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일]혼인 잔치 의 비유 (마태 22,1-14)

2017. 10. 15. 오전 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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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혼인 잔치 의 비유 (마태 22,1-14)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 산 위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고 예언한다. (이사야 25,6-10ㄱ)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시편 23(22),1-3ㄱ.3ㄴㄷ-4.5.6(◎ 6ㄷㄹ)
◎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바오로 사도는,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알며,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다고 한다. ( 필리피 4,12-14.19-20)
형제 여러분,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20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신다. (마태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이사야 25,6-10ㄱ)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8)

 

'죽음'에 해당하는 '함마웨트'(hammaweth) 죄의 결과에서 오는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무트'(muth)에서 유래한 명사로서(창세2,17),

육체적 죽음 뿐만 아니라 영적 죽음까지 모두 포괄한다.

 

영적 죽음은 하느님의 생명이 없는 상태로서(에페4,18),

생존시에도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없으며,

죽어서는 하느님의 의노의 심판에 처해지는 운명을 나타낸다.

 

죄를 범함으로 이 땅에 들어온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이러한 영적 죽음이

지배하는 한, 완전한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주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마련하여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기 전에 죽음을 완전히 없해 버리실 것이다.

 

한편 '없애 버리시리라'에 해당하는 '빨라'(balla)의 원형 '빨라으'

(ballah)는 일반적으로 음식물 따위를 목구멍 아래로 삼켜 버리는 것

의미한다(창세41,7; 탈출7,12; 민수16,30; 욥기20,15).

 

이 죄많은 세상에서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1베드5,8), 장차 다가온 종말의 날에 주님께서 생명의 원수인 죽음을

삼켜 버리실 것이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강조되어 있으며, 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완료 시제는 과거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로서 비록 미래의 일이지만

그 실현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분명히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한다.

 

한편 이러한 죽음의 파멸에 대해서는 묵시록 21장 4절

확정적이고 선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눈물'에 해당하는 '띠므아'(dimah)슬픔과 애도의 문맥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성도들이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되면, 주 하느님께서는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 흘렸던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이다.

 

이것은 주 하느님의 위로가 넘칠 것을 의미하는데,

그의 위로가 세상에서 흘렸던 모든 눈물과 당했던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넘치는 것임을 암시한다.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풍성하여

어머니가 바깥에서 다쳐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자녀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듯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난당한 자녀들의 얼굴을

어루만지시며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묵시록 7장 17절, 21장 4절에서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다.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본문은 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결코 단죄를 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되는

축복을 받을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주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여

범죄한 대가로 인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나설 때

단죄를 당해 그 수치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구속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 대전에 설 때에

세상에서 연약하여 지었던 죄로 인해

결코 단죄를 당하거나 수치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과 관계된

진리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신 백성'에 해당하는 '암모'(ammo)구약 시대에 오직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게만 한정하여 주로 사용하던

명사 '암'(am)에 3인칭 소유격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진 자들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로마8,14~17).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문은 이사야 25장 6~8절의 예언이 이사야 예언자 자신이 지어낸

허탈한 희망의 말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로부터 비롯된

계시의 말씀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예언이 신적 권위를 지녔음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은 이유의 의미를 지닌 접속사 '키'(ki; 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계시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위의 예언들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연중 제28주일 복음(마태22,1~14)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려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2.5.10~12)

 

루카 복음 21장 23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정화하시고 가르침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러한 일을 하는 권한에 대한 질문을 한다.

 

여기에 대해 21장 24~27절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대답하신 후에

이어서 세 가지 비유를 들어 그들이 사악하고 완고한 죄악됨을 지적하신다.

 

21장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21,28~32),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인의 비유(21,23~46),

그리고 오늘의 혼인 잔치 비유(22,1~14)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불순종을 지적하고,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시며

그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셨고, 이제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더

그들이 메시야를 거절한 것에 대한 심판과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22장 1~10절에서는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언급되고, 11~14절에서는 초대에 응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당한 운명이 언급되고 있다.

 

이 비유는 과거 유대인 중심으로 진행되던 구원사가 이방인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의 초대에 응했지만 거룩함과 의로움의 옷을 입지 않으면

종말의 날에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복합적인 주제가 들어 있는 것이다.

 

'~에 비길 수 있다'에 해당하는 '호모이오테'(homoiothe; is like)

하늘 나라에 해당하는 천국이 마치 혼인 잔치의 전반적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동사이다.

 

마태오 복음사가'천국'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자기 아들을 위해

어떤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의 정경으로 구체화시켜 묘사하고 있다.

 

'혼인 잔치'로 번역된 '가무스'(gamus; a marriage;

a wedding banquet)'가모스'(gamos)의 복수 목적격이다.

 

'가모스''결합하다'는 뜻의 '감'(gam) 이라는 어근에서 유래하여

부부라는 새로운 결합이 이루어지는 '혼례식'을 말한다.

 

특히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이 단어는 혼례식 때 행해지는 여러 행사들을 의미하는데,

혼인 예식을 포함한 혼인 이후의 축하 순서로서 음식을 먹고 나누는 잔치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식탁 교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한 상에서 먹고 마심으로써 동질감과 공동체 의식을 가졌다.

 

특히 절기에 이루어지는 식탁의 친교구원받은 백성이 누리는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하고 익숙한 식탁의 친교를

실례로 들어 천국의 비밀을 설명하셨다.

 

루카 복음 22장 3절에서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는

이미 오기로 예정된 손님이 있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초대받은'으로 번역된 '케클레메누스'(keklemenus; were bidden;

had been invited)'칼레오'(kaleo)의 과거 완료 분사이다.

 

임금은 혼인 잔치 전에 이미 몇몇 사람들을 초대했으며,

이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구약의 선민들로서 혼인 잔치로 비유되고 있는

천국 잔치에 먼저 초대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지'로 번역된 동사 '에텔론'(ethelon; they would)

'텔로'(thelo)의 미완료 과거로서 '원하다', '좋아하다',

'갈망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이 단어가 여기서는 부정어 '우크'

(uk; not)와 함께 사용되어 전혀 원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마태오 복음사가 반복과 계속의 의미가 있는 미완료 과거로 이 동사를

기록한 이유는 하느님의 뜻에 반발하여 복음으로서의 초대를 거부하는

행위가 유대인들의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22장 4절에서 일차 초대에 거부한 자들에 대해 임금은 노하지 않고,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다시 초청한다.

 

이것은 인간의 거역을 당장 심판하지 않고 오래 인내하시며,

또 다시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준다.

 

앞에 나온 첫번째 종들구약의 예언자들을 가리키며,

두번째 종들신약의 복음 전파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22장 4절의 본문 서두에는 '보라'

뜻하는 감탄사 '이두'(idu; behold)가 등장한다.

 

이것은 두번째 종들을 파견한 임금이 만반의 준비를

이미 다 갖추어 두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잔칫상'으로 번역된 '아리스톤'(ariston; banquet)

초기 희랍어에서는 일하러 나가기전 아침 일찍 먹는 처음 음식,

조반(the first food)를 가리켰는데, 후기 희랍어에서는 점차로

'점심'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루카11,38; 14,12).

 

'황소와 살진 짐승'에 해당하는 '호이 타우로이 무 카이 타 시티스타'

(hoi tauroi mu kai ta sitista; my calves and fattened cattle)에서

황소 앞에는 남성 복수 정관사 '호이'(hoi)와 살진 짐승 앞에는 중성 복수 정관사

'타'(ta)가 쓰였는데, 여러 마리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연 설명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판타 헤토이마'; panta hetoima;

everything is ready; all things are ready)라는 말을 첨가해서,

혼인 잔치의 음식은 큰 잔치를 치르기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만큼 천국의 잔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최대의 만족을 주는 풍성한 잔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22장 5절에는 임금의 잔치 초대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이유들이 나온다.

 

여기서 '아랑곳하지 않고'로 번역된 '아멜레산테스'(amelesantes;

they paid no attention; they maid light of it)'보살피지 않다',

'무시하다'는 뜻을 가진 '아멜레오'(ameleo)의 과거 분사이다.

 

이렇게 임금의 거듭된 간절한 초대 자체를 아예 무시하며

전혀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그들에게 부여된

놀라운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거절은 22장 7절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과 비참한 멸망을 가져온다.

 

당시 그들의 관심사는 임금의 초대보다는 밭과 장사였다.

 

'장사'로 번역된 '엠포리안'(emporian; business; merchandise)

'엠포리아'(emporia)의 목적격으로서 규모가 크지 않은 '장사',

'상업', '사업'을 말한다.

 

임금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 자신의 소유,

즉 현실 문제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본문과 유사한 구절인 루카 복음 14장 19절과 20절에는 잔치의 초대를 거부한

이유밭을 산 것외에도 겨릿소 다섯 쌍을 사서 부려 보려고 가는 것

장가 든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 역시 자신의 현실 문제에 얽매여

구원에로의 초청을 등한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22장 6절'나머지 사람들'로 번역된 '호이~로이포이'(hoi~loipoi';

the rest)자신의 관심을 쫓아간 두 종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다.

 

새 성경은 이들이 집이나 마을에 남아 머물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장가간 사람들'을 나타내는 유대적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결혼하여 아내를 취하면, 집에 머무르면서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모든 사회적, 국가적 의무로 부터 제외되었는데(신명20,7; 24,5),

루카 복음사가가 큰 잔치의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세번째 이유가

장가갔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이유이기도 하다(루카14,15~24).

 

그런데 이 '나머지 사람들'이 임금의 종들에게 취한 태도가 '붙잡다'(사로잡다),

'때리다'(능욕하다), '죽이다'라는 점점 폭력의 정도가 심해지는 세개의 동사를

사용해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구원에로의

초대를 거부하며 하느님의 예언자들과 복음 전파자들을 능욕하고 살해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임금은 22장 7절에서 당장 군대를 보내어 자기 종들을

무참히 살해한 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린다.

 

그래서 이제 22장 10절에서 '거리에 나가~만나는 데로' 데려오게 된다.

여기서 '거리'로 번역된 '디엑소두스'(dieksodus; main roads; street)의

원형 '디엑소도스'(dieksodos)'빠져 나가는 길', '출구'라는 뜻을 가진다.

 

원문의 '디엑소두스 톤 호돈'(dieksodus ton hodon; street corners)

'통하여 나가는 길'로서 지방 도로들이 끝나는 성(城)앞의 장소를 가리킨다.

 

이곳은 각 지방들을 잇는 지방 도로와 성(城)으로 들어가는 길이

만나는 장소로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따라서 임금이 종들을 보낸 곳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일뿐만 아니라

성(城) 밖이므로 이방인들도 있었다.

 

이것은 이제부터 초대받은 자의 자격은 철폐되고, 사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중에 임금의 명령에 응답하는 자는 누구나 초청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의 의미를 찾게 한다.

 

이제 22장 11절에서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등장한다.

고대 근동의 잔치에서 잔치를 연 주인은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잔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나타난다.

 

여기서 임금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부터 잔치가 본격화 될 것임을 보여 주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천국 잔치의 본격적 시작 시점인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예복'으로 번역된 '엔뒤마 가무'(endyma gamu;

a wedding garment)'혼례식 때 입는 옷'을 말한다.

 

원래 '엔뒤마'(endyma; a garment) '겉옷'이나 '외투'

가리키는 단어로서 옷 위에 덧입는 옷이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에는 혼주가 나누어 주는 예복을 입어야만 했다.

 

분명히 임금이 잔치에 합당한 옷을 나누어 주었는데도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나 무례하며 불성실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잔치 석상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심판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심판의 때에 필요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하면,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갈라3,27), 본래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대신에 성령 충만과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의롭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갈라5,22~24; 묵시19,8).

 

이제 22장 13절에서 임금은 그를 벌하기 위해 하인들을 부른다.

여기서 '하인들'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이스'(diakonois; attendants)

'디아코노스'(diakonos)의 복수 목적격으로서 '봉사자', '시중드는 사람'을 가리킨다.

 

22장 3절에 나온 '종들'에 해당하는 '둘루스'(dulus; servants)와는

확실히 다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기 위해 보내어졌던 임금의 종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상징하지만, 여기의 '하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상징한다.

 

'손과 발을 묶어서'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심판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보여주며,

동시에 결코 자신의 노력으로 이 심판을 돌이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깥 어둠'지옥을 상징하는데, 하느님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천국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곳이며, 희망이 도무지 없는 곳이다.

 

또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즐겨 사용하는 것인데,

종말의 심판에 대한 애통이나 애곡을 표시할 때나, 영원한 형벌에 처한

인간의 극심한 괴로움과 완전한 절망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임할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극도의

괴로움,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22장 14절'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는 단언적 진술의 말씀으로 비유가 마무리된다.

이것은 재판장의 최종 선고와도 같은 확정적 말씀이다.

 

여기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클레토이'; kletoi; called; invited)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자로서 '간선된 자' 가리킨다.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들이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세지를 준다.



<혼인 잔치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마태 22,2-4)”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임금이 사람들에게 잔치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비유 전체의 뜻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자기들도 잔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임금에게 간청했으면서도,


그래서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잔치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요청하는 나라가 아니라,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쪽에서 아쉬워서 들어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간절하게 바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당신의 나라에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신 일이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흔히 ‘초대’로, 또는 ‘부르심’으로 표현하는데,


들어오라고 부탁하는 일도 아니고, 강요하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의 간절한 희망을 들어주신 일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5-6).”


잔치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면서도,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에는 태도가 돌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쉬울 때에는 구해 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했다가,


힘든 시기가 지나가면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던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경우가 자주 보입니다.


급하고 아쉬울 때에는 하느님을 찾고, 편안해지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마태 22,7).”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분풀이나 보복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최후의 심판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앙갚음이나 분풀이나 보복이 아닙니다.


인간들 쪽에서 자초한 일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는데도 인간들이 그 길을 외면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8-10).”


 


처음에 초대받았지만 참석하기를 거절했던 사람들을 유대교로,


나중에 길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순서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대역도 아니고 대타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넘어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따라서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순서대로 초대장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길거리에 서 있었던 사람들도, 잔치에 참석하기를 희망하고 간청하면서


초대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가 갑자기 붙잡혀 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라는 말은, “잔치 참석을 희망하고,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라는 말은,


“잔치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면서도 혼인 예복도 안 입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과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를 바라면서 혼인 예복을 입는 등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 모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는 이야기는(마태 22,11-13),


잔치에 참석하는 일과 잔치 음식을 먹는 일이 구분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받았는데도 예복을 안 입었다고 쫓아내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혼자서만 안 입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바라고 있다면 희망만 하지 말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라면서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4년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잔치에 초대 받은이의 예복

연중 제28주일. (마태 22, 1-14.)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에 일어난 일들 중 지극히 작은 부분을 알고 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일들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지극히 작은 일부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우리가 겪은 대부분의 일은 그냥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산 이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며 나눕니다. 그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만큼, 그 이야기에는 인간 삶의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분은 참다운 스승이었다고 공감한다면, 그분은 스승이라는 진리를 실천한 분입니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은 스승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역사 안에 새로운 다른 스승들을 나타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에 사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고 믿은 초기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 공동체들 중 몇 개는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하던 이야기들을 담아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복음서들입니다. 그 복음서들은 2000년 동안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존속시켰습니다. 그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는 이가 오늘의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그 이야기들을 읽으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며,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오늘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임금이 잔칫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의 뜻을 전하러 온 종들을 때려주기도 하고 더러는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노하여 그들을 벌하고 다른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옮기면서,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고, 임금이 보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불손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마태오 복음서입니다. 그것을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공동체는 그들의 조국이었던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가 집필되기 불과 10여 년 전에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거슬려 전쟁을 일으켰다가 참패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많은 고을이 불타고 참담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비극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고,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한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응징하신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전한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징표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다 비유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잔치는 베푸는 사람이 있어서 열립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즐기고 기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해 잔치에 초대받았다고 생각한 것은, 복음이 그들에게 베풀어졌고, 그것을 형제자매들과 나누면서 그들은 즐거웠고 또한 기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이렇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베푸신 잔치에 초대되었다면, 우리는 그 잔치에 합당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왔다가 쫓겨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실만이 중요하지 않고, 초대된 사람은 스스로 준비하는 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그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삶을 배웁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불행만 알아들으면, 우리 자신을 위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새로운 실천을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이야기는 예수님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은 그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유대교 안에서 권위를 누렸고, 그들의 신분과 권위를 빙자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고 행세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쉽게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짓밟으면서 자기들이 받은 권위를 과시한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이 행세 하는 곳에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도, 굶주리는 이도, 우는 이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섬기는 사람”(루가 22, 27)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하신 일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살리는, 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은혜롭게 초대받은 생명들입니다. 생명이 주어졌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도 주어졌습니다. 잔치는 베풀어졌습니다. 그 은혜로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재물이나 권위에 집착하는 것은 초대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잔치에서는 혼자 욕심내고, 혼자 권위를 가졌다고 설치지 않습니다. 잔치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배식(配食)이 아닙니다. 좀 더 누리는 생명이 있고, 적게 누리는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베풀어진 은혜로움을 자유롭게 나누면서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은혜로움을 나누면서 이웃도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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