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태어나야.(요한 3,7ㄱ.8-15)

2013. 4. 9. 오후 8: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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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7ㄱ.8-15)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의 이상적인 공동체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기 때문에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의 삶을 지상에서부터 살아갔다(제1독서).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태어난 이는 구세주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설명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 이러한 장면이 나옵니다. 한 수감자가 50년의 형기를 마칠 무렵 동료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소동이 벌어집니다. 사회로 나가기가 두려워 교도소에 계속 남고자 일부러 죄를 지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마되었고 결국 그는 출감합니다. 그런데 그는 교도소에서 나온 지 며칠 만에 자살하고 맙니다.
자유롭게 살아 본 적이 없는 그가 막상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 살려고 하니 제대로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적당히 몰래 하던 감옥 생활에 익숙한 나머지 자유롭고 정당한 시민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 형벌을 가하시며, 법대로 살아가라고 강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감옥 안이 아니라 감옥 밖에서 자유로운 자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불듯이’ 영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유인이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수감자입니까, 아니면 진정한 자유민이 되었습니까?

고통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신심이 깊어도 삶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과 시련은 늘 별개입니다. 가끔은 심한 실패도 겪습니다. 누가 봐도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주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깨달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이끄셨다는 느낌입니다. 고뇌를 배우는 것이지요.
내가 아파 보지 않으면 남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사랑도 못 느낍니다. 인내를 체험하기에 영적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분의 이끄심을 모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법칙坍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은총은 철저하게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한다고 하십니다.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봉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에게는 봉사가 필요합니다. 헌신이 없기에 내적 생명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가까이 가면 느낌이 다릅니다. 밝은 분위기가 전해집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구리 뱀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그런 사람이 된다면, 예수님의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 됩니다.

★★★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영적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는 진정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깨달아질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갖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 나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은총의 이끄심이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서 가능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연이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며 활동한다는 암시입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찾아 나서야만 살아 있는 영의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가까운 사람과 애정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따뜻함을 깨닫는 것이 영적 체험의 시작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주님과 함께 삽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맡기는 생활이 영적 생활의 출발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몇 미터 밖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분위기가 온몸에서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가면 행복감마저 느껴집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에게서 그런 분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

 

이집트를 벗어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를 헤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나는 길입니다. 머무를 집도 땅도 없었습니다. 가축을 먹일 초원도 물도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탈출의 흥분이 가라앉자 백성들은 현실적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찾아듭니다. 앞날의 불안에 눌린 그들은 모세에게 항거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바탕으로 형성된 민족입니다. 그리고 광야의 생활 자체도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집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 더 이상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보속이 내립니다. ‘사막의 뱀’들이 나타나 불신에 빠진 백성을 물어 죽였습니다. 오갈 데 없던 백성은 모세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합니다. 이렇게 해서 구리로 만든 뱀의 조형물이 광야에 내걸렸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던 것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그 ‘구리 뱀’에 비유하십니다. 기적의 능력이 당신 안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 곁에도 ‘사막의 뱀’은 많습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하다면, 예수님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겁니다.




행동하는 믿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개나리 진달래가 꽃을 피우며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심은 미선나무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긴 겨울의 추위를 견뎌 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영양을 충분히 지닌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들이 드러납니다. 밑거름이 중요한데 웃거름으로 겉만 다스렸던 나무들은 힘이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밑거름이 충분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웃거름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의 생활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자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행복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주어집니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umbrella)

행복은 환경, 능력, 재능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싶습니다.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부모님께서 능력이 있어서 뒷받침을 잘 해 주시고, 본인도 똑똑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행복할거라 생각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렇게 3박자를 모두 골고루 갖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3박자를 모두 얻은 사람들이 100%로 행복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행복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어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도, 능력이 모자라서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어도, 겨우 직장을 얻어서 밥은 먹고 살아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욥 성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를 드렸으니,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 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욥 성인에게 행복의 기준은 재산, 능력, 화목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으며, 모두가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르나바는 자신의 것을 공동체를 위해서 봉헌하였지만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이 처한 환경이 더욱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박해의 칼날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능력이 갑자기 커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능력도 재산도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그들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는 예약이 없고 모처럼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매일 예약이 있고, 손님들을 맞이해야 합니다. 불평의 눈으로 보면 시간이 많으면 심심해서 죽겠다고 합니다. 일이 많으면 바빠서 죽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감사의 눈으로 보면 시간이 많으면 책도 읽고, 세차도하고, 기도도 하니 좋은 일입니다. 일이 많으면 매출이 많이 오르니 좋은 일입니다. 같은 일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행복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주어집니다. 원망과 미움,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면 그만 큼 나는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 희망과 겸손의 바람이 불면 나는 그만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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