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21일 화요일 (아녜스 기념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르2,23-28)
제1독서<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히브6,10-20)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11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화답송>시편111,1ㄴㄷㄹ-2.4-5.9와 10ㄷ(◎5ㄴ)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
복음<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다.>(마르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히브6,10-20)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13-15)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6장 9-12절에서 끝까지 믿음과 인내를 지켜 약속된 상속을 받으라고 권고한 바 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6장 13-20절에서는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추구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다룬다.
특히 이 단락을 시작하는 히브리서 6장 13-15절에서는 히브리서의 일차 독자들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인내를 통해 약속을 성취 받았다는 사례를 제시하여 용기와 격려를 주고 있다.
본문에서 '약속하실 때'로 번역된 '에팡게일라메노스'(epanggeillamenos)의 원형 '에팡겔로'(epanggello)는 '공언하다', '약속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인간의 약속과 제의는 물론(2베드2,19; 마르14,4)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쓰였다(로마4,21).
저자는 본절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근본으로 삼아 생활했던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창세12,1-7;17,5-6;18,18; 22,16-18), 히브리서 저자가 염두에 둔 것(히브6,14)은 창세기 22장 16-18절의 내용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주실 때에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심으로써, 이것이 확실하고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임을 보증하여 주셨던 것이다.
'맹세하시면서'로 번역된 '오모센'(omosen)의 원형 '옴뉘오'(omnio)는 원래 성전의 뿔이나 제단과 같은 거룩한 대상들을 '굳게 잡다'라는 뜻을 나타내었으나 후에 '맹세하다'는 의미로 발전되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은총의 맹세로서 그 효력이 끝없이 미친다. 절대로 변함이 없는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은 모두 축복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육적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말하며(갈라4,7),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축복을 이어받는다.
한편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담보로 하여(카타; kata ; by) 맹세의 약속을 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담보로 내어놓으신 당신 자신은 얼마나 믿을 만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아니시므로 식언하지 않으시고(민수23,19) 거짓말하지 않으시며(히브6,18) 변함이 없으실(야고1,17) 정도로 믿을 만하다. 이보다 더 믿을 만한 맹세의 담보는 없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담보로 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는 것은 그 약속이 천지가 진동하더라도 지켜질 것임을 말한다.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정녕코'로 번역된 '에이 멘'(ei men)은 '참으로', '확실히', '틀림없이'라는 뜻으로 서약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틀림없이 어떤 것을 이루어주시겠다고 맹세로 약속하셨는데,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22장 17절을 70인역(LXX)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신구약 성경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는 그분의 이 약속이 이사악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갈라3,16; 4,26.28 ;사도3,25).
한편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너를 복 주고 복 주며)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동사 구문법에서 강조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틀림없이 복을 줄 것이다' 란 의미가 된다. 영어로 하면, 'I will surely bless you,and I will surely multiply you.' 이다.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로 번역된 '플레튀논 플레튀노'(pllethynon pllethyno)에서 본문에 두 번 쓰인 동사의 원형 '플레튀노'(pllethyno)는 '가득 참'(fullness)을 의미하는 '플레튀스'(pllethy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가득하게 하다', '번성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번성하게 하신다는 약속은 본래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창세22,17)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2인칭 단수 대명사 '쎄'(se), 즉 '너'(you)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나타내는 비유법적 표현(제유법;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또는 한 말로 그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은 이사악이나 이스라엘 시대에 성취되지 않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신약 시대의 교회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갈라3,9).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로 번역된 '마크로튀메사스'(makrothymesas)는 '마크로튀메오'(makrothymeo)의 과거분사이며, '마크로튀메오'는 '인내하다', '오래참아 기다리다'는 뜻이다. 이 단어속에는 '질긴 기질'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마크로튀메오'는 '(무엇을) 묵묵히 기다리고자 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끝에'에 해당하는 '후토스'(hutos)는 '이같이'(so)라는 뜻을 강조의 의미로 쓰인것 같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이 당장 성취되지 않는다 하여도 체념하지 않고, 믿음으로 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으므로, 하느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에서 '받았습니다'로 번역된 '에페튀켄'(epetychen)은, '얻다','도달하다'를 뜻하는 '에피튕카노'(epitingchano)의 부정 과거로서 결과를 나타낸다.
물론 아브라함이 사는 날 동안에 그 약속의 성취가 있었지만, 그 기간에는 매우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가 죽어서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동안, 이 약속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통해 더 많은 성취를 맛보고 있다.
그의 약속은 점점 더 충만하게 성취되었는데, 메시아의 강생과 그의 영적 후손의 번성이 그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참된 것이었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충실했으므로 이같은 놀라운 일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하느님의 약속은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법이 없다.
그분은 언제나 성실하시며(2티모2,13), 변함이 없으시므로(야코1,17) 그분의 입으로 내신 모든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된다(이사55,10-11).
설사 그 약속의 대상인 인간의 성실성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주님의 약속이 무효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안식일은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의 갈등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주간의 축제로 여겼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있는 것처럼 매주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며 일상의 일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감사를 드리는 하루의 축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똑같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한 주간의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지키던 수많은 율법 가운데 1/3 정도가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독실한 유다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사이들이 규정의 문구에만 집착하는 것을 비판하며 율법의 본래 정신과 의미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물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세상 창조의 모든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창조된 모든 것을 보존하고 보살피도록 맡기셨고(창세 1,28 참조), 사람은 그 창조 업적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사람도 피조물이면서 유한한 존재로 휴식과 회복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객이 뒤바뀌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일수록 본래의 의미를 찾고 되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을 다하여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열심이 주시는 안식
(마르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 길을 내고 가면서? -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길은 하느님께 가는 길, 곧 구원의 길을 뜻한다. 농사는 아버지께서 지으시고 자녀인 우리는 먹는다. 그러니까 그 밀밭의 밀(씨)을 먹는 것이 안식의 길이다.
우리의 밀(씨-후손) 양식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 그분의 죽음으로 얻는 용서와 안식인 것이다. 그 길을, 제자들이 내고 갔던 것이다. 구원의 길, 안식의 길을 냈던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이 28절에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을 아는 것, 곧 예수님의 대속으로 누리는 안식의 삶,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제 묵상했던 율법에 묶인 그들은 절대 누리지 못하는 안식이다. 법으로 정한 그 안식일은 안식을 주지 못한다. 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위한 신앙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많은, 법을 잘 키는 신앙이 되어 버렸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 인간의 지혜로 신앙을 살면 오히려 하느님의 일을 적대하게 된다. 하느님의 이름(뜻)을 위한 신앙이 아닌 자신의 이름(뜻)을 위한 신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2티모4,3-4)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뜻)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십자가)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오늘 독서(히브6,10)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뜻)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독서 (히브6,17-20)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 약속 하신 것, 복(바라크- 하느님의 생명력),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하느님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것이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 앞에 놓인 희망, 앞으로 받게 될 하늘의 복, 생명이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 ‘휘장 안’은 ‘지성소’로 ‘하느님의 나라’를 뜻한다. 그런데 그 지성소, 하느님 나라는 그 휘장이 찢어져야 들어갈 수 있다. 찢어지는 그 휘장이 예수님의 몸을 뜻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히브10,19-20)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 영원한 대사제의 죽음으로 얻는 영원한 안식이다. 영원은 하늘의 시간이다. 그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한 안식일, 법으로 지키는 주일은 하늘의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세1,31. 2,1-2) 1,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하느님께서 첫날-빛, 이튿날-물, 사흗날-씨(양식)를, 나흗날-해 달 별, 닷샛날-온갖 생물들을 만드시고 마지막 엿샛날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렇게 6일에 창조를 완성 하시고 쉬셨는데, 그것이 이렛날 곧 쉼, 안식 7(쉐바-안식)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완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바로 안식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창조 6일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열심, 사랑, 자비가 하신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 갖는 것이 안식(7), 쉼인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뜻, 안식의 길을 뱀의 유혹으로 잃어 버렸다. 그래서 그 뱀의 유혹대로 인간 스스로 그 안식의 길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바벨탑을 하늘까지 쌓으려 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죄악의 탑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그대로 두면 영원히 뱀의 자식이 될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그들의 모든 것을 흩어 버리셨다.(창세11,1-9)
그 인간들의 죗 성이 역사를 따라 흘러 오늘날에 이르렀다. 여전히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을 위해 스스로 열심을 부리는 자신을 위한 신앙, 그 가파르나움을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피조물)이 하느님(창조주)의 자리에 앉은, 그 교만의 죄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늘 길이 막혀 모두가 영원한 죽음(지옥)의 나라로 가야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 죄인들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구원자로, 우리의 속죄 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하늘 길을 막았던 그 휘장을 찢으시고 하늘 길을 여신 것이다.
(마르15,37-38)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 영원한 안식의 하늘 길이 열린 것이다. 그 하느님의 사랑, 자비를 모르고 어떻게 안식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지키는 안식일, 그 주일 지킴으로는 절대 누리지 못하는 안식이다.
☨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아멘!!!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27~28)
마르코 복음 2장 27절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라는 구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이나 루카 복음 6장 1~5절에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가 전승된 내용들 중에 간과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구절의 메시지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관한 39개 세부 조항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단죄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오히려 사람들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또한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호스테'(hoste; therefore)도 병행구절에는 없고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단어인데, 앞문장과 뒷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문장을 받기보다는 안식일에 대한 전체의 논쟁을 결론짓기 위해 도입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리사이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안식일이 왜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고,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단죄와 억압, 죄의식의 굴레만을 덧씌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분명한 의미와 안식을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셨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표현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 2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의 권한이 있으시고(10절),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17절), 혼인 잔치 집의 신랑(19절)이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28절)까지 되시는 분으로서 나온다.
즉 이 네 편의 논쟁은 모두 예수님의 신적(神的)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위적 규범을 근거로 제시하며,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도전에 대해 바리사이들이 반론을 펴지 못할 정도로 각각의 명쾌한 답변들을 일일이 제시하였다(10,17.22.28절).
그런데 그 답변들을 살펴보면, 어떤 분야에 대한 질문이든지 하나의 공통된 관점들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답변자이시고 논쟁을 일으킨 행위의 중심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예수님은 바로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10절)이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17절)이시며, '새 포도주, 즉 새로운 질서로서의 복음을 가져오신 분'(22절)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28절)이시라는 것이다.
2025년 01월 21일 화요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아녜스 기념일)(김동희 모세 신부)
“풍요로운 우정으로 꽃피우는 하느님 사랑과 만남으로써, 또는 그 사랑과 새롭게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고립감과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8항을 열쇠 삼아 오늘 복음의 문을 열어 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급히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에 복음을 전하시러 가시는 길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크게 아프다는 전갈을 받으시고 서둘러 그를 찾아가시는 길일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던 중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호호 불어 먹기 시작합니다.
볕에 익어 가는 밀 내음과 밀 이삭을 흔드는 산들바람! 간단하고 조촐하지만 주님이신 예수님 곁에서 이루어지는 근사한 안식일 식사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사실 구약의 율법은 매정한 법이 아닙니다.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19-20).
따스함이 묻어 있는 법입니다.
안식일 법도 일을 금하는 법이기에 앞서 돌봄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완고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자아도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안식일을 누려보면 어떨까요.
(김동희 모세 신부)

2025년 01월 21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다.
복음(마르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 안식일에 ‘새로운 길을 내고 갔음’이다. 곧 율법의 행위(行爲)의 안식일 지킴이 아니라, ‘밀 이삭을 먹어야 참 안식(安息)을 누리는 그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내고 갔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밀 이삭, 생명의 밀 빵’(양식-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 새로운 길, 곧 율법(옛 계약)을 대속으로 다 완성하시고 거저 은총, 은혜로 하늘의 용서, 의(義), 자유, 쉼, 안식을 주시는 새 계약의 그리스도를 모르니 ‘율법의 안식일 지킴’을 고집하는 모습이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사람에게 쉼, 안식을 주는, 사람을 위한 안식일의 의미는 모르면서 안식일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 전례로 지키는 그 ‘행위의 안식일’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안식(安息)은 모든 인간이 기지고 있는 죄가 해결이 될 때 비로소 자유, 쉼. 그 안식을 누리게 된다. 하늘의 대속, 그 새 계약으로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 새 계약의 새로운 길을 모르면, 현세의 내 십자가를 열심히 지려고 애쓰다가 내 죄를 대속 하시고 하늘의 용서, 자유, 참 안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 십자가로 질 줄 몰라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된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 안식일은 열심히 지키면서 정작 안식(安息)은 모른다. 즉 제사는 열심히 지키면서 정작 제사를 대속으로 완성하시고 주시는 하늘의 용서, 쉼. 안식(安息)인 그리스도는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식(安息)인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는 안식일이 아닌, 자신의 뜻, 의를 위해 교리로 지키기에 급급할 뿐인 신앙을 산다.
주일에 육신의 뜻, 만족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으로만 먹을 줄 알지, 그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기억도 하지 않겠다.”하신(예레31,31~ 히브10,15~) 그 하느님의 약속인 새 계약의 그 ‘새로운 길의 말씀’으로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새로운 길을 가는 이들을 박해(迫害)한다. 제사와 윤리로 흠 없이 의롭게 살았던 사울이 그랬다.
(사도9,1-2)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새 계약의 새로운 길’인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필립3,6-9)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제사와 윤리)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대속, 그 새 계약으로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이 사라져 그리스도로 영원히 완전한 의, 거룩이 된다.(히브10,9-14) 하느님께서 내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 하시니 영원한 자유, 쉼, 안식이다. 매일을 안식일(安息日)로 산다. 성령의 귀로 듣지 않으면 어찌 알아 듣겠는가, 믿겠는가?......
*오늘 전례에서~‘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 ‘다른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성공회, 개신교들을 뜻한다.곧 각자의 교리를 떠나 ‘새로운 길’인 새 계약의 그리스도를 주인, 주님으로 믿는, 천주교인, 개신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1코린3,4-7)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보호자 성령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새로운 길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길에서 애쓰며 헤매고있는 이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그래서 새로운 길을 내주신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살을 살게 하시고, 그것이 구원의 완성, 안식임을 깨닫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