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2월 26일 수요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예수 이름 (마르9,38-40)
제1독서<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집회4,11-19)
11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12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13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14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15 지혜에 순종하는 이는 민족들을 다스리고 지혜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안전하게 살리라.
16 그가 지혜를 신뢰하면 지혜를 상속받고 그의 후손들도 지혜를 얻으리라.
17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18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19 그가 탈선하면 지혜는 그를 버리고 그를 파멸의 손아귀에 넘기리라.
<화답송>시편119,165.168.171.172.174.175(◎165ㄱ) ◎ 주님,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가 넘치나이다.
○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 넘치고, 그들 앞에는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나이다. ◎
○ 제가 가는 모든 길 당신 앞에 있기에, 당신의 규정과 법을 저는 지키나이다. ◎
○ 저에게 당신 법령을 가르치셨기에, 제 입술이 찬양을 쏟아 내나이다. ◎
○ 당신 계명이 모두 의롭기에, 제 혀가 당신 말씀을 노래하나이다. ◎
○ 주님, 당신 구원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당신 가르침이 저의 즐거움이옵니다. ◎
○ 이 목숨 살려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당신 법규로 저를 도와주소서. ◎
복음<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38-40)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집회4,11~19)
집회서 1장에서 23장은 머리글과 지혜 찬미 및 집회서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집회서 1장 1절에서 21절은 집회서 전체의 서문뿐 아니라 바로 이어지는 전반부의 서문 역할을 한다.
집회서 2장에서 23장은 지혜에 관한 첫 번째 모음집으로 지혜로운 인간의 덕목들(2장1절~4장10절), 인생의 가치(4장20절~6장17절), 사회적 삶에서의 지혜 추구(7장1절~14장19절), 종교와 교리(15장11절~23장28절)가 세 편의 작은 '지혜 찬미'(4장 11~19절; 6장 18~37절; 14장 20절~15장 10절)와 서로 교차되면서 배열되고 있다.
오늘 독서는 집회서 4장 11~19절로서 '지혜 찬미'의 내용이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지혜'라는 단어 대신에 '예수(그리스도)'를 넣어 묵상해도 좋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혜' 혹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계시된다.
인간인 내가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내 자신에 대한 깨달음(생각 혹은 인식,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이 깨달음(생각 혹은 인식, 지혜)는 불완전한 인간의 것이기에 바람처럼 휙 지나가는 지성(지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셨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 이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은 너무나도 완전하여 성부 하느님과 똑같은 위격(persona)을 갖게 된다.
완전하고 충실한 표현일수록 그 본형(원형)에 가깝듯이 또 하나의 위격을 갖게 된다. 위격(persona; personality)이란 지성과 (자유)의지가 있는 실존으로서 자기 행위에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행위의 주체(subject)말한다. 그러니까 위격은 사람(인격)이상 마귀, 천사, 하느님께만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는 내적인 언어이다. 생각한 것이 말로써 밖으로 표현된다.
하느님의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은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그래서 구약에서 천주 성자는 하느님의 '지혜' 혹은 '말씀'으로 표현되고 계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 찬미'의 장인 집회서 4장 11~19절에서 '지혜' 대신 '예수(그리스도)'를 넣어 묵상해도 좋은 것이다.
오늘은 집회서 4장 12절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는 구절을 묵상해 보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가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모든 생명이 그로부터 발출되며 모든 생명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기에, 생명은 존엄하고 거룩하고 소중하며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날의 낙태와 같은 살인 문제, 어린이와 노인들의 존엄 문제, 경제적 약자와 피고용인, 여러 장애자들의 인권 문제등과 같은 생명 경시 풍조와 사상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반드시 제도적으로나 구조적으로도 시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는 구절은 마치 지혜서 6장 13~16절을 연상시킨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이다. 지혜를 앋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 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말하자면,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홍해와 요르단 강 같은 바다가 앞에 가로막혀 있고, 예리고성과 같은 난공불락의 성벽이 앞에 버티고 있어도 시간의 주재자이신 주님, 인간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주님께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간절히 기도를 하고 봉헌을 하면서 맡기면, 문제가 해결되는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혜는 그렇게 고대하던 기쁨의 기도의 응답이요, 문제 해결의 마스터 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끼리끼리의 이기주의를 넘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말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로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 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늘 복음은 어떤 낯모르는 악령 추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었는데, 그 사람이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기에 제자들이 그 사람을 막으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을 쫓아낸 그 사람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을 행할 수 있었을 것인데, 제자들에게는 그 사실보다는 그 사람이 자기들 가운데 하나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람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그리고 당신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을 반대하여 원하지 않는 사람 말고는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열린 마음은 단순히 교회 밖의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열린 마음으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라는 좋은 표현도 치우쳐서 잘못 적용하면, ‘너희’와 맞서는 표현이 되고, 편이 갈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하나 됨은 모든 사람이 똑같아야 한다는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함 가운데에서 하나를 지향하고, 그 지향점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25년 02월 26일 수요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우리 가운데 자기 집단 중심의 사고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수에게 유익한 일이나 공동선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집단이 그 선을 행하고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다른 집단을 견제하고 비난하는 이른바 진영 논리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승을 자기들이 독차지해야 한다는 듯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스승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견제하는 제자들의 옹졸함과 반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지지자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관용이 대조적입니다.
사실 누가 선을 행하는지보다는 선이 행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이, 공동선이 실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은 명시적으로 예수님의 일행이 아니라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이름입니다.
칼 라너가 말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거나 스스로 그리스도 신앙을 부정하거나 무신론자라고 해도 삶으로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에 대한 가르침에 이바지하기도 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종교나 종교적 신념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복음과 예수님을 위한 실천으로 인간의 구원에 협력하는 이는 예수님께 지지자로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을 드러냅니다.
누구에 의해서든 복음의 가치가 널리 퍼져 가기를 바라고 기도합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2월 26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말씀이 일하시게 하라.
복음(마르9,38-41)
38ㄱ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가 쫓겨난 곳, 하느님의 뜻(일, 나라)이 이루어진 곳이다.(루가1,31-33. 11,20참조)
38ㄴ*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 예수님은 구원의 진리시다. 하느님만으로 곧 하느님의 말씀만을 진리로 먹고 의탁(依託)하며 살아야 하늘에 오를 수 있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마귀(뱀)의 거짓 가르침에 속아 스스로의 선악의 생각으로 열심을 부리며 자신들의 힘으로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또 세상의 재물과 명예가 평화를 준다고 착각하며 세상의 노예로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 마귀의 거짓에 속아 열심히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에페2,1-3참조)
(1요한3,8)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1요한5,18)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 곧 말씀을 진리로 먹고 마시고 입은 그 사람은 악마가 손을 댈 수가 없다. 죄로 죽음의 심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께서 그 사람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代贖)하시고 없애신, 그 새 계약을 구원의 진리로 갖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일을 아직 성령의 깨달음을 받지 못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뜻, 스스로의 판단으로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소속되어, 자신들의 모임을 따라야한다고 오해한 것이다.
(1코린3,6-7) 6 나(바오로)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 개신교는 가톨릭에 구원이 없다고 하고, 가톨릭은 개신교에 구원이 없다고 한다.(바티칸 공의회 이후 바뀌었다) 현재도 그런 가르침을 주는 말을 들었다.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이다. 모두 착각이다.
예수님의 이름, 곧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 믿는 이들이 있는, 그 어는 곳이든 그곳이 구원이 이루어진 하느님나라(天國)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무관심과는 다른 것이다. 무관심은 죄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물은 말씀을 뜻한다. 말씀을 먹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로 서로 받아들여, 하나 되어 하늘의 복, 상(償)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앞 절로 가보자~
앞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같은 형제다.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다.
3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 신앙은 꼴찌가 되기 위해서 다. 그런데 그 첫째는 가장 큰(높은, 일등) 사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첫째다..
예수님께서 그런 첫째를 말씀 하셨겠는가. 예수님은 당신께서 죄인인 우리를 섬겨 주셨듯이, 우리 또한 섬김의 삶을 살아, 당신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그 첫째 사람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20,28)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요한19,32)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강도, 죄인)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에~
(루가23,39-43)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첫째사람)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와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첫째 사람이다.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째 사람이다. 그것이 회개다.(메타노이아-가던 길에서 돌아오다.)
*그러니 해야 한다. 꼴찌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안 된다. 그래도 해야 한다. 시작해 보자, 연습으로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없을뿐더러 마귀가 불가능하다고 속삭이기 때문에 더욱 힘들다.
그래서 매일매일 말씀 안에 머물며 기도해야 한다. 말씀을 기억하고 되새길 때, 그 말씀이 힘을 주시며 끌고 가신다.
(1테살2,13) 13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코린12,6)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에페3,20)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필립2,13)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 말씀은 창조다. 말씀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시다. 전지전능하신 분의 계약의 약속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를 버리는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이미 우리의 승리를 이뤄 놓으신 말씀(1코린5,17)에 의탁할 줄 알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