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요한 3,16-21)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주변 마을의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다. 이를 시기한 대사제와 사두가이들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사도들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벗어나 생명의 말씀을 계속 전하게 된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드님을 보내시어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빛이신 외아드님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심판을 받았다(복음).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6-21)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말 중에 ‘파카드’(paqad)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이 낱말의 기본적인 뜻은 ‘방문하다’입니다. 그런데 가끔 ‘벌하다’ 또는 ‘심판하다’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를 보면 모두 죄를 지은 악인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탈출 32,34; 즈카 10,3; 욥 35,15 등 참조). 이와 반대로 ‘구원하다’ 또는 ‘돌보다’는 뜻으로 번역될 때도 있는데, 의인들에게 적용될 경우입니다(창세 21,1; 1사무 2,21 등 참조).
태양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박쥐에게는 걸림돌이지만, 햇빛을 따라 자라나는 해바라기에게는 디딤돌입니다. 거짓 속에 살아가며 부와 명성을 누리던 사람들에게 진리는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온갖 누명과 억울함을 겪으면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디딤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대사제들과 사두가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림돌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디딤돌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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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복음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심판 쪽을 더 많이 생각합니다. 미구에 오실 주님도 심판하실 분으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도 ‘단죄’가 많습니다. 별것 아닌데도 가혹한 판단을 내리며 살고 있습니다.
실수를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판하기는 더욱 쉽습니다. 이유를 갖다 대기만 하면 됩니다.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실패했으니까 어떤 근거를 갖다 붙여도 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굉장히 ‘좋은 결과’인데도 부정적인 비판을 가하면 긍정적인 반응은 약해집니다. 그럴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쉽게 비판합니다. 혹독한 결정을 내립니다. ‘대항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도 ‘돌팔매’를 던집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렇지만 실패한 사람을 ‘감싸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사업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혼인 생활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당연히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좋은 점을 더 많이 보십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비판하는 일을 조금은 삼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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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불안을 느낍니다. 막연한 미래와 불투명한 앞날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빛의 생활이 없는 삶은 금방 어두워집니다. 기쁘고 환한 삶이 어느 날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빛의 생활을 멀리했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밝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빛의 생활입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 그리고 자선입니다. 특별히 자선은 남모르게 하는 착한 행동입니다. 쉽게 접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힘들게 생각합니다. 가진 것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베푸는 것에는 물질만 있지 않습니다. 따뜻한 말, 다정한 눈길, 부드러운 표정 등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선의 요소들은 참 많습니다. 그렇건만 우리는 인색합니다.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닌데도 어려워합니다. 몸에 배지 않았기 때문일 테지요. 실천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분명 큰 은총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없애시는 분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둠보다 내 삶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더 급합니다. 주님께 빛을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다른 이에게 빛으로 다가가면, 어느새 주님께서는 더 강한 빛으로 다가와 계십니다.
부활 2주간 수요일 (요한 3,16-21)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반영억라파엘신부
저는 사제 서품성구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할 성경구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그중에 하나로 오늘 성경말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