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9일주님 수난 성금요일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오랜 전통에 따라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예식만 거행한다. 본디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들어와 오늘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오늘은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요한 18,1 -19,42)
[오늘 전례]
▦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병고와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 바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 수난 예식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힘으로써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를 희망합시다.
주님의 종’은 자기의 고난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야 했다. 사람들은 그 종이 하느님께 벌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결국 이 종이 바로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고통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제1독서). 사제란 사람들의 기도가 담긴 제물을 하느님께 드리는 존재이다. 예수님께서는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사셨고 온 생명을 다해 사람들의 탄원을 하느님께 올리신 대사제이시다(제2독서). 요한 복음사가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가장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전한다. 곧 모든 은총이 사라진 십자가 위에서 은총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매달려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이 온 세상 그 어떤 곳에도 예외 없이 내려졌음을 보여 준다(요한복음18,1─19,42).



[십자가 경배]
보편 지향 기도를 끝내고 성대하게 십자가 경배를 한다. 다음에 제시하는 두 양식 가운데 적합한 것을 고를 수 있다.
엘리 위젤’이라는 루마니아 태생의 유다인 작가는 자신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체험을 담아 『흑야』라는 책을 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독일 군사들이 수용소의 막사 앞에 유다인들을 늘어세웠습니다. 그리고서 남자 두 명과 어린아이 한 명을 교수대에 매달았습니다. 어른인 남자 둘은 금방 숨이 끊어졌지만, 어린아이의 고통은 무려 반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하느님을 철저히 믿어 온 유다인들 사이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그분께서는 도대체 어디에 계시다는 말인가?”
우리도 살아가면서 그렇게 이야기할 만큼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할 때 ‘정말 하느님께서 계신가?’ 하고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면 왜 우리를 이러한 고통 속에 그대로 두시는가?’ 하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해답은 바로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란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의심케 하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만큼이나 인간의 고통과 절망, 고독과 허무를 잘 드러내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매달려 계십니다. 곧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스럽게 하는 바로 그곳에 하느님 자신이 매달려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 간 어린아이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몸소 죽음을 겪으시며 인류가 신음하는 현장 곳곳에서 그들과 더불어 아파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