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28일 화요일(성 토마스아퀴나스)
[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마르3,31-35)
제1독서<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10,1-10)
1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화답송>시편40,2ㄱㄴ과 4ㄱㄴ.7-8ㄱㄴ.10.11(◎ 8ㄴ과 9ㄱ)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주님께 바라고 또 바랐더니, 나를 굽어보셨네. 새로운 노래,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내 입에 담아 주셨네. ◎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 당신 정의를 제 마음속에 감추어 두지 않고, 당신 진리와 구원을 이야기하며, 자애와 진실을 큰 모임에서 숨기지 않나이다. ◎
복음<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7,7-10.15-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히브10,1~10)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5~7)
히브리서 10장 5~7절까지는 시편 40장 7~9절을 인용한 것이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로 번역된 '튀시안 카이 프로스포란 우크 에텔레사스'(thysian kai prosphoran uk ethellesas; sacrifice and offering you did not desire)에서 서술어 '에텔레사스'(ethellesas; you desired)라는 2인칭 단수 부정(不定) 과거에 '우크'(uk; not)가 붙었다.
구약 성경에는 본문과 유사한 표현들이 있다.
호세아 예언자의 입을 빌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라고 말씀하셨다.
사무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임의로 제사를 드린 사울 왕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15,20) 라고 지적하였다.
제사 제도를 제정하고 허락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었다. 그 제사 행위를 통해 당신 백성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범죄하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무수한 제사를 드리면서도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이사1,11~13)라는 충격적인 책망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제사 자체를 목적으로 착각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제사드리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서간의 수신자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믿음을 버리고, 구약의 제사 제도로 회귀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소마 데 카테르티소 모이'(soma de katertiso moi; but a body you prepared for me)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오즈나임 카리타 리'(oznaim karitha li)로 표기되어 있고, 새 성경 시편 40장 7절에는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본래 '순종하도록 했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에서 나왔다.
즉 유대인들은 종을 부릴 때 6년 동안만 일하게 하고, 일곱째 해에는 자유로이 놓아주어야 했다(신명15,12).
그러나 종이 주인을 평생토록 떠나지 않겠다는 자유의지를 밝히게 되면, 주인은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 평생 종이 되게 할 수 있었다(신명15,16.17).
따라서 종이 자발적으로 자기 귀를 뚫도록 주인에게 맡기는 것은 그가 평생 기쁨으로 주인의 뜻을 받들어 섬기겠다는 표시였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뚫으셨습니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 다음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70인역(LXX)의 경우를 살펴보면,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이 '주님의 뜻을 기꺼이 복종하겠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이런 측면에서 이 말이 '귀를 열어 주셨다'라는 표현과 같다는 견해를 가진다.
이러한 뉘앙스를 살려 본문을 설명하면, '내가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고 순종하도록 주님께서 그 수단으로써 한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가 될 것이다.
한편, '마련해 주셨습니다'에 해당하는 '카테르티소'(katertiso)는 2인칭 단수 동사로서 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리도록 새 계약의 제물, 곧 '몸'을 준비하신 분은 구속 사업의 경륜을 주관하시는 성부 하느님이신 것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제물'에 해당하는 '홀로카우토마타'(hollokautomata)는 '전부'를 뜻하는 '홀로스'(holls)와 '불사름'을 뜻하는 '카우토스'(kautos)의 합성어인 '홀로카우토마'(hollokautoma)의 복수형으로서 '모두 태워 드리는 번제물'을 의미한다.
이 제사에 대한 규정은 레위기 1장 8절, 9절, 12절, 13절 등에 잘 나와 있다.
또한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로 번역된 '우크 유도케사스'(uk eudokesas; you were not pleased)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 또는 '동의하지 아니하신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해 나타내시는 반응이다. 구약의 제사는 모두 동물을 제물삼아 드린 제사였다. 이 제사들로는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
종교 혹은 예배의 본질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인데, 구약의 제사들은 한 사람도 하느님께 인도하지 못했던 것이다(히브10,1).
사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하느님이신데, 바로 그 하느님께서 제사 제도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제사를 미워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제사로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제사의 한계성을 밝히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완전하게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구약 제사와 다른 그 무엇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이다.
이것만이 완전한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엄중한 죄의 결과를 경계하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측면에서, 그리고 장차 올 새 계약(신약)에 대한 일시적인 예표를 삼고자 하는 측면에서 제사 제도를 명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제사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순종을 원하셨고 (1사무15,22.23; 시편51,18.19), 백성들이 그 제사 제도를 통해 죄에서 떠나는 것 (이사1,11~17; 호세6,6)과 장차 올 온전한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두루마리에'
'두루마리'로 번역된 '엔 케팔리디 비블리우'(en kephallidi bibliu; in the volume of the book; in the scroll; the roll of book)는 '두루마리 책'을 가리킨다.
본절에 언급된 두루마리 책은 임금이 지켜야 할 규정을 기록한 신명기 17장 14~20절, 또는 순종에 대해 기록한 신명기 28~30장을 지칭한다는 견해들이 있다.
이 견해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모든 성경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신 점에 비추어 볼때(요한5,39),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사실 몇몇 성경 구절들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 있다.
성경의 어떤 책, 어떤 장이든지 그것을 해석할 때에 그리스도를 배제하고서는 구원사를 전개해 가시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필리2,8).
따라서 '이루러'로 번역된 '포이에사이'(poiesai; to do)는 '포이에오'(poieo)의 부정사이다.
'이루다','행하다', '만들다'를 뜻하는 '포이에오'(poieo) 동사는 모든 활동을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에 해당하는 '텔레마'(thellema; will)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께서 아버지와 갖는 관계의 일면을 본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셨다.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번민에 싸여 기도하신 내용 가운데도 그분의 이러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마태26,39).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여기에는 요셉 성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서 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의 일생에 대하여 전하는 바가 거의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일찍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복음이 “어머니와 형제들”만을 언급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마치 당시의 신앙인들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일하신 아버지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마르 14,36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포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혈연관계입니다. 가족이 중시되고 같은 혈통을 가진 민족이 강조됩니다.
지난날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같은 혈통을 가진 이들은 한 마을에 모여 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자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새 기준입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친밀한 관계 안에 속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혈통이나 민족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믿음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여러분은 말씀을 올바로 듣고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는지 물으십니다.
(마르3,32-35)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실행- 마음 안에 지키는 것, 깁(행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일하심, 말씀을 진리로 깨닫지 못한, 그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심들의 생각과 달라 믿지 못하는 그래서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이 악을 덮는 그 대속의 십자가~ 예수님께서 내 죄의 죗값으로 대로 죽으신 그 십자가가~ 그 십자가 였음을깨닫지 못해, 십자가의 그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한 그래서 의탁하지 못하고, 내 현실의 십자가에 매여 있는 그래서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사람. 그가 십자가 밖에 예수님 밖에 있는 신자(가족)입니다.
(히브3,18-19. 4,1) 18 또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19 우리가 보듯이, 과연 그들은 불신 때문에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 아멘 -*^ㅇ^*-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복음(마르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35)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이 당신 자신의 혈연적인 가족 관계를 부정하려는 데에 있지 않고, 영적 의미의 가족 관계를 강조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만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이 혈연적 가족 관계의 부정에 있었다면, 가르침의 대상은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강제로라도 데리러 온(마르3,21) 가족들이 되었을 것이고, 가르침의 내용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35절의 결론은 영적 의미의 가족이 누군가에 대한 정의에만 머물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 의미의 가족에 대한 정의를 통해 당신 공동체의 내적 결속을 강화하신다.
당시 열 두 제자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자들은 보잘것 없었다(마르3,32). 이러한 보잘 것 없는 공동체에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의 베엘제불 논쟁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는 그릇된 풍문과 더불어 이제 막 시작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친척들이 가세하여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바로 이런 위기에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도래하는 시대는 사회적 신분이나 가문, 지식에 상관없이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세상적으로 낙오된 자들도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기에, 이런 위기의 순간에 펼쳐진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있는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집에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 계실 때 육신의 가족이 찾아왔다고 해서 가르침을 중단하고 가족들을 만나셨다면, 당신을 추종하던 제자들에게도 교육상 좋지 않은 예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3장 32~33절의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인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고 말씀하셨을 때의 표정과 어투의 단호함과 엄격함은, 공사를 명백히 구분하고, 혈연과 육정을 초월해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서만 자신들을 온전히 헌신해야 할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본다.
2025년 01월 28일 화요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성 토마스아퀴나스 기념일)(김동희 모세 신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 기적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마와 치유의 기원에 악이, 그것도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속성과 구원의 업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 그럴듯하면 그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 확신하게 됩니다.
그들이 매우 똑똑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똑똑한 이들도 예외가 되지 않는 ‘거짓말의 신비’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거짓된 이해와 비난이 가족과 친척들조차 장악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들은 것만 가지고 예수님더러 미쳤다고, 마귀가 들렸다고 단정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혈연관계라고 해서 죄와 악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주님 교회의 일원이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죄악이 저절로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짓과 죄악의 덫에 걸려 비참해진 것을 알고 하느님 자비를 향하여 두 손을 뻗을 수 있을 때, 그리고 용서와 사랑, 구원과 치유를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응답하며 걸어갈 때 우리는 빛 안에서 거듭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4).
(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독서(히브10,1-10)
1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순종과 죄인인 우리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낳으신 거룩입니다.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代贖), 그 끝없고 넓고 깊은 사랑이 낳은 의로움입니다.
복음(마르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 세상과 하나된 내 뜻(意), 말(言), 길(道)을 부인(否認)하고 율법의 실체, 곧 하느님의 뜻, 진리, 사랑, 의로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제께서~ 성경 전체를 볼 때 하느님의 뜻을 실행 하신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에페1,7-11)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은총이신 영원한 보호자 성령님!
저희의 내적 인간이 성령님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 서로 사랑으로 살도록 간구(기도)해 주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