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모세의 자리 (마태 23,1-12)
말라키 예언자는 사제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며, 온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리라고 한다. (말라키 1,14ㄴ─2,2ㄴ.8-10)
14 정녕 나는 위대한 임금이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민족들은 나의 이름을 경외한다.
2,1 자 이제, 사제들아, 이것이 너희에게 내리는 계명이다. 2 너희가 말을 듣지 않고, 명심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겠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8 그러나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레위의 계약을 깨뜨렸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9 그러므로 나도 너희가 온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리라. 너희는 나의 길을 지키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10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 아니시냐?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 배신하며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더럽히는가?
바오로 사도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했다고 한다. (1테살 2,7ㄴ-9.13)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연중 제 31주일 제1독서(말라1,14ㄴ-2,2ㄴ.8-10)
'말라키'라는 이름은 '나의 사자(使者)'라는 뜻으로 3장 1절에서 끌어들인 일종의 가명이다.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이 예언자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
말라키서의 역사적 배경을 기원전 480-46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체로 하까이/즈카르야 시대와 에즈라/느헤미야 시대 사이다.
기원전 539년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독려에 힘입어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기원전520-515년) 성전 전례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나 두 예언자가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와 연결하였던 이스라엘의 완전 회복에 대한
높은 기대와 희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백성을 올바로 인도하고 가르쳐야 할 사제들이 스스로
제사와 전례 규정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고,
백성들은 십일조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이방 민족과 통혼하면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기 주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말라기의 두 번째 신탁(1,6-2,9)은 사제들의 타락을 고발한다.
말라키는 아모스를 비롯하여 사제들에게 비판적이었던 예언자들의 전통위에 서 있다.
말라키가 비판하는 사제들의 가장 큰 잘못은, 하느님께 값싼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더러운 빵과 훔친 짐승, 절름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성의 없이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업신여겼다.
아무도 이런 짐승을 총독에게 바치는 일은 없다(1,8).
만군의 주님께 어울리는 제물은 향기로운 제물, 깨끗한 곡식 예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내 이름은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다.
내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에서 드높기에, 곳곳에서 내 이름에 향과 정결한 제물이 바쳐진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1,11)
어떤 교부들은 이 11절의 말씀이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와 맺게 될,
새 계약의 경신례를 예고하는 것으로 본다.
말라키는 사제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대의 상황을 주도하던 차독 가문 사제들의 타락과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차독 가문의 사제들은 즈루바뻴의 치세 아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을 때,
성전의 모든 권한과 임무를 장악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말라키 예언자는 이들에 맞서 레위 가문 사제들의 사제직을 옹호한다.
다윗 임금 시절에 레위의 후손인 무시 가문의 에브아타르는
차독과 더불어 만남의 천막에서 함께 봉직하였다.
그러나 솔로몬 임금의 형이자 경쟁자인 아도니아를 지지했다는 죄목으로,
에브아타르는 고향 아나톳으로 쫓겨나고,
차독 가문 사제들이 예루살렘 성전 전례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부터 레위의 후손인 무시 가문의 사제들은 예루살렘 성전 대신,
지방에서 떠돌며 백성을 가르치는 소임만을 맡았다.
민수기 16-17장을 보면, 레위 족속들이 턱 밑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다가
벌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은혜를 받고 있고, 주님의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데서 질투와 반역을 한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교회안에도 생각해야 될 여러 문제들이 많다.
다만, 나는 사제로서 하느님 대전에 어떤 제물을 바치며,
영신적으로 참으로 잘 준비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최상의 제사를 봉헌하고 있는가? 를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연중 제31주일 복음 (마태 23,1-12)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5)
마태오 복음 23장 5~7절까지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외적인 경건 과시(5절),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과 끝없는 명예욕(6절),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얻고자 하는 마음(7절)에 대한 대표적 예이다.
'성구갑'으로 번역된 '퓔라크테리아'(phylakteria; phylacteries)의 원형
'퓔라크테리온'(phylakterion)은 모세 율법 중에서 탈출기 13장 1~10절,
11~16절,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등의 네 부분을 작고 긴
양피지 조각에 기록하여 그것을 작은 상자 속에 봉해 넣은 것을 가리킨다.
유다인들은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는
말씀(탈출13,16; 신명6,8)에 근거하여 위의 네 부분의 율법의 구절을 기록한
경문을 넣은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에 가죽끈으로 고정하여 틈나는 대로 보면서
경건에 힘썼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23장 5절에서 '넓게 만들고'에 해당하는'플라튀누신'(platynusin;
they make wide; they make broad)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그 성구갑의 크기를 크게 한다는 뜻이다.
시행 초기인 바빌론 유배 포로기 직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성구갑을 달고 다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다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달고 다녔다.
과시욕이 지나치다 못해 어떻게 하면 더 크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한편, '옷자락 술'로 번역된 '크라스페다'(kraspeda; the tassels of their
garments)의 원형 '크라스페돈'(kraspedon)은 '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털실을 꼬아 매달리게 장식한 작은 부속물'을 의미한다.
유다인들은 민수기 15장 37~40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흰색과 청색 실로 짠,
이와 같은 부속물을 겉옷의 가장자리에 매달았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게 하는 기능을 하며,
마음과 눈이 쏠리는 데로 욕심을 따라 방종하게 살아 배신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해 주었다(민수15,39).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러한 율법의 정신을 따르려는 마음보다는,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거룩하게 보이려는 열망으로 '옷자락 술'을 더 크게 만들어
그것을 즐겨 입고 다녔던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이
말씀은, “말한 대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본받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모세의
자리’는 사람들에게 성경과 율법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앉는 자리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이
실행하고 지켜야 할 ‘말씀’을 전하긴 하는데,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말과 행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공공연하게 도둑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도둑질을
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가르친다면,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들으려고 할까?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을 듣지 마라.”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은 맞지만,
자신들의
잘못된 행실로 말씀을 모독하고 있기 때문에
아예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4).”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계명들과
율법들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그리고
그렇게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면서도,
자기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간다는 뜻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이 그런 사람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이유를 물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성전 예배 때문에’, 또는 ‘정결 예식 규정 때문에’ 라고
대답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대답은 핑계일 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루카
10,27), 실제로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하느님을,
또는 성전 예배를, 또는 정결 예식을 내세우면서,
자기들의
말과 행실이 다른 것을 합리화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가 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 23,5).”
이
말씀은, 경건한 척, 또 신심 깊은 척 하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지도 않고 성경 말씀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남들보다 더 큰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위선자들이 있습니다.
평소에
기도하지도 않으면서
남들보다
더 크고 멋있는 묵주를 가지고 다니는 위선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선자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마태 6,5).”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입니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6-7).”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교만과 허영심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좋아하고, 대우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자기가 바라는 대로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고 대우해 주지 않으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고서 기분나빠하고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다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한 사람의 본 모습입니다.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의 칭찬, 존경, 대우를 의식하지도 않고,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10).”
이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말’을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인 것처럼 전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갈라 1,7).”
신학이나 성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의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자기의 말을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처럼 전하는
잘못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겸손’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마태 18,3).
그러나 ‘교만’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아무리 높이 쌓아도 결국에는 허물어져서 먼지가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