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화요일] 바리사이들의 누룩 (마르8,14-21)

2025. 2. 15. 오후 1: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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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8일 화요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바리사이들의 누룩 (마르8,14-21)


   


1독서<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창세6,5-8; 7,1-5.10)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7,1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2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3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

4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 내가 만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

5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10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

 

<화답>송시편29,1ㄱ과 2.3ㄱㄷ과 4.3ㄴ과 9-10(11)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하느님의 아들들아, 주님께 드려라. 그 이름의 영광 주님께 드려라. 거룩한 차림으로 주님께 경배하여라.

주님의 소리 물 위에 머무네. 주님이 넓은 물 위에 계시네. 주님의 소리는 힘차고, 주님의 소리는 장엄도 하네.

영광의 하느님 천둥 치시네. 그분의 성전에서 모두 외치네. “영광이여!” 주님이 큰 물 위에 앉아 계시네. 주님이 영원한 임금으로 앉으셨네.

 

복음<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8,14-21)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창세6,5~8; 7,1~5.10)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5~6)

 

창세기 6장 5절의 '보시고'에 해당하는 '와야르'(wayar)에서 '보다'에 해당하는 '라아'(rah)는 '조사하다', '주목하다', '진단하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께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보셨음을 뜻한다.

 

창세기 6장 5절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창조 때에 사용된 문장과 대조를 이룬다. 

창조 때의 하느님의 시선에는 기쁨과 만족, 충만감이 있었는데, 지금 여기서 비추어지는 주 하느님의 시선에는 의노와 아픔이 서려 있다.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사람들 앞에서는 감출 수 있으나, 눈동자처럼 이 세상을 살피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예레17,10).

 

여기서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에 해당하는 '랍바 라아트'(rabah raath)에서 '라아트'(raath)는 '라아'(raah)의 연계형으로서 '깨트리다', '악하게 되다'는 뜻을 지닌 '라아'(raah)에서 유래하여 외형적 범죄라는 범위를 넘어 '해로움', '불행', '슬픔'을 가져다 주는 모든 '잘못된 것', '나쁜 것', '사악한 것'등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세상에 많아지고'로 번역된 '랍바'(rabah)는 '라브'(rab)의 여성 형용사이다.

 

이것은 창세기 6장 1절에서 '늘어나다', '번성하다'로 번역된 '라바브'(rabab)에서 유래한 말로 '풍성한', '큰', '넓은', '강대한', '범람한'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닌다.

 

이것을 볼 때 노아 홍수 이전의 세상에는 하느님의 심판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외부적인 범죄와 부조리만이 아니라 각 개인의 심성 안에 온갖 악함이 흘러 넘치는 등 사회가 온통 부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히브리어로 '마음'(heart)을 가리키는 용어는 여기 나오는 '레브'(leb)와  '레바브'(lebab)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여기에 처음 등장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마음은 지, 정, 의(知情意)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이며, 감정의 자리이기도 하고(탈출4,14;  판관16,25), 양심과 도덕의 자리로 간주되기도 한다(욥기27,6; 2사무24,10). 

따라서 마음은 인간 자신을 대표하기도 하며(잠언4,4), 모든 사고, 욕망, 말과 행동의 원천으로 간주된다(창세20,5; 잠언17,9).

 

그런데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이 오염되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 역시 오염되었고, 말이나 행동도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마하샤바'(mahashabah)는 '숙고', '책략', '계교' 등의 뜻이 있으며, '뜻'에 해당하는 '예체르'(yatser)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들거나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모양으로 만들다', '꼴을 이루다'에 해당하는 '야차르' (yatsar)에서 나온 단어로서 심사숙고하여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노아 시대 사람들은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뿐만 아니라, 세밀하게 뜻을 세워서 악한 일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모든'에 해당하는 '콜'(kol)은 뒤이어 나오는 '언제나'와 동일한 단어로서 모든 개체 전부와 모든 시간 전부를 가리킨다.

 

이것을 볼 때,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래 원죄(原罪)아래 있는 모든 인간 전체가 예외없이 타락 가운데 있으며, 아담의 타락한 인간성과 원죄성이 계속됨을 지적한다.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원래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대표하는 단어가 '창조하다' 해당하는 '빠라'(bara)이다. 

이 단어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형상과 산물에는 결코 쓰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표현할 때만 쓰인다.

 

이 단어는 '만들다'에 해당하는 '아사'(asah)와 '짓다'에 해당하는 '야차르'(yatsar) 동사를 동반하기도 한다(창세1,26; 2,7).

 

비록 인간 창조의 장엄성과 하느님의 개입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단어가 '빠라'(bara)였지만(창세1,27), 본래 인간 창조의 의도를 얘기하실 때에는 '아사'(asah)가 쓰였다(창세1,26).

 

창세기 6장 6절에서 '빠라'(bara)가 쓰이지 않고, '아사'(asah)가 쓰인 것은 인간 창조의 과정이나 결과보다는 인간을 창조하시기로 의도하셨던 하느님의 마음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따라 만들 것을 의도하고 창조했던 인간이 하느님께서 만드셨던 그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제 마음대로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 '아사'(asah)가 쓰인 것이다(에페2,10참조).

 

여기서 '후회하시며' 해당하는 '와인나헴'(wainnahem; was grieved; it repented)은 '나함'(naham)의 단순 재귀형으로서 '뉘우치다', '후회하다', '슬퍼하다', '애도하다' 등의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스스로 후회하셨다거나 슬퍼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미리 다 아실 뿐 아니라, 당신의 뜻에 따라 행하신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실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소중한 피조물인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벌받아 멸망할 수 밖에 없게 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인간이 이해하기 쉽도록 인간적인 측면에서 묘사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연중 제6주간 화요일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창세기 저자가 아담의 후손들(5장 참조가운데에서 특별히 주목한 사람은 두 명곧 에녹과 노아입니다.

에녹은 이 족보의 인물들 가운데에서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 평가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설명할 때 창세기 저자가 쓴 “-가 살았다.”라는 표현 대신에 에녹을 위해서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창세 5,24 직역)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입니다.

또 에녹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쓰였던 “(살다가죽었다.라는 표현 대신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5,24)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에녹과 노아의 연관성입니다.

학자들은 에녹이라는 이름에서 노아라는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노아(nôaḥ)의 이름에서 자음을 거꾸로 배치하면 에녹(hanôkh)에 가까워집니다.

창세기 저자는 노아를 의롭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에녹의 경우처럼 노아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6,9 참조)고 묘사합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홍수를 피하고 죽음을 건너갔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저자는 에녹과 노아를 소개하며 하느님의 길 위에서 걸어간 사람들은 죽음을 알지 못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노아를 눈여겨보신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그들 마음의 생각을 따라 살며 세상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들고 있을 때

노아만은 하느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의 건설과그 다음에 할 일을 지시하시는 두 번의 말씀은 무척 깁니다(6,12-21; 7,1-13 참조).

이것은 마치 홍수가 하느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폭력과 악으로 세상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정반대로 방주는 아주 잘 지어진 또 다른 세상입니다.

방주는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의인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시작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또한 의로운 목자의 지도 아래 세상을 새롭게 하고 이어지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장소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노아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갈 꿈을 접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에녹과 노아처럼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는 우리의 작은 방주를 지으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 )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마르8,14~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15)

 

마르코 복음 8장 15절의 두 동사는 모두 현재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명령임을 드러낸다.

 

'너희는 주의하여라'에 해당하는 '호라테'(horate; take heed; be careful)의 원형 '호라오'(horao)는 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고 실체를 알고서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그리고 '조심하여라'에 해당하는 '블레페테'(blepete; beware; watch out)의 원형 '블레포'(blepo) 역시 사물이나 현상을 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통찰하는 것과 어떤 것에 유의하고 조심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한 문장에서 동일하게 비슷한 뜻의 동사가 함께 연속해서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자세히 살피고 주의해야 할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누룩'에 해당하는 '쥐메스'(zymes; leaven)의 원형 '쥐메'(zyme)는 밀가루 반죽에 넣어 부풀어 오르게 하는 '효모'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침투성과 영향력이 강한 악(惡)의 상징적, 비유적 매개체로 성경에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누룩'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타인에게 강하게 미칠 수 있는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사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분명한 표징을 보아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불신과 악의를 가지고 있었고, 형식주의에서 비롯한 그들의 독선과 위선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데는 그를 추종하는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성향에서 비롯되는 불경건과 불신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께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6장 11절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 으로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사이에 '사두가이들' '헤로데'라는 차이가 있다.

 

사두가이들 천사, 영적 존재와 영적 세계 그리고 부활을 부정하는 등 비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이며, 성전 중심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헤로데 당원들도 역시 정치적이며 불경건하고 비신앙적인 삶을 사는 세속주의자, 현세주의자들이므로, 두 집단이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바리사이, 사두가이, 헤로데 모두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 마태오 복음사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강조하여 기록했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헤로데를 강조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20250218일 화요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누룩은 지금은 매우 작고 감추어져 있지만 나중에 큰 효과를 내는 어떤 것의 비유입니다.

작은 밀가루 반죽 속에 숨어 그 반죽을 서서히 부풀려 커다란 빵을 만드는 효모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그들이 각각 대표하는 악, 곧 위선과 교만, 권력욕과 포악함 등으로, 그것들이 제자들 안에도 감추어 있지는 않는지 살피도록 경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외적인 차원에서만 빵을 이야기합니다.

배 안에 빵이 하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걱정에 붙들려서 누룩의 의미도, 조금 전에 목격한 사건 곧 예수님께서 수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의 의미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여전히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설명하시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하십니다.

영성 생활에서는 일어난 일의 외적이고 일차적인 뜻보다는 숨은 의미, 영적인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빵 하나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신 분을 배 안에 모시고 있었으니까요.

노아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만큼 죄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던 세대의 누룩이었습니다.

우리도 저마다 또는 공동체로서 가끔 불의와 악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우리 세대의 누룩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안에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이 감추어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없애 버려야 합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이미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지녔으면서도아직 땅에서 기는 신앙인들

 

복음(마르8,13-22)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 달마누타(과부) 지방에 있는 그들이다. 그 과부의 삶을 고집하는 이들을 떠나신 것이다.(어제 묵상참조)

땅(현세)의 것을 위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열심히 지킨 옛 계약, 그 율법(제사와 윤리)으로는 죄의 심판을 받을 수 없어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곧 그 율법을 대속하시고 용서, 생명을 주시는 그 새 계약의 예수님께서 남편(신랑)으로 찾아오셨는데 시험, 논쟁까지 해가며 다른 신랑(표징)을 청했기에 떠나신 것이다.

먼저 앞1절 이하의 표징을 복습(復習)하자(토요묵상 참조) - 7개의 빵으로 4,000명을 먹이신 표징(標徵)이다. 7은 안식을 뜻하며, 그 안식은 율법, 그 옛 계약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 그 이타의 사랑으로 완성하시고 용서, 의, 구원을 주시는 그 새 계약으로 얻는 것이라 했다.

 

(마르2,28)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에페5,23)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 그 예수님을 거부(적대)했기에 떠나신 것이다.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 배(교회) 안에는 빵이 ‘한 개’ 밖에 없어야한다. 곧 ‘교회의 머리, 주인이신 새 계약의 그리스도’ 그 한분만이 생명의 빵, 구원의 말씀이신 것이다.

 

(마태8,8)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코린8,6) 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 바리사이(율법학자)와 헤로데(세상과 섞인 임금)는 ‘율법을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로움으로 존재(存在)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을 ‘조심하라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 새 계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그 한 분만으로 존재 한다는 것을 적대(敵對)한다.

 

(로마3,19) 19 우리가 알다시피율법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그래서 모든 입은 다물어지고 온 세상은 하느님 앞에 유죄임이 드러납니다.

= 온 세상(世上)과 타 종교(宗敎), 모두 율법(律法)신앙(信仰)인 것이다.

 

(로마3,20-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그들(구원이 없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깐, 의문(疑問)을 풀고 가자.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요구(要求)하지 않으시는가?’ 아니다. 율법은 반드시 다 실행(實行)되어야한다. 율법은 하느님의 성품이며,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설명, 메뉴엘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흙(티끌)인 인간은 그 창조주 하느님의 법을 온전히 다 지켜낼 수가 없기에,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대속(代贖)으로 다 완성하시고,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움을 전가(傳家)시켜 주심으로(로마8,1-3)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그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되는 것이다.(갈라4,4-5참조) 믿음으로....(믿음은 성경(聖經) 말씀 안에 머무를 때 생긴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 지금까지의 말씀을 모르면 세상(땅)의 양식(빵), 죄(罪)등을 걱정하게 된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복습(復習)해 보자. 육(肉, 땅)의 빵, 그 죽음의 빵다섯개를 예수님께서 받아 죽으시고, 대신 당신의 생명(빵)으로 바꾸어 내주시어 열둘(12)로, 하늘 백성으로 살리셨다.(6장 오병이어 참조) 그러므로 열둘은 하늘의 안식(7)을 받은 것,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안식(7)의 빵을 받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용서,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곧 이미 간직하고 있는 용서, 하늘의 안식을 깨닫지 못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그 4,000명에게, 그들이 이미 간직하고 있는 그 일곱 개의 빵이 안식임을 다시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안식을 누리도록 가르침으로 주신 것인데(8장) 그 모두는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의 죽음, 그 사랑, 곧 피의 새 계약, 그 한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토요묵상 참조) 그러니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간직했던 빵 한 개가 생명의 빵’임을, 자신들이 따르는(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명, 안식임을 모르고 근심, 걱정하는 것이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은 너무나 안타까우신 것이다. 제자들 역시 주님과 한 몸이 되지 못한 달마누타(과부)의 사람인 것이다. 자신들의 생명, 안식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먼 소경인 것이다. 그래서 다음 절이 눈먼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22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참 진리구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하면서 정작 하늘의 용서안식을 누리지 못해 세상것으로 근심걱정하는 눈먼 과부의 삶을 사는 저희들을 의탁합니다하늘의 용서안식을 이미 간직하고 있음을그래서 하늘을 날 수 있게 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게 하소서이끌어 주소서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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