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 전교 주일]복음선포 (마태 28,16-20)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 것이라며,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을 전한다. (이사야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며,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한다. (로마 10,9-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며,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사2,1-5)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4)
이사야는 2장 2절에서 종말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성전으로 모여들 것을 예언하였고,
2장 3절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이제 2장 4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날에 주님의 판결로 인해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당신의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면
온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는 희망에 찬 예언이 제시된다.
여기서 평화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원죄와 완고한 불신앙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하느님의 옥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옥좌에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 원수되었던 하느님과 화해하여 그분에게서 내려오는
평화를 나누어 갖게 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로 볼 수 있다.
전쟁의 무기를 모두 농기구로 바꾸어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는다는 예언이
바로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완전한 평화를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이것은 장차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평화시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으로 이 땅에 시작된 메시야의 통치를 나타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성취될 메시야의 통치로 인한
완전한 평화의 시대를 내다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와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는
같은 뜻의 대구 구조를 이루는 문장이다.
앞의 것은 민족(나라)들 사이의 분쟁 해결의 측면을 강조하고,
뒤의 것은 잘못을 어긴 자들, 각 개인을 바로 잡는 교정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재판관이 되시고'에 해당하는 '웨샤파트'(weshapat)나
'심판관이 되시리라'에 해당하는 '웨호키아흐'(wehokiah)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행위를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이 구절에서 주님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는 전쟁이 전혀 없는
완벽한 평화를 구가하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칼과 창은 전쟁때에 필요한 무기이지만,
보습과 낫은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 필요한 농기구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참전한 자들이 평화로운 때에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하고, 또 농사일을 하다가도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전쟁터로 나가곤 하였다.
따라서 농기구를 잡은 손이 무기를 잡게 되고,
또 무기를 잡은 손이 농기구를 잡게 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미래의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미래의 평화 시대를 예언했을 것이다.
'보습'(plowshare)은 쟁기의 술바닥에 맞춰 끼우는 삽처럼 생긴 쇠조각을 말하며,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그리고 '낫'(pruninghook)는 곡식을 추수할 때 이삭을 자르는 도구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전쟁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칼과 창을
파종과 추수때 사용하는 농기구로 만들 것임을 지적하여,
더 이상 살상무기가 필요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평화 시대가
장차 도래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 문장 바로 앞에 나오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와 마찬가지로
본문은 절대적 부정의 의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부정어 '로'(lo)가 이끄는 문장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같은 뜻의 대구를 이루는 강한 부정문을 반복 사용하여
두 번 다시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민족들 사이의 전쟁이 그칠 것이며 완전한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 예언은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가까워질수록,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전쟁이 자주 발발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마태24,7)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모든 분쟁과 싸움, 다툼이 종식되는
완전한 평화, 곧 그리스도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연중 제29주일 복음 (마태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18ㄴ~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에 해당하는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pasa eksousia en ourano kai epi tes ges;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에서
'하늘과 땅의'로 번역된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en ourano kai tes ges)는
'하늘 안에 그리고 땅 위에'로 직역되는데,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을 말한다.
그리고 '권한'에 해당하는 '엑수시아'(eksousia)는 신약에서 '권세', '권능', '권리',
'힘', '자유함'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중보자(중재자)로서의 권한'이 강조된다.
또한 '나는 ~받았다'에 해당하는 '에도테 모이'(edothe moi; was given to me)에서
'에도테'(edothe)는 '주다'는 뜻을 지닌 '디도미'(didomi) 동사의 직설법 부정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로서 '그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인 것은 성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동사가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쓰인 것은 예수님께서 받은 권한이
단번에 받은 것임을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화(강생) 이전에도 성자로서 성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가지셨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자연계와 영계를
제어하는 권한을 나타내보이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 권한은 신성(神性)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지니셨던
권한에 비하면 제한적이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상 구속(대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잠시 성부 하느님께 맡겨 드렸던 본래의 권한을
다시 받아 회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속 사업과 부활 이후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오직 구속 사업을
완수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행사하기로 하셨다(요한5,20~22.30).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그 권한을 가지고,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서 제자들에게 선교 명령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영역인 하느님의 나라는
선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확장되고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희는 가서'로 번역된 '포류텐테스'(poreuthentes; go)는 복수 2인칭
명령 분사이며, '너희'는 직접적으로 승천 직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지칭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사도1,8참조).
그리고 제자로 삼아야 할 대상은 '모든 민족'이다.
여기서 '민족'으로 번역된 '에트네'(ethne)는 '에트노스'(ethnos;
nations)의 목적격 복수로서 제자를 삼는 대상이다.
또한 '제자로 삼아'에 해당하는 '마테튜사테'(matheteusate; make disciples;
teach)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복수 2인칭 명령형 동사이다.
이 동사는 '너희는 가서'에 해당하는 '포류텐테스'(poreuthentes),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가르쳐'에 해당하는 '디다스콘테스'
(didaskontes)의 세 개의 분사에 둘러싸여 있다.
원문의 뜻은 '제자로 삼는 일'이 '가는 것'과 '세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의 궁극적인 핵심을 보여 주는데, '제자로 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이며, 나머지는 이에 수반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baptizing)는
현재 분사인데,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세례가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데, 세례가 바로 제자로 삼는 수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밥티존테스'(baptizontes)의 기본형인 '밥티조'(baptizo)는
본래 '담그다'는 뜻을 지닌 '밥토'(bapto)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동사가 '세례를 받다'(사도1,5)는 세례 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일 때에는
'담그다'와 '씻다'(루카11,38참조)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가 있다.
먼저 이 동사를 '담그다'는 의미로 볼 때, '세례'는 몸을 물에 담그는 의식을 나타내며,
영적으로 믿는 이들이 세례 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 강조된다(루카12,50; 로마6,3).
또한 이 동사를 '씻다'는 뜻으로 보면, '세례'는 '죄의 씻음', '죄의 용서'라는 의미가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사도2,38; 22,16).
실제로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뜻과 더불어 죄사함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운데 한 분이심을
명확하게 하셨다.
- *♥* 선교의 왕도^^* *♥* -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이제 완전히 가을로 접어든 것 같죠?
그런데 일교차가 워낙 심해서
아직도 어떤 날은 낮에 덥다고 느껴질 정도이니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가 힘듭니다.
감기 걸리지 않게 더욱 건강에 신경을 써야하겠습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복음 선포가 신자들의 기본적인 의무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우리 각자가 복음 선포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전교를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오늘 미사 중에 함께 부를 화답송의 한 소절이 전교의 필요성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이렇게 온 세상이 기쁨에 겨워 하느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출 수 있도록 하려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사는 길을 배우러 주님께 나아오고, 그 결과로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기에 더 이상 민족 사이에 전쟁이 없고 모두가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그런 시절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참된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즉, 세상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실패를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사신 결과가 십자가상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형제 자매님, 예수님은 실패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하시던 일을 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누구나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은 명령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선교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일을 할 수가 있겠나?” 하고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한 두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1927년에 선포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와 1929년에 선포된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는 인도에서 3년, 말레이시아에서 약 6개월 그리고 일본에서 2년3개월 동안 선교를 하시고 중국 선교를 준비하다가 열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6년 정도의 짧은 선교활동에서 3만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충분히 선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될 만합니다.
그런데 소화 데레사 성녀는 15살에 갈멜 수녀원에 입회를 해서 24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봉쇄수녀원을 떠나보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런데도 선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되었으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해야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듣는 것만으로는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보아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말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나는 모든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합니다. 사랑을 위해서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항상 구체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사랑하기 위해서 겪는 고통과 자신의 병으로 인한 고통들을 죄인들의 회개와 선교지역의 사제들을 위해서 바친다고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과 기도가 그녀를 선교의 수호성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날 사람들은 더욱 사랑에 굶주려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랑에 더 쉽게 감동을 하게 되고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형제 자매님, 저는 이태리 포콜라레 사제학교에서 생활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포콜라레 이상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로삐아노라는 작은 마을에는 주말이 되면 이태리 각지에서 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보통 1박 2일을 머물고 떠나는데, 그들이 떠나면서 남겨놓은 소감문들을 보면,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 “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 “천국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이제 다시 교회를 찾아갈 것이다.” 등등의 이런 비슷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하고 사람들을 변화시킬까요? 오로지 사랑의 삶뿐입니다. 로삐아노 주민들은 사랑을 법으로 사는 사람들 곧 복음을 법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는 것만으로 훌륭하게 전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내가 복음을 구체적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남에게 전할 때 더 강해지니까요.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복음을 살 때 먼저 내가 복음화가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형제 자매님, “내가 전교를 잘 할 수가 있을까?” 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누구나 전교를 잘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교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도구로써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의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되고 사람들은 그 향기를 따라 교회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하루도 우리를 당신 선교 사업에 불러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가족들과 이웃들을 잘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첫걸음이고 가장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선교의 왕도입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효성 캠퍼스에서 박영봉안드레아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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