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의 말씀(요한 6,60-69)

2013. 4. 20. 오후 1:13:07

글자

2013.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사도9,31-42 요한6,60ㄴ-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0ㄴ-69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는 박해를 받고 있었지만, 사도들은 용감하게 주님을 증언하였다. 베드로는 리따라는 곳에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한다. 그가 기적의 치유를 베풀자, 그곳 신자들은 다시 주님께 돌아왔다. 베드로는 또 야포에서 많은 선행과 자선을 베풀다 죽은 타비타라는 여제자를 살려 낸다. 이 사건은 인근 지방으로 두루 퍼져 많은 사람을 교회로 불러들였다(1독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에도 불평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거북하다며 투덜거린다.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국 주님 곁을 떠나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떠나갑니다.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다고 외칩니다. 그 말씀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쉬운 말씀은 아닙니다. ‘살과 피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답이 없습니다. 당신과 이루는 일치를 강조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앞의 승복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만 따르고 싶었습니다. 기적에 놀라고, 가르침에 만족하면서, 새 세상이 오면 적당히 편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확실한 선택을 명하십니다.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사람들은 망설이다 떠나갑니다.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떠나겠느냐고 하십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베드로는 확신으로 답합니다. 사람들은 어정쩡했지만, 베드로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운명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모든 풀은 약이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혹서와 혹한을 견딘 풀들은 약발이 셉니다. 그러기에 집에서 키운 약재보다 자연의 약재가 훨씬 비쌉니다. 양식한 생선보다 자연산 생선을 선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충 살면 결과 역시 대충입니다. 확실하게 살면, 삶은 고달프지만, 많은 것이 확실해집니다.

 ★★★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래서 스승은 열두 제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가 대표로 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줄인 말이 ‘영생’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인류의 숙원입니다. 그러기에 영생을 외친 종교는 역사 안에 수없이 많습니다. 최근에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장담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사이비였습니다. 비슷하게 보였지만 가짜였습니다.
영생은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끝없이 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죽음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진정한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하느님 안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그분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지요. 교리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신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기에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그들은 비판의 눈길로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알아듣습니다. 애정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다가가면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만, 비판으로 다가가면 좀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반영억라파엘신부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갖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하고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 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
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 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이 말씀은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당신이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 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사랑합니다.


영과 육
- 반명순 수녀-
삶 안에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달라진 방향은 영과 육, 생명과 죽음으로 갈라놓기도 합니다. 환자 방문을 하여 대세를 권유할 때마다 흔히 있는 대화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모든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세례를 받습니다.” 하고 말씀 드리면, “죽어봐야 알지,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겠느냐??”, “지금 죽을 지경인데 그까짓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십니다. 영보다 육에 몰두해 있는 탓입니다.

예수님의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
?(6,?60)도 예수님의 표징을 보았고?(6,?2), 기적의 빵을 먹었으며?(6,?12), 가르침을 받았지만?(6,?22???59), 투덜거리며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빵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 매력적인 것은 생명의 빵이 아니라 육신을 위한 빵이었고, 더 믿고 싶은 것은 생명의 말씀보다 확고부동한 육신의 안일을 보장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의 은혜를 부여받지만, 자신이 지닌 가치와 척도에 따라 신앙생활을 달리하듯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도 그랬습니다. 자신의 뜻과 원하는 방식이 달랐기에 불평을 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제가 기쁨에 차서 예수님 곁에 머물고, 때로는 그분과의 관계를 소원(疎遠)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나의 욕심이 그분의 표징을 흐리게 하고, 세속적 가치에 묶여 하늘의 가치를 외면하며, 육신의 빵에 매달려 생명의 빵을 도외시하지는 않는지
?…. 오늘도 그분은 제게 물으십니다. “너도 떠나고 싶으냐??”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 주님 앞에 서서 자신 있게 응답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걱정도 팔자

-정병덕 신부-
 교구청에 있다 보니 미사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는데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본당에 도착한 뒤, 화장실에 들렀는데 화장실 문 앞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더군요. ‘문을 꼭 닫아주세요.’ 비록 근처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신사답게 문을 꼭 닫고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을 다 본 뒤에
나오려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난처했지요. 초조한 마음에 문을 세게 두드리며 외쳤지요. “여기 화장실에 갇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런데 몇 번을 이렇게 외친 뒤, 문득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핸드폰이 있었으니까요.
성당 사무실에
연락하면 곧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 일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으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떠나는 수많은 제자들을 보며 열두 사도들에게도 “너희도 떠나고 싶느냐?”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의 참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떠나지 않습니다.

-정병덕 신부-
 교구청에 있다 보니 미사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는데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본당에 도착한 뒤, 화장실에 들렀는데 화장실 문 앞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더군요. ‘문을 꼭 닫아주세요.’ 비록 근처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신사답게 문을 꼭 닫고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을 다 본 뒤에
나오려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난처했지요. 초조한 마음에 문을 세게 두드리며 외쳤지요. “여기 화장실에 갇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런데 몇 번을 이렇게 외친 뒤, 문득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핸드폰이 있었으니까요.
성당 사무실에
연락하면 곧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 일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으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떠나는 수많은 제자들을 보며 열두 사도들에게도 “너희도 떠나고 싶느냐?”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의 참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떠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

-부활의 삶-           
김명준(명혁 다미아노)

 오늘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신체적 장애보다 더 두려운 것이 마음의 장애일 것입니다.

진정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부활할 때 치유되는 마음의 장애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부활의 삶입니다.

밤에 잠드는 것도 신비요 새벽에 잠깨어 일어나는 것도 신비입니다.
그대로 부활의 삶을 상징합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잠자리 들기 전 끝기도 강복 중 ‘거룩한 죽음’ 대신 ‘거룩한 새 아침’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어느 분의 기발한 조언도 생각납니다.

그러나 거룩한 죽음의 밤 있어, 거룩한 새 아침의 부활입니다.

매일 아침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다시 일어나 부활의 삶을 시작하는 우리들입니다.

어제 사울을 회심시킨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은 베드로를 통해 치유 이적과 소생 이적을 행하십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베드로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의 영과 생명으로 충만한 말씀에 8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던 애네아스는 치유되어 일어납니다.

“타비타, 일어나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 죽었던 타비타를 살려냅니다.

‘일어나다’는 말은 바로 부활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매일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단골 용어가 바로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평생 이렇게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게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부활의 삶의 비결은 따로 없습니다.
매일, 평생, 죽을 때까지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살아가는 길뿐입니다.

 

주저앉고 싶은, 드러눞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일어나야 하는 것 역시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유혹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주십니다.

이래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끊임없이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고백할 때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주님의 힘은 바로 내 힘이 됩니다.

하여 매일의 미사와 성무일도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고 고백할 때 충만한 은총입니다.

사실 예수님 말고 찾아갈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여 매일 주님을 찾아 성전 미사와 성무일도에 참석하는 우리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을 찾아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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