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르10,1-12)

2025. 2. 27. 오전 7: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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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8일 금요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르10,1-12)


   


1독서<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다.>(집회6,5-17)

5 부드러운 말씨는 친구들을 많게 하고 우아한 말은 정중한 인사를 많이 받게 한다.

6 너와 화목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많이 만들되 조언자는 천 명 가운데 하나만을 골라라.

7 친구를 얻으려거든 시험해 보고 얻되 서둘러 그를 신뢰하지 마라.

8 제 좋을 때에만 친구가 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9 원수로 변하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너의 수치스러운 말다툼을 폭로하리라.

10 식탁의 친교나 즐기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11 그는 네가 잘될 때에는 너 자신인 양 행세하고 네 종들에게 마구 명령해 대리라.

12 그러나 네가 비천하게 되면 그는 너를 배반하고 네 앞에서 자취를 감추리라.

13 원수들을 멀리하고 친구들도 조심하여라.

14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15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16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

17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화답송>시편119,12.16.18.27.34.35(35) 주님,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저에게 당신 규범 가르치소서.

당신 규범을 기꺼이 지키며, 당신 말씀을 잊지 않으리이다.

제 눈을 열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가르침 바라보리이다.

당신 규정의 길을 깨우쳐 주소서. 당신의 기적을 묵상하오리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복음<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1-12)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집회6,5~17)

 

"친구를 얻으려거든 시험해 보고 얻되, 서둘러 그를 신뢰하지 마라. 제 좋을 때에만 친구가 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네 고난의 길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집회6,7~8)


집회서 4장 20절에서 6장 17절은 인생의 가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 오늘 독서 집회서 6장 5~17절은 성실한 친구와 원수로 변하는 친구의 대조를 통해 참된 친구와 그 우정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원수로 변하는 친구는 상대방 친구의 수치를 폭로하고, 잘될 때에는 군림하고 식탁의 친교는 즐기면서도, 결정적으로 상대방 친구의 고난과 비천의 날에는 함께 있어 주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본색을 드러낸다는 표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성실하고 참된 친구의 기준과 척도는 상대방 친구의 고난과 같은 어려운 지경에 끝까지 동참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준다(집회6,7~9.11).


특히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요, 보물이며, 값으로 따질 수 없고, 어떤 저울로도 그 가치를 달 수 없는데, 이런 생명을 살리는 명약과 같은 친구는 주님을 경외할 때 얻을 수 있는 선물이며, 그러한 우정도 주님의 말씀과 기도안에서 바로 키워 나갈 수 있고, 이웃에게도 하나의 표양이 될 수 있음을 계시한다(집회6,14~17).


오늘 독서의 집회서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별하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과 더불어 이스가리옷 사람 배반자 유다와 관련된 구절 등등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15,13)

"제 동무들과 이웃들은 저의 재앙을 보고 물러서 있으며  제 친척들도 멀찍이 서 있습니다." (시편38,12)


겟세마니 동산에서 겉으로는 스승님을 부르고 입을 맞추면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처럼(마르14,42.44~46),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남들이 보기에 가장 친한 친구처럼 행세하던 자가  겉으로는 웃으면서 도와주는 것같이 시늉을 내며 나를 포옹하고는 칼을 뽑아 나의 등을 찌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41,10)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그를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정답게 어울리던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떠들썩한 군중 속을 함께 거닐던 우리." (시편55,13~15)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6,3~4)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다윗에게 다시 맹세하게 하였다." (1사무20,17) 





전주교구 사제 송영진 모세 

                                                          <혼인과 이혼>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혼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둘이 한 몸이 되라는 뜻이고,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일이고, 따라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갈라놓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이혼을 허락할 권한은 없습니다.)

1) 결혼을 앞둔 미혼 남녀의 경우.

혼인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고, 혼인을 결정하는 일들이 모두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일처럼 생각되겠지만,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혼인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는 ‘혼인은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느님을 알기 전부터 이미 혼인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인연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2) 결혼해서 부부로 살고 있는 경우.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들을 부부생활에 대한 조언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로마 12,9)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에페 4,26-27)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콜로 3,13-15)

부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3) 이혼 후 재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조당 상태에 있는 경우.

사제들의 강론들을 보면, 혼인과 가정의 신성함과 거룩함에 대해서만 말하거나, 이혼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만 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결혼 전의 미혼 남녀에게는 그런 강론이 필요하지만, 이미 이혼한 사람들과 조당 상태가 되어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때에는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일이 필요하지만, 이미 넘어져서 다쳤다면, 조심하라는 경고는 소용이 없고, 왜 조심하지 않았느냐고 꾸짖기만 하는 것은 고통을 주는 일만 됩니다.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목자가 할 일입니다.)

<조당(阻擋)은 옛날 용어이고, 요즘에는 ‘혼인 장애’ 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혼인 장애’란 혼인을 불법, 또는 무효로 만드는 일체의 사정을 말합니다. 즉 혼인을 불법 또는 무효로 만드는 흠결의 사유를 말합니다. 

이 흠결의 사유를 무시하고 어기면서 혼인을 하였다면, 신자로서 정상적인 성사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혼인 장애’ 상태가 됩니다. ‘혼인 장애’ 상태에서는 일곱 가지 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단순한 경우라면 본당의 주임신부가 해결할 수 있지만, 복잡하고 까다로운 경우라면 교구의 혼인 법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영구적인 ‘혼인 장애’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사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하고, 교회와 당사자들이 함께 노력한다면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혼인한 이들에게 분부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으면 혼자 지내든가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1코린 7,10-11)

(이혼했더라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경우는 ‘혼인 장애’가 아닙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신자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부인에게 신자 아닌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신자 아닌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고, 신자 아닌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자녀도 더러울 터이지만, 사실은 그들도 거룩합니다. 그러나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 그러한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2-15)

여기서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라는 말은, 혼인보다 신앙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말한 것인데, 우리 교회가 예외적으로 이혼을 허락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을 ‘바오로 특전’이라고 부릅니다.)

(교구 혼인 법원을 통해서 ‘혼인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흔한 경우가 ‘혼인 무효화 소송’인데, 이것은 혼인이 유효한 혼인성사가 아니었음을 심판해 달라는 소송입니다.

 겉으로는 적법하고 유효한 혼인성사처럼 보였지만, 여러 가지 내적인 사정과 모든 상황을 살펴볼 때 혼인성사가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혼인 법원에서 그 혼인은 무효라고 선고하게 되는데, 그 선고를 받게 되면 공식적으로 그 부부가 헤어지는 것이 인정되고, 동시에 ‘혼인 장애’ 상태가 해결되고, 재혼할 수 있게 됩니다.

 겉으로만 보면 마치 혼인 법원이 이혼을 허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성사의 유효성을 엄격하게 다시 확인하는 일이고, 성사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청주교구사제  반영억 라파엘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에게 결혼은 왜 하느냐? 고 했더니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항상 예뻐해 주고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이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살아가면서 그것도 체험해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면만 봤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면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겠다고 다짐하는 그를 그 약속 변치 않기를 기원하며 마음 다해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면 계약에 충실할 수 있고 계약에 충실함으로써 또 사랑하게 된다는 깨우침을 얻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7-9)고 하시며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부부, 즉 합당하게 결혼한 부부는 두 인격체 이면서도 동시에 한 인격체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쫓아내는 소박 등 남존여비사상이 빚어낸 결혼, 이혼, 재혼은 가부장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가능할지언정 이제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혼인의 단일성, 즉 ‘일부일처’, 그리고 혼인의 불가 해소성 즉 ‘이혼 불가’, 혼인의 성사성 즉 ‘부부애’, 창조사업의 직접적인 참여, 다시 말하면 ‘자녀의 출산’을 중요시하여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즘 결혼하는 부부 2쌍 중 1쌍이 이혼한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채워주고 계약에 충실하며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고 그리 쉽게 헤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이고 아이들의 어머니요, 아버지임이 분명한데 그들을 뒤로 하고 차라리 몰랐던 사람보다도 더 악하게 마주서고 있으니 그러고도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지요? 어려움이 몰려올 때 그래도 사랑해야 할 나의 동반자임을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시다.

 “말로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1요한3,18)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커지면 그에 상응하는 법률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갈라서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일치를 도모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예레 31,3)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써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20250228일 금요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혼인한 이들은 물론이고, 사목 현장에서 혼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을 돌보는 사목자들과 교우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가르침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마치 우리 시대의 인간적 현실을 무시한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멍에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의 가정은 사실혼, 동성 간의 결합, 출산 기피, 기술 혁명으로 말미암은 출산 행위의 조작이나 성별에 대한 편견 등 그리스도교적 혼인을 위협하는 수많은 요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실제로 혼인을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가진 가정의 상황만을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혼인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1코린 7,7)이고 무엇보다 먼저 성직과 축성 생활에 앞서는 하나의 성소이기에 신중한 식별로 응답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따라서 혼인의 불가 해소성은 사람들에게 부과된 멍에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혼인으로 결합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사로 이해하여야 합니다”(사랑의 기쁨, 62).

위기에서도 인내로 혼인을 지키는 사람들, 혼인 생활의 위기 앞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과 기도로 동반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현대 감각을 거스르지 않고자, 또는 인간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에서 시류에 뒤처져 있다고 느껴서, 혼인을 옹호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를 멈춘다면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고 주어야 하는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35).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02월 28일 금요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다시다시~

 

복음(마르10,1-12)

1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떠나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에는 늘 그분을 적대하는 세상과 하나 된 율법자들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길, 뜻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루가3,34 요한15,19-20 참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 당시 모든 남자들이 여자를 무시하며 쉽게 버리는 못된 완악함으로 이혼이 성행했었다. 그래서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하느님께서 이혼장을 허락하신 것이다. 곧 하느님은 인간들의 이혼보다 다른 차원의 이혼을 막으시려 하신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 둘로 분리해서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 한 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 곧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당신의 창조의 목적, 뜻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 창조에 이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혼장은 ‘케리투투호 분리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곧 성경을 선과 악, 그 둘로 분리해서 보고 행해 버리면 이혼이라는 것이다.

구약에 머물러 율법의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열심히 지키는 그 사람의 의로움이 참이라 여기며,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 구원의 의로움으로 건너가지 못해 그분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구원과 분리가 되는 이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남자,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이혼이 되는 것이다. 첫 창조는 하늘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곧 우리의 새 창조를 예표한 것이다. (요한3,7 2코린5,17 갈라6,15 참조) 그러므로 구원자(남자)와의 이혼은 절대 불가 한 것이다.

오늘 말씀을 인간들끼리의 이혼만을 말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이혼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하늘의 용서, 자유, 의(義), 생명을 받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이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로마7,1-4) 1 형제 여러분여러분이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말합니다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2 혼인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율법으로 그에게 매여 있습니다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관련된 율법에서 풀려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간통한 여자라고 불리지만남편이 죽으면 그 율법에서 자유로워져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겨도 간통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4 나의 형제 여러분여러분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대속덕분에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 율법의 죄를 대속으로 완성하시려 죽으셨다 사흗날에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차지가 된 우리다. 그렇게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뜻)이다.

 

(에페5,24-32)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 하느님의 뜻인 새 계약,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의 의(義)와 분리된 인간의 뜻, 의를 위한 율법(제사, 윤리)교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열심한 행위의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다시 받아 주신다. 다시 받아 주시는 사랑, 자비의 신랑이시다.

 

(호세3,1-2) 1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고 있다.” 2 그래서 나는 은 열다섯 세켈그리고 보리 한 호메르와 한 레텍으로 그 여자를 사들였다.

= 호세아와 예수는 같은 이름이다.(아람어, 헬라어) ‘은 열다섯 세겔, 그리고 보리 한 호메르와 한 레텍’은 예수의 몸값인 ‘은돈 서른 닢’이다.(루가26,15)

민족을 위한 자기 의(義)의 ‘독립투시였던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값이다.

 

화답송(시편103,1-4) 1 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내 안의 모든 것들아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2 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3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4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영혼에게 명령한 말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우리의 죄로저주로 죽으신 신랑 예수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그분을 주인으로 얼마나 믿고 의지하며 사는지 보게 하소서오늘 다시그 주님께 돌아와 다시 그분과 결합되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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