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04일 화요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탈리타 쿰!” (마르5,21-43)
제1독서<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12,1-4)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화답송>시편22,26ㄴ-27.28과30ㄱㄴ.30ㄷ-32(◎27ㄴ) ◎ 주님 찾는 이들은 그분을 찬양하리라.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앞에서 나의 서원 채우리라. 가난한 이들은 배불리 먹고, 주님 찾는 이들은 그분을 찬양하리라. 너희 마음 길이 살리라! ◎
○ 온 세상 땅끝마다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 만 민족 모든 가문 그분 앞에 경배하리니, 세상 모든 권세가들 그분께만 경배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모든 이들 그분께 무릎 꿇으리라. ◎
○ 내 영혼 주님 위해 살고, 후손은 그분을 섬기리라. 다가올 세대에게 주님 이야기 전해져, 태어날 백성에게 그 의로움 알리리라. 주님이 이렇게 하셨음이로다. ◎
복음<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5,21-43)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히브12,1-4)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1)
히브리서 12장 1~3절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달리는 신앙의 경주에 대해 말하고, 12장 4~13절은 훈육의 의의와 유익 그리고 훈육받는 성도의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본문을 좀 더 정확하게 직역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렇게 많은 증인들의 구름을 가지고 있다'가 된다.
신약의 성도들은 시련가운데서 믿음의 경주를 하지만, 수천 수만의 옛 선조들로 이루어진 관중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 이미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며, 또한 천국에서 응원하고 격려해 주는 후원자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이렇게 많은'으로 번역된 '토수톤'(tosuton)은 '이렇게 많은', '큰'을 뜻하며 '구름처럼'으로 번역된 '네포스'(nephos)를 수식한다.
새 성경에서 부사적 의미로 번역된 '네포스'는 명사 목적격 단수로서 '구름을' 이라는 의미이다.
'네포스'는 단 하나의 구름을 의미하는 '네펠레'(nephelle)와 달리 온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우는 구름(밀운)을 가리킨다.
'증인들의 구름'은 경주가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꽉 들어찬 관중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며, 그들은 신앙의 경주를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여기서 '증인들'로 번역된 '마르튀론'(martyron)은 원형 '마르튀스'(martys)의 소유격 복수이며, '마르튀스'는 '증거', '증인' 그리고 '순교', '순교자'라는 뜻을 나타낸다.
'순교',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rtyr'가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순교자'란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마르튀스'(martys)가 전달하는 '증인'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물론이고 오늘의 세상에서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증인들은 종종 고통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두운 세상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미워하게 마련인데, 그것은 성도들이 바로 그 빛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요한15,18~20).
따라서 세상은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이고, 그 증거를 히브리서 11장 34~37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의 옛 선조들이 당한 세상의 핍박과 환난을 생각하면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서 싸움에 임해야 한다.
그들이 참아낸 것은 우리도 참아낼 수 있고, 그들이 극복한 문제들을 우리들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들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이 달리고 있는 경기장의 관중석에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며, 이미 자신들이 경주한 그 코스를 달리고 있는 우리를 향해 격려와 조언, 응원을 보내주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경기장에서 경주를 하는 선수들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신앙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도 신앙 생활에 방해되고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벗어버려야 할 것을 권면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벗어 버리고'로 번역된 '아포테메노이'(apothemenoi)의 원형 '아포티테미'(apotithemi)는 분리, 이탈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apo)와 '두다', '놓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티테미'(tithemi)의 합성어로서 '낡은 옷을 벗어버리다' 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포테메노이'는 요청적 명령을 나타내는 분사형이므로, 이것은 '벗어버리자', '던져 버리자'등의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는 운동 경기가 매우 성행하였고,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자들은 옷을 다 벗고 달렸다.
오늘날 학교 체육관을 의미하는 단어 'gymnasium'은 원래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운동 선수들의 옷을 다 벗은 모습을 나타냈던 단어 '귐노스'(gymnos)에서 유래하였다. 그래서 당시 경기장에는 여자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아무튼 남보다 더 빠르려면 입는 옷의 무게를 가능한 줄여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한편 벗어버려야 할 것이 본절에서 두 가지로 지적되고 있다.
첫째는 '온갖 짐'이다.
'짐'으로 번역된 '옹콘'(ongkon)의 원형 '옹코스'(ongkos)는 '짐', '방해물', '부피가 있는 덩어리', '무거운 것'등을 뜻한다.
짊어지고 있는 짐이 많을수록 빨리 달리기란 더 어렵다. 앞을 막는 장애물이 많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신앙 경주를 잘하고자 하는 성도는 모든 방해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옹코스'(ongkos)를 경주자가 몸에 걸치면 배의 돛처럼 바람을 끌어 모아 속력을 내는 데 지장을 줄 뿐 아니라 경주자를 쉽게 지치도록 만드는 겉옷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경주자의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체중으로 보기도 한다.
어떻든 신앙의 경주를 하는 성도가 빨리 벗어버려야 할 '옹코스'에는 의심이라든지, 교만, 나태 등이 포함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신실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전진하고 진보하는 신앙인이 될 수 없다.
또한 교만의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말씀을 통해 이루어야 할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이루지 못한다.
또한 나태의 장애물을 치워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그 신앙의 활력을 잃게 되며 침체에 빠지고 결국 퇴보하게 된다.
신앙의 경주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히 제거해 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썩어가는 부위나 암세포를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것처럼, 신앙의 달리기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단호히 제거하지 않으면 얼마가지 않아 주저앉을 수 밖에 없다(마태5,29.30).
둘째는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이다.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으로 번역된 '유페리스타톤'(euperistaton)은 '잘', '좋게'를 뜻하는 부사 '유'(eu)와 '주위에 놓다'를 뜻하는 동사 '페리이스테미'(periist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유혹하는'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란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죄'를 말한다.
그리고 본절의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안'(hamartian)은 '죄'로 일컬어지는 일체의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쉽사리 함정에 빠뜨리는 것'으로 한정된다.
형용사인 '유페리스타톤'이 관사 '텐'(ten)을 취하여 한정적인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죄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형태의 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죄를 '불신앙'으로 보기도 한다. 믿음의 반대인 불신앙은 신속하게 우리의 발을 휘감는 것이 사실이다. 신학적으로도 이것이 모든 죄의 기초이다(요한16,2~9).
밤중에 밀림에서 모닥불 주위를 배회하는 야수의 무리가 경계심을 늦추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들려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알아들을 수 있겠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이 죄가 항상 우리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것들은 지체없이 벗어버려야 한다.
의심이라든지 교만, 게으름 같은 장애물들 신속히 벗어버리고, 불신앙의 요소들을 부단히 경계하여 우리의 발목을 못잡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늘 우리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던 부인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액자처럼 구성된 두 이야기는 모두 믿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하며 소개되는 인물은 ‘야이로’라고 불리는 회당장입니다.
야이로는 히브리 말로 ‘빛을 주신다.’ 또는 ‘빛을 밝혀 주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민수 32,41 참조).
그의 이름은 오늘 복음에서 매우 상징적인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으로 이미 죽은 회당장의 딸을 되살려 주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 말씀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죽음도 넘어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도 치유를 넘어 믿음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그에게 병이 낫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두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온갖 노력을 하였지만 병을 고치지 못하고 더 나빠졌습니다.
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던 회당장의 딸은 결국 죽습니다.
모두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지지 않는 여인과 결국 죽음에 이른 회당장의 딸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절망의 모습들입니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야이로의 이름처럼 예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굳건한 믿음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복음(마르5,21~43)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27~28)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곱한 수로서완전을 상징한다.
마르코 복음 5장 25절에서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혈루증)을 앓았다는 것은 그 여자가 길고 긴 세월 동안 고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고칠 수 없었던 여자의 병을 자신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게 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강조하는 역할도 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잘못된 진단과 비과학적인 진료, 또한 터무니없는 비싼 치료비의 요구 등으로 말미암아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주는 경우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 5장 26절에서 여자의 지병이 완전히 인간적 치유의 불능 상태에 빠져 있음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드러내고 있다.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여기서 여자가 예수님 뒤로 올 수 밖에 었없던 이유는,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해 여자가 남자에게, 더구나 남자의 신체를 접촉하기 위해 접근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고, 정결법상 부정한 것으로 여겨진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대중 앞에 나와서는 안되었으며,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절대로 안되었다(레위15,19~27).
따라서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자신의 신분과 상태를 숨기기 위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용한 것이다. 하혈병을 앓는 여자는 자신이 받는 종교 율법적이고 사회적인 제약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오히려 군중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뒤로 몰래 접근했다.
육체적, 종교 율법적, 사회적, 경제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구원의 희망이 전혀 없는 극한적 상황에 있었던 그 여자는 그 누구로부터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처지에 있었지만, 스스로는 사람들을 민감하게 의식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마태오와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사용한 '옷'이라고 번역된 '히마티온'(himation; garment; cloak)이라는 표현에 '투 크라스페두' (tou kraspedu)라는 표현을 부가해서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마태9,20; 루카8,44).
한글 새 성경에서 마태오나 루카는 '옷자락 술'(the fringe of His cloak) 이라고 번역했다.
또한 '대었다'에 해당하는 '헵사토'(hepsato; and touched)는 부정 과거형이므로,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 한 번만 스치듯이 옷자락 술을 만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여자의 하혈병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마르5,28) 여자의 믿음과 그 여자를 불쌍하게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고쳐졌다고 할 수 있다(마르5,34).
마르코 복음 3장 9~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이 낫기 위해 당신을 만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피해 말씀을 전하기 위해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하신다.
이처럼 수많은 병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지만, 마르코 복음 5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의 옷자락 술을 만진 자'를 찾으신다.
따라서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은 여자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이라도 만져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간절하고도 굳은 신뢰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자 (구세주)라는 신실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사도5,15; 19,12참조).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재덕 베드로)
모든 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들의 행동을 저마다 다른 단어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군중의 손길에는 ‘밀쳐 대다’는 표현을 쓴 반면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이 있던 하혈하는 여인의 손길에는 ‘손을 대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기적은 아니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인의 믿음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한편 딸이 죽어 있는 회당장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웃는 사람들이 아닌, 믿음을 가진 이들 앞에서 회당장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십니다.
“탈리타 쿰!”
믿음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믿음이 담긴 기도는 하혈하던 여인의 손처럼 예수님께 손을 대어 구원을 체험하게 하여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믿음이 담긴 기도의 손길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회당장 딸의 손을 붙잡아 죽음에서 일으켜 주신 것처럼, 우리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기도는 예수님을 밀쳐 대던 군중의 손길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마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던 사람들처럼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웃음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오늘 하루는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에 ‘믿음’을 실었으면 좋겠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재덕 베드로 신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르5,21-4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6ㄴ)
여기서 '두려워'에 해당하는 '포부'(phobou; afraid)의 원형은 '포베오'(phobeo)로서 마르코 복음 5장 33절에서 하혈병에 걸렸던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면서 가졌던 마음인 '두려워 떨며'에 해당하는 '포베테시아'(phobetheisa; in fear; fearing)의 원형과 같다.
한글 새 성경은 모두 '두려워하다'로 번역했지만,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서로 다른 단어로 번역했다.
하혈병을 치유받은 여자가 예수님께 가졌던 마음은 '두려움'(fearing)이었고, 예수님께서 꿰뚫어 본 회당장과 그와 관련된 무리들이 갖고 있는 마음은 '염려'(afraid)였다.
그러니까 전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갖는 '신적(神的) 경외심'을 표현했고, 후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딸을 살릴 수 없다는 '인간적인 염려'를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병행 구절을 보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내용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태9,18~26; 루카8,40~56).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일이 하혈병 여자의 치유 사건으로 인해 지체되고, 결국 예수님께서 그 집에 계시지 않음으로써 회당장의 딸이 죽어갔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과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확고한 가능성으로 '믿음'의 신학을 전개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신학적 귀결점이며 동시에 모든 인생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다인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장례식 때에는 죽은 자를 위해 우는 두 명의 여인과 한 사람의 피리 부는 자를 고용하는 것이 상례였다(2역대35,25참조).
특히 직업적으로 우는 여인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바닥을 마주 치거나 가슴이나 땅바닥을 치면서 큰 소리로 울어댔다.
마르코 복음 5장 38절의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의 '탄식'에 해당하는 '알랄라존타스'(alalazontas; wailing)는 '꽹가리를 울려대듯 시끄럽게'라는 뜻이다.
회당장의 집안은 딸의 죽음을 애도하는 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한쪽에서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피리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가족의 통곡 소리와 사회적으로 유지에 해당하는 회당장 야이로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이웃과 친척 등 조객들의 웅성거림으로 말미암아 시장터를 방불케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곳으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죽은 자도 살리시는 당신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 5장 39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표현에 대해서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 구약의 완곡어법(창세47,30; 신명31,6)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구약의 완곡어법은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에 해당하는 '우크 아페타넨 알라 카튜데이'(ouk apethanen alla katheudei; is not dead but asleep)는 신성(神性)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바라보시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죽음이란 인간만의 용어일 뿐이며, 하느님께는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마르12,27).
따라서 실제로 그 소녀가 죽은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자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신랑이 되어 찿아오신 예수님과 한 몸이 되셨나요?.
(마르5,21-43)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 25절에서 34절까지는 하혈하던 여자 치유말씀입니다.
오늘은 열두 해의 질병과 같은 의미의 열두 살의 죽음을 묵상해 봅니다.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 사람들은 죽었다. 하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 제자 셋만 들어갑니다. 셋-3 하늘의 숫자입니다.
사람들이 죽었다 하는 그 죽음이 있는 곳에 하늘이 들어갑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들어가 다시 살리려는 모습입니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ㄱ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습니다. 말씀을 생명, 빛으로 깨닫지 못하면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1,5) 5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으켜야할 잠입니다. 말씀, 성경을 사람의 눈과 귀가 아닌 하느님의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면~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말씀을 믿고 의탁할 수 있습니다.
40ㄴ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 탈리타-어린 암양-소녀는 애칭. 쿰-서다.
<쿰☞ 코프+멤> 코프 - 파괴하고 다시 세우다. 멤- 물, 말씀을 뜻합니다.
‘일어나라’ 그 말씀 안에 ‘말씀으로 파괴하여 다시 세우다, 살리다.’ 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파괴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요한3,3.5) 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5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하늘, 그 주님의 말씀(물)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하늘을 사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 모두 하늘의 말씀을 뜻합니다. (요한7,39참조)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린 여자가(27절) 예수님의 옷, 곧 진리의 말씀(옷)을 마지자(하나가 되자) 곧 피가 멈춥니다.
밖으로 흘려진 피, 생명이~ 그분의 옷, 말씀으로 멈추고 그 말씀으로 다시 살아난 것,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 입니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 소녀의 나이를 왜 소개할까요? 열둘(12)은 완성된 교회의 숫자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과 혼인할 나이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신부가 하늘의 물- 말씀(예수)이 아닌 땅의 물, 사람의 말(법)과 짝해 죽었기에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부(교회-나)를 다시 살려내심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가 말씀으로 일어나야 할, ‘ 죽어있는 신부임을 깨달아라.’ 하심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먹을 것- 사람의 말, 그 양식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 그 양식을 먹여라~입니다.
사람의 양식, 죽음이 끝인 도덕과 윤리 그 법(물)이 아닌, 다시 일어나(쿰) 주님과 짝해 한 몸이 된 신부로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진리(물)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주어라~~입니다.
(로마8,5-6) 5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6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 아멘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