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19일 수요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눈먼 이 치유 (마르8,22-26)
제1독서<노아가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창세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냈다.
7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화답송>시편116,12-13.14-15.18-19ㄱㄴ(◎17ㄱ) ◎ 주님,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나이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의 집 앞뜰에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
복음<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마르8,22-26)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누구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시는가?
(창세8장13-22)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다 말랐다.
15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셨다. 16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와라. 17 모든 생물들,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살덩어리들, 곧 새와 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을 데리고 나와라. 그래서 그것들이 땅에 우글거리며 번식하고 번성하게 하여라.” 18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19 모든 짐승과 기어 다니는 모든 것, 모든 새와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도 종류별로 방주에서 나왔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 노아 때의 세상을 심판하셨던 목적은 절대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회복을 위해서 심판하셨습니다.
회복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심으로 시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 하심으로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황폐하여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마음이 노아 홍수로 폐허가 된 세상과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진정한 회복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 하심으로 우리를 지금도 마음에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의 바람을 불어주심으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 성령 하느님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따라 갈 때 먼저 하느님의 진노가 그칩니다. 또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갈 때 모든 것이 다 자기 위치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있을 곳은 서로 판단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염려하고 걱정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을 곳은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따라서 우리가 있을 기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역사는 긴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의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먼저는 고통 가운데서 참고 견뎌야 합니다.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의 올리브나무 새 잎사귀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작은 올리브나무 새 잎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작은 올리브나무 새 잎을 가지고 이제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에게 그 어떤 인간적인 올리브나무 새 잎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저는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나무 새 잎을 보면 올리브산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와 땀을 흘리시고 기도하신 예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그 어떤 올리브나무 잎이 보이지 않아도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희망의 올리브나무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고통 가운데라도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회복을 소망하며 기다리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옛 자아가 죽은 자를 통해서 하느님은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1베드3:20-21)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여기 보면 사도 베드로는 노아 홍수때 물은 너희를 구원하는 세례를 상징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출애굽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 10장 1절과 2절에서도 이스라엘백성들이 홍해를 지나간 것을 세례를 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방주에 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물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 홍수 때의 물은 세례 때의 물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세례 때의 물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물에서 나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내가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어떻게 코로나로 폐허가 된 이 세상이 새롭게 회복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 세상은 바뀔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절대 세상은 바뀔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과연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이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6,5-6) .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9,21) .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홍수의 심판 있어도 사람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죽어야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죽어야합니까? 우리의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완전히 죽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물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는 분명 세례를 받을 때 물에 잠기는 예식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죽었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시에 물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로마6:3-4)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새롭게 깨달아야 할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단순히 우리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또 내가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홍수의 물속에서 나온 것이 세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속에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폐허가 된 이 세상이 어떻게 회복이 될 수 있습니까?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축복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진정으로 믿어야합니다.
더 이상 나의 옛 자아로 살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이미 되었음을 믿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 모두에게 코로나의 시련을 주십니까? 끝날 것 같은데 왜 끝나지 않는 고난들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은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정말 예수님과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죽었음을 믿으십니까? 내가 죽었다면 누가 나에게 무엇이라 하든지 상관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하니 내가 죽었음을 완전히 믿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는 예수님과 죽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은 물고기는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아프지 않습니다.
회복된 세상을 원하십니까?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혀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 있을 때 우리가운데 진정한 회복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기 바랍니다.
둘째.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이제 홍수가 끝이 났습니다. 비만 그친 것이 아니라 모든 물이 다 말랐습니다. 물만 마른 것이 아니라 땅도 다 말랐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장 방주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이 마르고 땅이 말라도 방주에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면 방주가 인간적으로 살기 좋은 곳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가 다른 동물에게 먹이를 주니까 사자가 화가 나서 노아를 발로 쳐서 노아가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방주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느님께서 아직 그에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는데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7,1)
(창세8,13-16)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다 말랐다. 15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셨다. 16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와라.
“일 년 내내 힘든 홍수 기간을 견뎠고 이제야 홍수가 멈추고 새 생명이 비치게 되었는데, 하느님의 명령이 아니고는 무덤 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이의 용기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방주는 인간적으로 보면 빨리 나오고 싶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명령이 아니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용기를 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가라고 하는데 가고 성경에 서라 하는데 서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내가 아무리 하기 싫어도 성경에서 하라고 하는 것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성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 하느님은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야고1:22-25)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왜 말씀을 듣기만 하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까? 우리가 기도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도 기도하는 자인 것처럼 자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다.
왜 여러분들은 들었던 말씀을 잊어버리십니까? 그 이유는 그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그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왜 말씀을 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도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왜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율법 또는 말씀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면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면 그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또 우리가 말씀에 순종 할 때 그 말씀에 따른 복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도 노아와 같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무덤과 같은 곳이라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용기를 가지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무엇이라도 순종함으로 달려갈 수 있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받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째. 하느님은 예배하는 자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코로나가 완전히 물러가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야훼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창세8,20)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성경에서 제단을 쌓고, 주님께 번제물를 드린 사람은 노아가 최초입니다. 카인과 아벨은 제사를 드렸지 제단을 쌓거나 번제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노아가 왜 제일 먼저 집을 짓지 않고 살 터전을 만들지 않고 주님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까? 먼저 그 이유는 노아는 방주에서도 야훼께 끊임없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예배가 아니면 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코로나 이후에 하느님께서는 코로나의 상황가운데서 끝까지 예배의 자리를 지킨 사람들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에게도 회복의 역사를 주실 것입니다.
노아가 왜 제사를 드렸습니까?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노아는 자신과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오게 된 것은 오직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인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노아가 제사를 드린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기 위함입니다.
20절에서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의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 번제의 제사에 대해서
(레위1,4) 4 번제물의 머리에 손(동일시, 전가)을 얹는다. 그러면 그 제물이 그(제사 드리는 자)를 위해 호의로 받아들여져, 그의 속죄가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노아는 제사를 드릴 때 자신의 모든 죄를 제물에게 전가를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의 모든 죄를 정결한 제물에게 전가를 시켰습니다. 그랬을 때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제란 죄를 사(赦)해 준다는 것입니다.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제사를 드릴 때 ‘하느님 홍수가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악합니다. 그러하니 주님 우리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세8,21)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여기서 ‘주님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라고 하는데, 여러분 이 향기가 어떤 향기이겠습니까? 단순히 제물의 향기이겠습니까? 사실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을 태우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보면 역겨운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향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제 자체의 향기 보다 번제를 드리는 노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하느님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음으로 악한 냄새를 뿜어냈다면 노아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습니다. 또 노아는 감사의 제사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습니다. 또 노아는 제사를 드릴 때 모든 사람을 용서함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습니다. 무엇보다 노아는 제물에 안수함으로 노아 그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다시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향기 나는 예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이 예배시간(미사)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음을 고백하는 사람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 예배시간에 감사하는 자를 통하여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 예배시간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 지금도 회복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죽음과 순종과 감사와 용서의 향기를 받으시고,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실 줄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聖徒)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3년 02월 15일 수요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떤 눈먼 이의 치유는 어제 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소경 성을(마르 8,16-17 참조)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자주 눈의 상징을 활용합니다. 우리가 후회되는 일을 하고는 “내가 그때 눈이 멀었었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사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큰 장애가 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 받은 사람을 ‘빛을 받은 이’로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뎌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히브10,32).
또 신앙의 눈으로 올바로 보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 세상을 살아가며 좋다고 하는 것들 사이에서 참으로 값진 보물을 구별해 내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속이고 기만하는 것을 만나 세상살이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처럼 겉모습 너머를 보는 눈,
참 생명을 위하여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선택은 늘 눈에서, 곧 욕망으로 가려진 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창세 3,6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의 치유를 위한 많은 가르침을 주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두 번 나오는 “마을”이란 말에 조금 더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실 때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라는 말씀과,
시력이 회복된 이에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보고 신앙의 눈을 뜨고 살아가려면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루기를 바라시는 새로운 탈출의 여정을 뜻합니다(예레 31,31-32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치유된 이를 “집으로” 보내시며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집으로 보내시면서 그가 살아갈 마을로는 가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 마을”이란 그리스도의 빛과 복음의 빛으로 보지 않고 세상의 기준과 자기 통념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그 모든 곳이 아닐까요?
세상의 기준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은총을 다시한번 주님께 청합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무엇이 보이느냐?
반영억라파엘신부
눈 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침은 생명의 힘인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은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손을 얹은 행위는 치유의 능력, 성령의 힘이 전달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 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 는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치우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현상을 보는 눈도 중요합니다. 검은 것은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도 필요합니다.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우리는 각자의 직분에 맞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마음을, 제자는 제자로서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마음을,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말씀을 통하여 능력과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 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을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주신 다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8,26)고 하셨습니다. 저 마을이 무슨 마을일가요?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 만연하는 마을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진 곳입니다. 그 마을로 들어가면 또다시 예전처럼 죄에 물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마을로 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이 하신 일이 마음이 굽은 사람들의 눈에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늘의 뜻에 따라 하였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2025년 02월 19일 수요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벳사이다, 복음서의 서두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입니다.
바로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입니다.
‘어부의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마을에서 사도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 세상에 파견됩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의 마을에 눈먼 이가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사도들의 고향을 눈멂이 다스리고 있다고, “눈먼 이”(마르 8,22)는 사도들의 마을에 살고 있던 유다 백성이라고 풀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눈멂이 지배하는 마을에서 그를 떼 내시는 것입니다.
그가 똑똑히 보게 된 뒤에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도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집이 마을 안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어둠의 세계를 떠나야 하고, 다시는 그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지 말아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 방식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합니다.
직접 만나시지도 않고 먼 곳에서 말씀 한마디로 간청하는 이의 신앙을 시험하신 뒤, 본인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또는 나인의 과부에게 하신 것처럼 요청 없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대부분의 기적은 한 번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회개와 새롭게 태어남도 바오로 사도처럼 한순간의 강력한 체험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더 많은 경우에는 단계적으로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점차 어둠에서 멀어져 빛으로 다가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02월 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뜻, 구원의 약속이 보이십니까?.
(마르 8,22-26)
22ㄱ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 벳사이다- 주님께서 불행하다 말씀하신 지역입니다. 아람어 뱃새이(사냥꾼, 어부)에서 온 말이랍니다.
(마태11,21)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 회개를 못해 불행한 곳입니다. 잘못(죄) 때문이 아닌 회개를 못해 불행한 그곳에 회개. 그 복을 주시려 들어가십니다.
22ㄴ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 주님의 기적, 그 일하심을 죄의 용서로 깨닫지 못한(보지 못한) 눈먼 이입니다.
그리고 그 눈먼 이를 위해 기적의 손으로, 기적의 치유를 청하는 그들 또한 회개해야할 눈먼 이들입니다.
그래서 벳사이다가 불행한 곳입니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 귀먹고 말 못하는 이들처럼(7,31) 먼저 분리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보지 못하는 눈에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침, 곧 말씀을 주시고 물으십니다.
인간의 눈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하신 후 하시는 물으심 입니다.“무엇이 보이느냐?‘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말씀은 늘~ 앞에 희망(용서)을 보게 하십니다. 지난 절망(죄)을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히브10,16참조)
그래서 복음(기쁜소식)입니다. 그 희망의 눈으로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제라-씨. 후손) 여자(테무트-그릇)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었을 때 그릇이 씨를 받아 드렸을 때 -사람입니다. 다시, 피조물인 땅- 여자가 하늘의 씨를 받아 드렸을 때~ 사람입니다. 씨, 후손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눈먼 이가 아직 그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해 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무는 하느님의 구원의 계명, 계약을 뜻합니다.(탈출15,25) 계약(스타오로스)- 기둥(나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십자나무)으로 존재한다는 그 깨달음의 눈을 아직 갖지 못한 눈먼이입니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 기적의 손, 그 창조의 손을 얹으시니, 곧 보지 못하는 그 잘못을 덮으시니 똑똑히 볼 수 있는, 말씀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계약(나무)을 그 어렴풋이 아닌 구원의 약속, 계약(스타오로스-십자나무)을 진리로 똑똑히 보는 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 주님의 말씀을 인간의 뜻, 그 길로 말하는 마을(공동체) 그 불행한 곳, 악한 곳으로 들어 가지 마라 하십니다. 그 마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시편1,1-2)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되새기는, 기억하는 것 착한일, 정결한 올바른 기도입니다.(레위11,3참조)
(마태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찾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오늘 벳사이다의 말씀은 어부(벳새이)인 제자들에게 회개해야할 눈먼 이임을 깨달으라고, 보라고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뜻을 위해 말하고 듣고 기도하는 공동체-불행입니다.
주님, 당신의 침(말씀)을 원합니다. 오늘 땅인 여자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루어지소서~~!
그러면 우주 만물과 내 삶 속에서 또한 구원의 약속 그 말씀을 보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로마1,20참조) 그러면 내 삶이 희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 아멘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