는 분들 중에

유독 소화 데레사 본명 가지신 분들이 많다.

 

그래서 내가 한국 땅에 태어나 외국에 처음 나간 곳이 프랑스 파리였다.

90년대 초에 파리에서 유학 중인 동창 신부가 드골 공항에서

어디를 제일 가 보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난 스스럼없이 루르드 성모님 성지와

리지외 소화 데레사와 아르스의 비안네 성인 성지라고 대답했다.

 

지금도 리지외에서 소화 데레사 생가, 성녀가 다니던 본당, 카르멜 수녀원 부속

성녀 소화 데레사 박물관을 순례하던 기억이 새록 새록 난다.

 

내게도 성녀처럼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단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며,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 주신다는 단순하지만, 전폭적 신뢰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안에도 성녀 소화 데레사 처럼, 교회의 존재 이유요 목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과 기도의 지향이 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복음 (마태18,1-5)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0)

 

 '주의하여라'에 해당하는 '호라테'(horate; take heed)의 원형 '호라오'(horao)

일차적으로는 '눈으로 보다'(요한8,57)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알다', '조심하다', '유의하다'라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잊지 않도록 마음에 두어 유의해서 반드시 지켜야 함을 뜻한다.

 

특히 여기서는 현재 명령형으로 기록되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이

단순한 권고 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실행해야 할 실천적 명령이며,

또한 현재 명령형이기에 희랍어에서 현재는 일회성이 아닌

계속적으로 유념해야 할 사항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업신여기지'에 해당하는 '카타프로네세테'(kataphromesete;

look down; despise)원형 '카타프로네오'(kataphroneo)

'업신여기게 되다','가볍게 여기다'(마태6,24), '업신여기다',

'멸시하다'(로마2,4)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세를 뜻한다.

 

본문에서는 부정(不定) 과거 가정법으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에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어 '메'(me; not)와 함께 쓰여서 강력한 금지를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 18장 10절은 5~9절에 뒤따라 나오지만, 내용상

14절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10절에서 14절까지의

한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 18장 10절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14절)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멸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그들의 천사들이'에 해당하는 '앙겔로이 아우톤'(anggeloi auton;

their angels)에서 '그들의'에 해당하는 '아우톤'(auton; their)

앞서 나온 '작은 이들'을 말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수호 천사를 임명해 두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사도12,15).

 

히브리서 1장 14절에서는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이 아닙니까?"

라고 계시되어 있다.

 

이 천사들의 기능과 역할 및 활동의 방법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속단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것은 '작은 이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특별 대우를 받아야 될 존재들임을 나타낸다.

 

'작은 이들'지키는 천사가 항상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있다는 것은

'작은 이들'하느님께 특별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사실은 '작은 이들'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작은 이들' 예수님께 속한 믿음의 자녀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과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잃어버리는'에 해당하는 '아폴레타이'(apoletai; should be lost;

should perish)원형 '아폴뤼미'(apollymi)돌보는 사물, 혹은

짐승 등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잃다'(마태15,24)라는 뜻만이 아니라,

일이 어그러지거나 실패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망하다'(마태26,52)는 뜻과

그리고 영원한 생명(구원)을 상실하게 됨을 의미하는 '멸망하다'

(요한3,16)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잃어버리다'는 것은 영원히 하느님 품을 떠나

죄의 길에 머물다가 영원한 참 생명을 얻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볼 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결국 선택하신 자들 가운데

단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나타낸다.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성인들은 하늘의 별처럼 찬란히 빛나지만, 저마다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이 세상을 살아 낸 분들입니다. 따라서 그분들이 가진 성덕과 카리스마(은사)는 다 특별합니다. 그렇지만 그중에 공통된 성덕은 바로 겸손함과 단순함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며, 따라서 우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하늘 나라의 성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어린이 같은 성인입니다.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가서 결핵에 걸려 스물네 살의 짧은 생애를 마친 성녀는, 가장 약하고 단순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아 내었습니다. 봉쇄 수녀원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분의 기도는 온 세상을 향했던 선교의 수호자입니다.
그분의 이 위대함의 근본은 바로 겸손함과 단순함입니다. “당신의 작은 딸은 언제나 아주 이름 없는, 모든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모래알로 남아 있어서 예수님만이 그를 보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는 점점 더 작아져서 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작은 마음 안에, 성녀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겼습니다. 어머니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어린이의 모습은, 우리가 성녀를 통해서 바라보는 거룩함의 모습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1-5)”

 

제자들의 질문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3-34).”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루카 9,46).”

그래서 지금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교회에서는 누가 가장 높은 사람입니까?”로 해석됩니다.

이 질문은 사실상 자기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를 묻는 질문이고,

자기들 사이의 서열을 묻는 질문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이(마태 16,18-19)

그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일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신앙인의 자격’에 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서열에 관한 말씀도 아니고,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 가르쳐 주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의 뜻은, “너희는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만 생각하고 노력하여라.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서 어린이로 변화되어야 한다.”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지상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일 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런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쓸데없는 욕망을 버리려면 회개해야 하고, 어린이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오직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단순하고,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회개’는, 우리 내부에 있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여러 가지 욕심과 욕망들을 모두 버리는 일입니다.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완전히 변화된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로 변화된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만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고,

또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습니다.

똑같이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들만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 사이의 서열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앞의 말씀과 같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즉 이 말씀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로 해석됩니다.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베드로 사도를 수제자로 삼으셨을까?

그 일로 인해서 제자들 사이에 서열 다툼이 생기지 않았는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수제자로 삼으실 때,

그를 그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반석’으로, 즉 주춧돌로 임명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춧돌’은 건물의 가장 밑에서 건물을 떠받치는 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 일은,

교회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밑에서 섬기라는 뜻입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이 세상에서 교회가 제 구실을 잘하려면 여러 가지 직책과 직위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높고 낮은 서열이 아니라 ‘탈렌트’의 차이일 뿐입니다.

높은 자리처럼 보이는 자리는 사실은 가장 많이 섬겨야 하는 자리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섬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서 ‘어린이’는 앞의 말씀과 다르게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소외계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회개하고, 변화되었다면, 구체적으로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나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섬김’이 아닙니다.

나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섬기기만 해야 하는 사람도 없고,

'섬김‘을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서로’ 섬기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전체를 생각하면 ‘서로’이지만,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입니다.

‘낮춤’과 ‘섬김’은 항상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남들은 하지 않는데 왜 내가?” 라고 다른 사람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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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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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혼인 잔치 의 비유 (마태 22,1-14)17.10.15조회 260[연중 제27주일]포도밭 비유 (마태 21,33-43)17.10.08조회 280[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어린이처럼 (마태 18,1-5)17.10.01조회 68[연중 제25주일] 품삯 (마태 20,1-16)17.09.24조회 59[연중 제24주일]용서 (마태18,21-35)17.09.17조회 66[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17.09.16조회 58[연중 제23주일] 내 이름으로 모인 곳 (마태 18,15-20)17.09.10조회 56[연중 제22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 16,21-27)17.09.02조회 56[연중 제21주일] 반석 위에 내 교회 (마태오 16,13-20)17.08.26조회 63[연중 제20주일] 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태오 15,21-28)17.08.19조회 203[연중 제19주일] 물 위를 걸으시다 (마태 14,22-33)17.08.13조회 145[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마태오 17,1-9)17.08.06조회 349[연중 제17주일]밭에 숨겨진 보물 (마태 13,44-52)17.07.29조회 58[연중 제16주일] 가라지 비유 (마태 13,24-43)17.07.23조회 69[연중 제15주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 13,1-23)17.07.16조회 275[연중 제14주일] 내 멍에를 메고 (마태 11,25-30)17.07.09조회 9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마태 10,17-22)17.07.02조회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