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열 처녀에 비유 (마태 25,1-13)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는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지혜 6,12-16)
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14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15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16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이라고 한다. (1테살 4,13-18)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6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7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며,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 (마태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연중 제 32주일 제1독서(지혜6,12-16)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2011년 7월 17일 연중 제 16주일 독서의 말씀에서 지혜서에 대한 간단한 입문을 서술했다.
우리는 <말>을 할때 먼저 <생각>을 한다. <생각>한 것이 말(언어)로 표출된다. 그러니까 <생각>은 <내적 언어>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혜>라 부르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된 것을 <말씀>이라고 부른다.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우리가 성급하게 <인격적 지혜>를 <성령 하느님>이나, <육화된 말씀>이신 <성자 하느님>으로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렴풋이 성삼의 신비가 드러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6,14)
이 말씀은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 할 때에도 인용했던 말씀이다. 새벽에 일찍일어나 말씀을 읽고 감사기도를 하면서(지혜16,27-28참조), 영과 진리안에서 영이신 하느님을 예배하면(요한 4,24참조)),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선물을 문간에 갖다 놓아 주신다는 것이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6,15ㄴ)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6,16)
오늘 독서의 <지혜>는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기도의 응답>이요, 우리가 그토록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알고 싶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삶에 동행하시는 <현존체험>이다.
그러나 이 <지혜>의 축복을 받으려면, 오늘 말씀에 따라 조건이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감사 기도를 해야 하고, 영적으로 순결하고 흠도 티도 없는 삶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을 기뻐시게 하고 감동시키는 맞갖은 생각과 삶을 살아야 한다.

연중 제32주간 복음 (마태25,1-1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3~4.9)
마태오 복음 25장은 24장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사흘 전에 주신 올리브산에서의 말씀이 계속되는 부분으로서, 특히 도둑의 비유, 두 종의 비유인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마태24,42~51)와 더불어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는 세 가지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세 가지 비유란 '열 처녀의 비유', '탈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를 나누는 임금의 비유'를 말한다.
여기서 '천국은 마치 ~~에 비길 수 있다'는 것은 천국이 열 처녀에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열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상황에 비유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다의 혼인 풍습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러 간단한 종교적 의식을 치른 후,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 혼인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신랑의 집이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혼인 예식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본 장에 있어서의 혼인 잔치는 어느 곳에서 벌어졌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혼인 잔치는 신부의 집에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청했을 때 그 요청을 거부한 사람이 신랑이었던 사실(11~12절)에 비추어 보면,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베풀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만일 혼인 잔치가 신부 집에서 신부 집에서 베풀어졌다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요청을 거부하는 주체가 신랑이 아닌 신부의 아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가 어디서 열렸는지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유다 관습에 의하면, 혼례식은 보통 해가 진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의 집 문 밖에 나가서 등을 들고 있다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당도하면 영접하였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에 가는 시간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등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했다.
특히 본문에서 신랑이 예측치 못한 시간에 온 것이 강조되는 것은 종말, 또는 모든 성도들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예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가 들고 나간 '등'으로 번역된 '람파다스' (lampadas)는 수지질의 소나무로 만든 횃불이나 등불, 또는 심지를 꽂아서 쓰는 속이 등근 접시나 기름병을 의미하는 명사 '람파스'(lampas)의 목적격 복수로서 '여러 개의 등'이다.
원문에는 이 단어 뒤에 새 성경이 번역하지 않은 단어 '헤아우톤'(heauton)이 있다. 이 '헤아우톤'(heauton)은 여성 3인칭 복수 소유격 재귀 대명사로서 '그녀들 자신들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열 처녀는 모두가 각자 자기 자신의 등을 들고 나갔다.
여기서 '나간 장소'가 신부의 집인지, 처녀 자신들의 집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것은 이 비유의 전개에서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본 비유에서 '신랑'으로 번역된 '뉨피우'(nymphiu)의 원형 '뉨피오스'(nymphios)라는 단어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11절). 따라서 비유에서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신부가 아닌, 들러리 처녀 열 명이다.
당시 신부의 들러리는 신부의 친구들이 맡았으며, 들러리들이 드는 등불은 모두 열 개라고 한다. 유다인들은 열을 이상적인 숫자, 완전 숫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당에서의 공식 집회도 열 명이 참석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비유에서도 그러한 풍습에 따라 들러리 처녀들이 열 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재림은 열 처녀로 상징되는 '모든 성도'가 대비하고 준비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재림 앞에서 단 한명도 열 처녀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슬기로운 처녀가 아니면 어리석은 처녀에 해당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어리석은'으로 번역된 '모라이'(morai; foolish)의 원형 '모로스'(moros)는 신중하지 못하고 예측 능력이나 지혜가 결여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슬기로운'으로 번역된 '프로니모이'(phronimoi; wise)는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분별력이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그리고 여기서 쓰인 동사 '에산'(esan; were)은 반복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이것은 신부의 들러리 처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 항상 그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국 다섯 처녀들은 항상 신중하지 못하고 선견지명이 없는 자들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평소처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향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이며, 반대로 다른 다섯 처녀들도 평소의 삶의 자세가 사려깊고 분별력이 있으며 신중했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주님의 재림의 때에 어떠한 자들로 드러날 것인가가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이제 마태오 복음 25장 3절에는 열 처녀들이 왜 어리석고 슬기로운지를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밝힌다.
즉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등은 물론 기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던 반면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준비했을 뿐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메트 헤아우톤'(meth heauton; with them)은 '그녀들 자신들과 함께' 또는 '그녀들 자신들 곁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들러리 처녀들이 등을 밝힐 여분의 기름을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충고해 주는 표현이다. 그리고 '엘라이온'(elaion; oil)은 '올리브 나무'(olive tree)를 의미하는 '엘라이아'(elai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팔레스티나에서 나는 대표적인 산물로서 등불을 밝히고(2열왕4,10) 병을 치료하는데(루카10,34), 그리고 귀한 손님의 머리에 부어 예의를 표시하는데(루카7,46) 사용되었다.
이 기름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믿음'을 상징한다고 보고, 어떤 학자는 믿음에 대응하는 '선행'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는 기름이 성별 의식에 사용된 물질이라는 것과(즈카4,12) 성령이 기름으로 상징된다(루카4,18)는 사실에 근거해서 기름은 내면적 신앙의 모습인 '성령의 능력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마태오 복음 25장 4절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왜 슬기로운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그릇'으로 번역된 '앙게이오이스'(anggeiois; jars)의 원형 '앙게이온'(anggeion)는 플라스크와 같은 휴대용 병을 말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올 것을 대비하여 등 말고도 여분으로 플라스크 같은 병을 하나 더 준비하여 거기에 기름을 담아가는 준비성을 갖추었다.
그래서 설사 기름이 다하여 등불이 타다 꺼지더라도 여분의 기름으로 계속해서 등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5절에 '신랑이 늦어지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의 재림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늦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체되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베드로 2서 3장 9절이 이것에 대해 분명히 밝혀준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도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 있음을 베드로 2서 3장 3절과 4절이 밝혀주고 있다.
"마지막 때에,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와서 여러분을 조롱하며,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7절에서 '우리 등이 꺼져 가니'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오시는 역사의 깊은 밤중에 성령의 불길이 소멸해가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9절의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라는 표현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면 둘 다 등불을 켤 수 없을 것이기에 결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 오시는 순간에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 수는 없다는 말로서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에 있어서 그 누구도 각자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모자란 기름을 사러가는 역할도 그 누구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여기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는 회개해야 할 죄가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들, 또는
나중에 회개해도 된다고 방심하는 사람들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언제 심판 날이 닥치더라도 상관없도록 평소에
늘 회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뒤의 8절을 보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등속에
있는 기름을 다 사용했을 때를 대비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름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등불을 켜놓고 있었고, 등불이
켜져 있는 동안에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판 날이 닥치기 전에는 자만심과 방심이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준비를 잘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심판 날이 되어야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슬기로운 처녀들에 속한 사람일까? 어리석은 처녀들에 속한 사람일까?
만일에
“나는 틀림없이 어리석은 처녀들에 속하지 않고, 슬기로운
처녀들에 속한다.”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처녀들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회개와 신앙생활에 대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 라고 ‘나 자신’이 스스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늘 겸손하게 회개해야 하고, 더욱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마태 25,5-8).”
비유
안에서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신랑이
도착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처녀들이 신랑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항의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비유의 내용과 반대가 됩니다. 자만심에
빠져 있거나 방심하는 사람들은 심판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즉
당장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태평스럽게 지내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예고도 없이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셨느냐고, 또는
왜 이렇게 빨리 오셨느냐고 항의할 것입니다.
뒤의 13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마음대로 그 날을 예상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지금 당장 회개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의
처지가 원래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그만 이 세상을 떠나라고 부르시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산상
설교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인간의 수명을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수명을 예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종말의 날과 시간을 정하는 일도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자기의 수명이 끝나는 날에 대해서나 종말의 날에 대해서나 “적어도 오늘은 아니겠지.” 라고 우리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심판 날이 닥치자 허둥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모든 사람이 다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남을 도와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때서야
고해성사를 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고해성사를
줄 사제가 없을 것입니다.사제들도
심판을 받으러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25,9-10).”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회개는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고, 문이 닫혔다는 것은,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상인들에게 가서 기름을 사라는 권고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1-13).”
어리석은
처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랑도 슬기로운 처녀들도 모두 인정도
없고 자비심도 없는, 너무 냉정한 사람들로만 보이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그만큼 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일 뿐입니다.
그런데 심판이 그렇게 엄하다고 해도, 평소에 늘 회개하면서 잘 준비한, 충실한 신앙인에게는 그날은 무서운 심판 날이 아니라 행복한 잔칫날이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항상 깨어 주님 나라 준비하라 연중 제32주일 (마태 25,1-13)
성경은 종종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신랑과 신부가 맺는 혼인계약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도래하여 새로운 계약을 맺는 것을 혼인잔치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비유 말씀을 살펴보면 다소 이상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부는 등장하지 않고, 신부 쪽 들러리인 열 처녀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이들은 열 처녀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돌보는 주님의 일꾼들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해석은 오늘 복음에서 봉독한 마태오 복음서 앞 뒤 문맥과 잘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마태 2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충실한 종으로서 동료들을 잘 보살피라고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열 처녀란 신랑이 오실 때를 기다리며 신부인 교회를 위해 잘 봉사해야 할 봉사자들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비유가 깨어서 잘 기다려야 한다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공동체의 봉사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이들이라고 한다면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은 혼인 잔치에 초대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비유 말씀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 처녀의 역할은 신랑이 올 때 그분을 잘 맞아들이도록 등을 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름을 잘 챙겨서 신랑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잠이 듭니다. 신랑은 한밤중에 오면서 늦어지기까지 하는데, 이는 오늘 복음 이전 대목에서도 계속 언급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마태 24,43은 도둑이 밤에 오는데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마태 24,48도 “주인이 늦어지는구나”라고 말하며 동료들을 때리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불충실한 종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비유 말씀은 종말 때 다시 오실 주님께서 늦어지고 계시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가는 혼인 잔치,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경고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불충실하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아니 준비하였지만 충실히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가는 이들을 뜻합니다. 마지막 날 그들이 아무리 주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청하더라도 주인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선을 그을 것입니다.
불충실하고 어리석은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주인이 늦어지자 졸다가 잠이 듭니다. 그러던 중 그들이 생각지도 못하던 시간, 곧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등과 함께 기름도 잘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등과 슬기로운 처녀들이 준비한 기름이란 무엇일까요? 등이란 예수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름이란 불림을 받은 이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준비해야 할 기름입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불림을 받았다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마태 7,21-23)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묵상하면서 각자 자신들에게 주어진 등과 그 등을 채울 기름을 잘 준비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날과 시간에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보시고도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 염철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