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08일 토요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가엾은 마음 (마르6,30-34)
제1독서<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13,15-17.20-21)
15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16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7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21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화답송>시편23,1-3ㄱ.3ㄴㄷ-4.5.6(◎1)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복음<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마르6,30-34)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히브13,15~17.20~21)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5~16)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3장 15절, 16절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찬미와 선행의 제사를 드릴 것을 권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히브10,12.18) 이후로 다시 문자적인 의미의 제사가 바쳐질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이제 성도가 하느님 마음에 바칠 제사는 바로 찬미와 선행이라는 성도 개인의 신앙 표현인 것이다.
본절에서 언급된 성도들이 항상 계속해서 바쳐야 할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제사는 찬양의 제사이며, 랍비들의 격언대로 다른 모든 제사는 없어질지라도 이 제사만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유대 철학자 필로(Philo)는 이것을 '최선의 제물'이라고 표현했다. 즉 찬양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최선의 제물이므로 이것을 계속 바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바칩시다'로 번역된 '아나페로멘'(anapheromen)은 '아나페로'(anaphero)의 현재 가정법으로 권유를 나타낸다.
'아나페로'동사는 '위쪽으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전치사 '아나'(ana)와 '가지고 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페로'(phero)의 합성어로서 '위쪽으로 올려드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제물을 제단에 올려드리듯이 찬양을 올려드리자는 의미인 것이다.
또한 '찬양'으로 번역된 '아이네세오스'(aineseos)의 원형 '아이네시스'(ainesis)는 '명예롭게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이네오'(ain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하느님께 합당한 명예를 올려드리는 찬양'을 의미한다.
한편 히브리서 저자는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행위와 관련하여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예수님을 통하여'바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언제나' 바쳐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먼저 '통하여'로 번역된 전치사 '디'(di)의 원형 '디아'(dia)는 본절에서처럼 소유격을 지배할 때 수단, 방편, 매개의 뜻을 나타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제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바칠 수 있으므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이 제사를 바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또한 '언제나'로 번역된 '디아 판토스'(dia pantos)는 '계속적으로' (continually)라는 뜻이다. 찬양은 곧 하느님을 명예롭게 말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찬양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모든'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판토스'(pantos)가 나타내듯이 어떤 환경속에서도 찬양을 할 수 있는 성도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며,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기대할 수 있다(사도16,25.26).
하바쿡 예언자는 정치, 사회, 경제, 종교적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노래하였다(하바쿡3,16~19).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찬양의 제사는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찬미하는'으로 번역된 '호몰로군톤'(homollogunton)의 원형 '호몰로게오'(homollogeo)는 '고백하다','시인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는 '찬양하다'를 뜻하는 '야다'(yada)와 '서원하다'를 뜻하는 '나다르'(nadar), '맹세하다'를 뜻하는 '샤바'(shaba)의 역어로 한 번씩 나온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외적 표현 중에서 입술의 표현, 즉 고백인 것이다.
'입술의 열매'는 이사야 57장 19절과 호세아서 14장 2절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히브리서 독자인 히브리 출신의 성도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다. 이같은 입술의 열매, 즉 구체적인 감사의 찬양은 하느님의 은혜를 아는 이들이 결코 중단해서는 안되는 너무나 고귀한 참된 제사이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6)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찬양의 제사와 함께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섬김(봉사)의 희생 제사인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선행와 나눔으로 요약한다.
'선행'으로 번역된 '유포이이아스'(eupoiias)의 원형인 '유포이이아'(eupoiia)는 '잘' 또는 '좋은'을 뜻하는 부사 '유'(eu)와 '행하다'를 뜻하는 동사 '포이에오'(poi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좋은 일'을 뜻한다.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이 단어는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좋은 일을 도모하는 것을 지칭한다(마태5,13~16; 로마15,2; 에페2,10).
또한 '나눔'으로 번역된 '코이노니아스'(koinonias)의 원형 '코이노니아'(koinonia)는 '친교','교제','참여','교섭'등을 의미한다.
로마서 15장 26절에서는 '구제'란 의미로 쓰였다.
그리스 세계에서 이 단어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분명하고도 깨어지지 않는 친교를 나타내는 용어였고, 인간들 사이의 '밀접한 결합'과 '친밀한 결속'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를 다른 말로 바꾸면 '형제애'가 된다.
이러한 대신(對神) 및 대인(對人) 관계에 있어서의 친교가 초대 교회 안에 모범적으로 이루어 졌다. 그들은 밖으로는 전교와 함께 구제를 힘썼으며, 안으로는 유무상통하는 친교(사도4,32~35)에 힘썼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편지를 기록하던 때에도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좋은 관행은 계속되어야 함은 물론 더욱 확산되어야 했기에 히브리서 저자가 이것을 소홀히 하지 말도록 촉구한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는 계명은 여기서처럼 선행과 나눔을 통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선행이나 나눔이 외인들 보다는 성도들 사이에서 먼저 행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선을 행해아 할 대상이기는 하지만 우선 순위는 주님 안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있다(갈라6,10).
2023년 02월 04일 토요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는 “외딴곳으로”라는 표현이 두 번 거듭 나옵니다(31절과 32절).
이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그 뜻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며 일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셨고, 그들과 함께 따로 외딴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잠시 군중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장면이 때때로 나오는데,
그 다음에는 언제나 중요한 계시가 이어집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낫게 해 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7,33 참조).
당신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9,2 참조).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곳도 군중과 따로 떨어진 한적한 집입니다(9,28 참조).
교회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활동과 애덕을 실천하는 데는 신자들의 많은 노력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저마다의 열정과 열의로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자칫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잃을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도 어느 순간 인간적인 기준을 따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활동이 개인의 선호와 관심에 따라 흘러가기도 합니다.
제자는 언제나 스승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시 돌아와 그분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계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예수님과 따로 한적한 곳에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믿는 이의 삶은 넓게 보면 주님께 바치는 한 편의 기도이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이 모든 것 안에 주님과 함께 머무는 침묵의 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머물지 못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집착과 열망에 따른 것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성당을 찾는 모든 신자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기쁨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 머물면서 삶의 방향을 찾고 그분의 양식으로 힘을 얻는 ‘외딴곳’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자신으로 자신하십니까? 주님으로 자신하십니까?
(마르6,30-34)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 외딴곳- 광야를 뜻합니다. 광야로 가서 쉬어라. 먹어라 하십니다. 광야의 만나를 먹고 쉬라고 하십니다.
(신명8, 3)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만나, 그 주님의 말씀을, 음식- 양식으로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그 말씀, 양식을 먹기 위한~ 이집트에서 먹은 그 이방인의 음식을 비워내는 그 비움,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고- 오고가는 그 종교행위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먹을 수 없었고, 깨달을 수가 없어 하늘의 쉼- 안식,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 예수님께서도 기도 하실 때 외딴곳으로 가시곤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하실 구원의 일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양식)을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기도란-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니까요. 그 하느님의 뜻이 내 죄의 용서, 구원입니다.
(마태6, 10)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 에서 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역시 그 외딴 곳에서 육을 위한 빵이 아닌 영의 구원을 위한 진리의 말씀으로 먹기 위한 준비, 그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 육로- 육을 위한 길, 그 행위를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달렸으면 배(교회)를 앞질렀을까요? 대단한 열성입니다. 그러나 헛 열성이지요. 바쁘게, 열심했던 -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 행위가 아니다’ 하셨던 마르타 신앙입니다. (루가10,40-42참조)
말씀을 먹지 않는, 깨닫지 못한 열성은 쉼, 안식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 말씀을 진리로 먹이는 목자가 없는 양들입니다.
본당에 온갖 단체는 많으나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배우고 나누는 단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본당 사제께 ‘그런 모임을 하고 싶다.’ 건의 드렸더니 문제가 많다며, 그 문제해결 방법은 찾지 않고 묵묵부답~~~~
도대체 성당은 왜 다녀야 하는 것인지~, 미사가 있다고, 미사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미사도 제사로만 드리고 있으니.... 그 제사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요즘은 코로나로 그도 쉽지는 않지요.
미사(missa)- 파견하다. 에리까리띠우스띠아- 감사제(잔치)라는 뜻입니다. 대속의 십자가 그 단한번의 제사로 우리의 구원이 ‘다 이루어 졌다’ 하셨기에(요한19,30)~~ 그 대속의 사랑, 자비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그 잔치(미사)로 다시 그 사랑, 그 자비를 깨닫고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 파견 받는 것, 미사(missa)입니다.
그 단 한번의 효과를 다시 봅시다.
(히브10, 11- 22)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7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제발 히브리서 10장이라도 정독을 해 보시기 부탁드립니다.
과연 이 십자가의 용서, 그 약속의 말씀을 알고 있는 신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이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먹이는 목자(사제)가 있습니까?
(요한8, 31-32 )31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없습니다. 아직 까지 저는 그런 목자(사제) 만나지 못했습니다. -(평신도 중에 한분을 만나기는 했습니다.)
육로- 그 육의 뜻을 위한 종교 행위로, 내 뜻을 위한 제사 행위의 신자로 교회가 만드니~ 언제 어떻게 말씀을 구원의 양식으로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목자(사제)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그 하늘의 일을 하지 않는 우리들의 잘못이 더 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이 가르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요한14,26) 하느님의 말씀은 그 성령을 통해서 들어야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루가11,9-13) 그 영을 모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로마서8,9)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17,3) 3 영원한 생명(구원)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제사 드리고 열심히 기년일 등 온갖 전례 행위에 바쁘면~~
(이사1, 12-14)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 이미 완성된 제사를 반복하는 것, 싫다 하십니다. (히브리서 에서 보았듯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 그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사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그리고 카파르나움(나를 위한 고을, 성전)의 백인대장의 믿음입니다. 자신의 열심, 희생으로 자기를 위해 만든 그 집의 지붕은 자격이 없음을 알고, 그거 주님의 한 말씀이면 되는, 그래서 주님께서 감탄하신 그 믿음입니다.(마태8,5-10참조)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의 열심, 그 희생, 그 어떤 행위로 얻을 수 있는 하늘의 福(바라크- 하늘의 생명력)이 아닙니다.
(에페2, 8-9)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사64, 5)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오물, 걸레)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주님! 우리의 구원을 우리에게 맞기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완성 하셨으니 어찌 감사가 아닌 무엇을 드리오리까? 주님! 감사합니다.
♡ 아멘 -*^ㅇ^*-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복음(마르6,30~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4)
여기서 '목자'로 번역된 '포이메나'(poimena; a shepherd)는 '포이멘'(poimen; 1베드2,25)의 목적격 단수이다.
신약에서 '포이멘'(poimen)이 여기처럼 단수형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마태26,31; 히브13,20).
하지만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목자'는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뜻한다.
당신 군중들을 인도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즉 당시에 존경받던 랍비들이나 말씀을 가르친 율법학자들은 참된 의미의 목자가 아니었다.
마르코 복음 6장 34절(ㄴ)에서 동사 두 개가 하나는 직설법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분사로 쓰였다.
'목자 없는'의 '없는'에 분사로 쓰인 '에콘타'(echonta; having)의 시제는 현재이며, '같았기 때문이다'의 '같았기'에 직설법으로 쓰인 동사 '에산'(esan; they were)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이다.
이것은 벳사이다 들판에 몰려든 큰 군중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삶', 즉 참된 영적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채 목적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아 왔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에게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은 더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끓는 감정을 묘사한 단어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이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was moved with compassion)의 원형 '스프랑크니조마이'(splagchnizomai)는 '창자' 혹은 '내장'을 의미하는 '스플렌'(splen)에서 유래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내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이 용어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사랑이 전제되어 상대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측은지심' (연민의 정; 동정심)의 마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마태9,36).
이것은 이 용어가 루카 복음 15장 20절에서,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들임을 알아채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가 가졌던 마음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바로 이같은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복음 선교와 선행과 치유의 밑바닥에는 이같은 측은지심이 깔려 있어야 하고, 전제되고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다.
여기서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의 '가르쳐 주기'에 해당하는 '디다스케인'(didaskein; to teach; teaching)은 현재형으로서 그 가르침이 쉬지 않고 계속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마르6,35).
그리고 본문과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9장 11절에서 이 가르침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여기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목자로서의 첫번째 행위가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4장 14절에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으로 되어 있고, 루카 복음 9장 11절에서는 말씀과 치유가 둘 다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자신을 찾아온 가엾은 양들에게 영적 양식과 육적 회복을 다 베푸셨던 것이다.
2025년 02월 08일 토요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사도들이 자기 사명을 수행하고 나서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마르 6,30)을 보고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음식을 먹고 쉬도록 배려하시는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따스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열심히 일한 뒤 형제들끼리 보내는 오붓한 휴가는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군중을 피하여 외딴곳으로 떠나지만 군중은 더 긴 육로를 통해서도 지름길인 뱃길보다 먼저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립니다.
예수님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많은 군중이 호수 주변의 길을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만큼 그들의 갈망은 절박하였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그런 군중을 보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라고 전합니다.
‘측은히 여기다’로도 옮기는 그리스 말의 이 낱말은 본래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이해되던 창자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애타다, 애달다’와 비슷한 이 표현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요 예수 성심의 사랑을 잘 나타내는 낱말입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계획대로 쉬게 하시고 당신 혼자 군중을 상대하신 듯합니다.
돌보아 줄 이 없는 군중을 보시고 창자가 움직일 만큼 연민이 끓어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식사와 휴식 그리고 제자들과 보내는 오붓한 시간 등 당신의 모든 계획과 필요를 잊으시고 군중의 필요에 몰두하십니다.
자기 사정을 잊고 상대의 사정에 부응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지름길입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죄인들의 달려야할 저주의 십자가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대신 달리셨기에 십자가가 하느님의 영광인 것이다.
(마르6,30-34)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 외딴 곳(에레모스 - 廣野)에서 음식, 곧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쉬라고 하신다.(안식) 먹을 물도 양식도 없는 곳이 광야, 외딴 곳이다.
(신명8,2-3)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만나(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뜻한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 배(敎會, 하느님백성)는 세상과 따로 분리된, 구별된 외딴 곳의 음식, 곧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쉼, 안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17,28) 28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 예수님은 왜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 같이 보셨을까? 앞13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는 그 소문을 듣고, 그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시려던 외딴곳을 陸路(땅, 세상)로 달려 먼저 다다른 , 쫓아온 그 헛된 열성이 목자 없는 양 같아 보이신 것이다. 다른 말로, 배(교회)의 길, 곧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대속, 그 진리의 길이 아닌 인간들, 자신의 뜻을 위해 그 자신의 방법(계명), 길로 찾아 온 그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셨던 것이다.
(티토1,14) 14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던 것은 회개의 선포와 기름 부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앞에서 기름은 하느님의 빛이며 성령이라 묵상했다. 그 하늘의 빛, 성령으로 마귀(뱀)의 유혹, 그 거짓에 속아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인간들의 뜻, 욕망을 위한 말, 法, 교리로 들어 헛된 신앙으로 병든 이들을 고쳐 주었던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하늘의 생명, 구원을 준 것이다. 그런데 그 진실, 그 주님의 길이 아닌 肉의 길로 肉의 치유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따라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목자 없는, 참 가르침, 참 진리의 말씀을 받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35절 이하에서 구원의 진리, 생명의 가르침을 주신다. 곧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의 양식,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먹고) 대신 하늘의 양식, 당신의 생명(빵)으로 바꾸어 먹이시고 오천 명을 살리시는 구원의 가르침인 것이다.
(요한10,11)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우리의 죽음을 먹으시고(죽으시고), 대신 당신의 생명으로 영원히 살게 하시는 그 계약의 그리스도, 우리의 주인, 주님이시다.
(히브13,20) 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 끌어 올리신(아나고- 법정 용어로 죄에서 풀어주셨다) 곧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그 저주에서 풀어주셨다는 것이다.
(필리2,6-11)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주인)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라 하셨다. 그 목적을 우리가 이루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하느님께서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에페1,4~참조)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 당신 외 아드님을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어주신 우리의 지각으로는 알 수 없는 그 사랑으로, 지옥에 가야 할 우리가 천국을 살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로 드리는 영광이 나오지 않겠는가.
(히브13,2) 21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통하여) 당신께서 기뻐하실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영원 무궁토록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 온갖 좋은 것, 앞에 하느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 구원에 이루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 그분의 대속의 피로 모든 죄, 더러운 양신까지 씻겨진 그 사람만을 하느님은 마음에 들어 하신다. 예수님의 영광, 곧 예수님께만 있는 영광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영광(히브리어-독사(δόξα))은 어떤 존재의 내용이 밝혀져, 밝히 드러난 것을 독사, 영광이라 한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속성, 거룩하심, 아름다우심, 존귀 하심,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내용이 신자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인 것이다. 곧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다. 십자가는 죄를 벌하시는 하느님의 공의다.
(골로1,21)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 반드시 죽어야할 원수, 죄인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아들(獨生子)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하시어 건져 내시는 하느님의 사랑, 자비. 그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그분의 성품, 속성이 함축되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십자가 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예수님의 영광, 하느님의 영광’ 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12,23) 23(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코린4,6)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리는 것,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곧 인간들의 길이 구원의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자기 부인(버림,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천주의 성령님! 성령님의 충만으로 십자가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가 쉼(안식)의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희 마음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