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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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가 24,13-35) |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구자 한 사람을 고쳐 준다. 그는 선천적으로 불구의 몸이었다. 그런데도 말씀이 내리자 즉시 걸었다. 불가능했던 발과 다리가 움직인 것이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예수님의 권능이 베드로와 함께 있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못 알아본다. 스승님의 죽음을 이미 정해진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해석해 주시며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신다. 부활의 은총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제야 그들은 스승님을 알아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루살렘 밖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죽음을 보았기에 마음이 심란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체념 때문입니다. 이미 돌아가셨다고 마음을 ‘닫았던’ 것입니다. 그들도 마리아 막달레나의 ‘빈 무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깨달음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스승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체념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살다 보면 마음을 닫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는 답이 아닙니다. 삶을 더욱 실망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바뀐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사랑의 질책이십니다. 실제로 마음을 정하는 데 답답하고 느립니다. 우리 안에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모습이 있는 탓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도취되어 고집을 부리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도 뜨겁게 해 주실 것입니다. 희망이 곧 부활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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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는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토종 새’입니다. 덩치는 꿩과 비슷하며 긴 부리를 갖고 있습니다. 키위라는 이름은 ‘원주민’ 말로 수컷의 울음소리를 뜻한다고 합니다. 200년 전만 해도 500만 마리가 넘었는데 지금은 8만여 마리로 줄었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지폐에도 등장했던 키위 새가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멸종 위기의 원인은 단순했습니다. 고통과 역경이 ‘없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먹이가 풍족하다 보니 서로 다툴 일이 없어졌습니다. 천적도 없기에 도망칠 일도 없어졌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서서히 ‘날개와 눈’이 퇴화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몸의 기능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풍요와 평화’는 안락사의 시작임이 입증된 예입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이 시골로 내려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실망을 느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스승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에다 스승님을 죽인 예루살렘이 싫어서 떠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겪고’ ‘죽음을 수용하는’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눈을 뜹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부활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고통을 피하려 들면 누구나 ‘키위’ 새가 됩니다.
★★★
엠마오는 어디에 있는 마을이며 무엇으로 유명한 곳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때문에 따뜻한 동네로 인식되어 있을 뿐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내려갑니다. 스승은 사형수로 몰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한마디 항변도 해 보지 못한 서글픔에 그들은 살던 곳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인생무상이랄까, 삶의 서글픔이랄까, 그런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들은 열두 제자와는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예수님을 추종했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아니면 몰래 예수님을 도왔던 상인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서로 실망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실망과 몰이해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길에서 만난 분이 부활하신 스승이심을 자연스레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던 겁니다. 주님을 만난 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단에 합류합니다. 더 이상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들의 앞날은 당당함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원선오 신부 '당신을 만났을 때' (1996.2) 원선오 신부 (1928~ 현재) 살레시오 수도회 Track.07 - 엠마우스 (신상옥과 형제들) 엠마우스 원선오 신부 작곡 후렴 :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1.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2. 주님의 이집에 모셔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뛰오니 3. 우리와 한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4.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되고 *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반영억신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사랑합니다.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
길에서의 얘기 마저하시며 *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
주님의 손길은 따스하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