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마태오 17,1-9)
![]() |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다니엘 예언자는,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은 분이 앉으신 옥좌 앞으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인도되는 환시를 본다. (다니엘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신화가 아니라 목격한 자로서 알려 주었다고 한다. (2베드로 1,16-19)
랑하는 여러분,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셨는데,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신다. ( 마태오 17,1-9)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다니엘서 7장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다니엘서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다니엘서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 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는 '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놓이고'로 번역된 '레미우'(remiu)의 원형 '레미'(remi)는 '던지다', '배치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수(number)가 호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날들의 고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라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되었고, 어떤 것의 경우는 '가장 존경할 만한 한 분이 좌정하셨다'(one most venerable took his seat)로 의역하였다.
그렇다면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란 표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늘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제는 특별히 세상 왕국들 및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심판의 옥좌에 좌정하신 것이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마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그분의 옷'에 해당하는 '레부셰흐'(lebusheh)의 원형 '레부쉬'(lebush)는 어원적으로 예복이나 긴 겉옷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은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이라기 보다는,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다니엘서 10장과 요한 묵시록 1장의 주체는 성자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이시며 동일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스런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0)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의 옥좌에서는 이글거리는 불이 마치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본문에서 '뿜어 나왔다', '퍼져 나왔다'에 해당하는 '나게드 웨나페크'(naged enaphek)는 두 단어 모두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이 하느님의 옥좌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지속성을 임시한다.
또한 '그분 앞에서'라는 표현은 불꽃이 하느님의 몸 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그 옥좌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흘러나오는 불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니엘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심판으로서의 불은 세상 나라들 특히 작은 뿔이 상징하는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불이다.
이 불은 적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의 옥좌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다.
한편 '백만'과 '억만'에 해당하는 '엘레프 알르파임'(elep allpaim)과 '립보 랍베완'(ribbo rabbewan)은 고대 세계에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숫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를 나타내는 데 이처럼 헤아릴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들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소임을 맡은 존재들이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심판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에서 '그분을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예샴메슌네흐'(yeshameshunneh)는 문자적으로 '그들이(백만) 그분을 시중들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문맥상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본문에서 '모시고 선'에 해당하는 '예쿠문'(yequmun)은 문자적으로 '그들이(억만) 모시고 서 있다'라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느님과 나란히 옥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옥좌 곁에 서 있으면서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숫자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위엄을 드높여 줌과 아울러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대무변함을 암시한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책들이 펼쳐진다. '책들'에 해당하는 '씨프린'(siprin)은 어원상 '기록하다', '계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싸파르'(sapar)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펼쳐져 놓인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말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다.
모세는 이 생명책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탈출32,32), 사도 요한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하였다(묵시21,27). 또한 사도 요한은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책으로서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언급한다(묵시20,12).
본 문맥에서는 이 두가지의 책 가운데서 행위를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행위를 기록한 책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절대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마태17,1~9)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해졌다." (2)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his face shone like the sun and his clothes became white as light."
여기서 '모습이 변하셨는데'로 번역된 '메타모르포오'(metamorphoo)는 '~속에','~와 더불어'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메타'(meta)와 '형성하다', '모습을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모르포오'(morphoo)가 결합된 합성어로 '모습이 바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모르포오'의 명사형이며 '모습'(마르16,12; form)으로 번역되는 '모르페'(morphe)는 단순히 외형적인 '모습'(필리2,7)을 가리키는 '스케마'(schema)와는 구별되는 단어로서 내면으로부터 진행되는 영적인 변화(2코린3,18; 로마12,2)뿐 아니라 외적으로 나타나도록 내적 성질이 변화되는 것까지 나타내는 단어이다(탈출34,29).
이런 것을 종합할 때, 비록 외형적으로는 불완전한 육신을 입으셨으나 내면적으로는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이때 그 죄없는 내면의 거룩한 본질적 영광이 외부로까지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전혀 죄의 오염됨이 없는 거룩한 신적(神的) 본질을 지니신 분이시며, 모든 이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 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그들 앞에서'변하셨다는 것은 이 사건이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였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가 메시아이심을 확신하도록, 또한 확신가운데 제자의 길을 걷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후에 자신이 이때 보았던 예수님의 영광이 강생(육화; incarnatio)이전에 그가 가지셨던 신적 영광임을 알게 되었다(요한 1,14; 17,5; 필리2,6~7).
그 다음 예수님께로부터 나온 영광의 광채를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묘사하였다. 즉 '태양'(hellios; 헬리오스)과도 같은 강렬한 빛이 얼굴에서 빛나며, 몸 전체에서 나옴으로 그 옷을 투과하여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거룩한 신성(神性)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만일 '해'(헬리오스)와 '빛'(포스; phos)보다 더 밝은 대상이 있었다면, 복음서 저자들은 그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루카는 그 의복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으로(루카 9,29), 마르코는 그 옷이 광채가 나와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더 이상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그토록 새하얗게 빛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마르9,3).
예수님의 광채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광채와 비교할 때 그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탈출34,29~35).
모세는 얼굴에서 광채가 났었으나 이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까이 뵘으로써 얼굴에 투영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을 때 그 빛은 가리워졌다.
그러나 에수님의 광채는 예수님의 몸 자체에서 빛났던 영광의 광채로서 두터운 겉옷을 투과할 뿐 아니라 투과한 그 빛이 겉옷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새하얗게 보이게 할 정도로 강렬하였다.
그런데, 루카 복음의 병행 구절은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된 시기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였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루카9,29).
루카가 특별히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것은 마태오나 마르코가 타볼산에서 신적(神的)인 모습을 나타내신 구체적인 이유에 촛점을 맞춘 것에 비해, 루카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신(神)이시자 사람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되심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루카는 다른 공관 복음에 비해 기도의 신학을 전개한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신 것도 기도하시는 데 목적이 있고 (went up the mountain to pray), 거룩한 변모도 기도하시는 중에
(while he was praying his face changed in appearance and his clothing became dazzling white)이루어짐을 계시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적 본성에 참여하길 원한다면, 기도하라는 강력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일치하고 친교를 나누며 초자연적 사랑과 은총과 빛을 받아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길이 기도 뿐이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없는 상태에서 기도할 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시요 전구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가 성부 하느님께 전달되고, 동시에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내려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신 하느님을 공경하고 섬기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성부 하느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방법이 무엇인가? 기도 밖에 더 있는가! 요한 복음 4장 24절에는 영이신 하느님을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계시되어 있다.
그래서 오상의 성(聖) 비오 사제는 억지로라도, 마지못해서라도, 의지적으로 기도하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땅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한 방법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력 구원이 불가능한 인간이 대죄가 없는 은총 지위에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초자연적 사랑(은총)을 받지 못하면, 인간 본성(本性)을 초월하는 초성(超性)생활이 불가능하고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현대의 많은 크리스챤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으며, 겨우 주일 미사만 간신히 형식적으로 지킨다.
이 시대는 너무나 초자연(超自然)과 영적(靈的)인 세계와 차원을 고의적으로 부인하고, 심판과 영원한 생명(복락)과 지옥벌을 믿지 않으며, 언젠가 없어질 현세와 육(肉)의 사정에만 매몰되어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에 하느님께서는 기도를 질적(質的)으로 뿐만 아니라 양적(量的)으로도 많이 바치시길 원하신다.
구원받고 싶다면, 첫째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둘째로 반드시 기도해야만 한다.
|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1-4)”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본래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낙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은,
“지금의 황홀함과 행복이 이대로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을 직접 뵙는 행복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을 직접 뵙는 행복’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에는 그 행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2,3-5).”
여기서 ‘빛’은 무한하고 영원한 행복을 상징합니다.
(‘밤’과 ‘어둠’은 슬픔, 두려움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등불’과 ‘햇빛’은 인간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행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의 수난 때에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버렸고(마태 26,56),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마태 26,69-74).
자기들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영광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 것일까?
아니면, 수난이 닥치자 자기들의 체험을 모두 잊어버렸나?
그래서 어떤 놀라운 일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믿음과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체험한 일을 잘 묵상해야 하고,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자기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적으로 피하는 체험을 한 뒤에,
그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도 있고,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겠지만,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할 것이고,
그런 태도는 그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 경우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한 일이
예수님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 등을 연속으로 체험하고,
그 일들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믿음으로, 또 확신과 용기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위대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 후에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의 의미를
제자들이 올바로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 일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 전에는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 외에도
제자들이 체험한 놀라운 일은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된 일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원을 하느님께서 직접 보증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과 이 말씀을 연결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을 “누구든지 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초막이라도 지어서 그곳에서 그대로 영원히 지내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과정을 생략하고 열매만 얻으려고 하는 일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져 있는 여행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고,
그곳을 향해서 잘 걸어가야 합니다.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고, 목적지가 확실한 것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고,
더 좋은 곳이 있다고 유혹하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음과 희망으로 그런 어려움들을 모두 극복하고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길은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걸으시고,
다른 신앙인들이 사랑으로 함께 걷는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이 말은, 고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중에 얻게 될 영광과 행복은 고난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크다는 뜻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이스라엘 성지- 다볼산(mt. tabor)
다볼산(mt. tabor)에 오르기 위하여 필자 일행은 다볼산을 우측으로 끼고 접근로를 돌면서 다볼산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일찌기 시편 기자는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 하나이다"(시편 89:12)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대표할 정도로 다볼산은 아름다운 산임을 말하고 있다. 또 선지자 예레미아도 다볼산을 가르켜 '산들중의 산'이라고 묘사한바 있다.(예레미아 43:18).
다볼산은 갈릴리 지방의 한 평지위에 마치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볼 수 있는 왕능이나 고분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산의 높이는 570미터나 된다.
갈릴리 바다로부터 서쪽으로 약 16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다볼산의 위치는 바로 애급과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와 여러 지방도로가 마주치는 요점에 있다. 그리고 이들 중요도로의 교차점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다볼산은 돔(dome)처럼 솟아 있기때문에 옛날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고 한다.
일찌기 다볼산은 여자 선지자 드보라의 파견을 받은 발락에 의하여 가나안의 시스라 군대와 병거들이 완패를 당하였던 장소였다. 그렇기때문에 다볼산은 유대인들에겐 승리를 주는 동시에 꿈과 신명을 높여 주는 산으로 통해 왔다(사사기 4:6-14)
한편 기드온은 자기 형제들에게 화를 입혔던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바로 다볼산에서 처형하기도 했다.(사사기 8:18-21)
또 다볼산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등, 제자들과 함께 오르신 후 변화하였던 변화산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곳이기도 하다.(마태복음 17:1-2) 그렇기때문에 신약성경에서 특별히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다볼산은 늘 영적인 대각성을 주는 성산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예수님께서 변화하셨던 산으로 헤르몬산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헤르몬산 보다는 다볼산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다볼산 정상에는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무려 4년에 걸친 긴 공사끝에 완공된 천주교회가 세우져 있다. 이 천주교회는 이태리의 유명한 설계가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건축된 교회당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세주인 그리스도 예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초인적인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분입니까? 모든 불의와 부정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순식간에 새 세상을 여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까? 불치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고, 삶의 온갖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하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무력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라는 치욕적인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무 힘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