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01일 토요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하느님 나라 (마르10,13-16)
제1독서<주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다.>(집회17,1-15)
1 주님께서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2 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다.
3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4 그분께서는 모든 생물 안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놓으시고 그들을 들짐승과 날짐승의 주인이 되게 하셨다.
5 그들은 주님의 다섯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그분께서는 여섯 번째로 그들에게 지성을 나누어 주시고 일곱 번째로 그분의 능력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6 그분께서는 분별력과 혀와 눈을 주시고 귀와 마음을 주시어 깨닫게 하셨다.
7 그분께서는 지식과 이해력으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보여 주셨다.
8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9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기 위하여
10 그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리라.
11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생명의 율법을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시어 지금 살아 있는 존재들이 죽을 몸임을 깨우쳐 주셨다.
12 그분께서는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의 판결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13 그들의 눈은 그분의 위대하신 영광을 보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14 그분께서는 “온갖 불의를 조심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 각자에게 제 이웃에 대한 계명을 주셨다.
15 그들의 길은 언제나 그분 앞에 드러나고 그분의 눈앞에서 감추어지지 않으리라.
<화답송>시편103,13-14.15-16.17-18ㄱ(◎17ㄱㄴ) ◎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리라.
○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 가여워하시네. 우리의 됨됨이를 익히 아시고, 우리가 한낱 티끌임을 기억하시네. ◎
○ 인생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서, 들꽃처럼 그렇게 피어나지만, 바람 한 번 스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길이 없네. ◎
○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고, 그분의 의로움은 대대손손, 그분 계약을 지키는 이들에게 이르리라. ◎
복음<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마르10,13-16)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집회17,1~15)
집회서 15장 11절에서 23장 28절까지는 종교와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있다. 그중에 오늘 독서 집회서 17장 1~15절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땅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사실을 계시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관과 지성과 이성을 주신 궁극적 이유와 목적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과 놀라운 일을 찬양하기 위해서이며,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어 계약의 산물인 당신 뜻이 들어 있는 율법과 계명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데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그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집회17,8~9)
"그들의 눈은 그분의 위대한 영광을 보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집회17,13)
특별히 오늘 독서에서 위의 두 구절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찬양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특히 집회서 17장 8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경외심'을 가지고 할 일이 바로 주님을 찬양하는 일임을 계시한다.
여기서 '경외함'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트라피스트수도회 신부였던 토마스 머톤(Tomas Merton; 1915-1968)은 <감사>란 <어떤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무감각하지 않는 것이며 새로운 경외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경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남에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으로 안다고 이야기 했다.
<감사>란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찬양>(찬미,찬송)이란 이런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외적으로 드러내어 기리는 것을 말한다.
토마스 머톤은 이러한 <찬양>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한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참으로 인식하게 될 때, 그 분은 전능하시고 무한히 거룩하시며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고 계신 분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존재의 깊은 심층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히 크신 선(善)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소리가 되어, 환희의 외침으로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찬양에 대한 전(前)지식을 가지고 마니피캇에 나오는 성모님의 찬양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루카1,46)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로 하여금 구세사안에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품도록 하셨다.
즉 인류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고 협력하도록 하시기 위해 영원으로부터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미리 앞당겨 입게 하시어 원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하신 주님을 품고, 사탄이 공격할 수 없는 여인으로 만드시어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셨다.
그리고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서 인류를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게 하시는 성소와 사명을 다하도록, 교회안에서 교회의 영혼이신 성령님과 함께 성령님의 정배(짝)로서 그 역할을 하시는 마리아가 받으신 특은과 사명을 생각할 때 어찌 시골뜨기 여인의 입에서 찬양이 아니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도 하느님께 드릴 감사와 찬양의 재료를 찾아 찬양드려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
반영억라파엘신부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빈구석이 있는, 그러나 전적으로 의지하는 단순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유대사회에서는 12세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 짓을 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라 했더니 ‘식사 전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가정에는 18개월이 된 아이였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며 안수를 해 드렸는데 어린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하면 주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의 기도와 가르침이 큰 역사를 이룹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을 할 때....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르 10,13-16(연중 7주 토)
이영근올리베다노 신부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심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자청년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다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련하여 이끌어갑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이는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 같은 사람들의 것’이며, ‘어린이와 같이 들어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는 사회에서 스스로 살 수 있는 힘이 없는 무력하고 무능한 이,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또한 율법을 모르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율법을 잘 지켜온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10,23) 하시면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0,27)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처신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약하고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가고 축복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그들이 성당에 오는 것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꺼리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그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 되게 하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종께서는 가난한 이들과의 유대와 연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넘어서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하십니다.
마태오의 병행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2025년 03월 01일 토요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가까이 온 아이들을 그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언짢아하십니다.
‘언짢아하다’는 ‘매우 화를 낸다.’의 뜻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린이들을 쓰다듬어 주는 행위가 잘못이어서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막아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이를 쓰다듬는 행위는 안수처럼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습니다.
율법 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고, 실제로 라삐들도 그러한 관습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께서 어린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셔야 하므로, 어린이들을 막아서는 것이 그분께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려한다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시고자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몸소 손을 얹어 그들 앞에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한창현 모세 신부)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들과 어린이
복음(마르10,13-16)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 왜, 아이들이 귀찮아서? 무시해서? 아니면 예수님을 귀찮게 해 드릴까봐? 그도 아니면 자신들의 그룹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튼 자신들의 생각, 판단으로 한 행동이다.
곧 예수님을, 그분의 뜻을 모르고 한 행동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대속을 진리로 깨닫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과 이웃을 분리 시키는 곧 예수님과 이혼 시키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갓난아기는 자신의 용변(用便)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스스로 기저귀도 갈아 찰 수 없다. 더러운 옷을 빨 수도, 갈아 입을 수도 없다. 병(病)에 걸려도 스스로 의사(醫師)를 찾을 수 없다. 먹을 양식도 스스로 만들 수도, 구할 수도 없다.
엄마가 젖을 거저 먹여주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 먹여 주어야 살 수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 곤 배고프고, 아플 때 울고 보채는 것 뿐이다.
조금 큰 어린이도 엄마 아빠만 찾는다. 엄마 아빠와 함께 라면 밤이든 낮이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느 곳이든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평화롭게 잘 지낸다. 그러나 낯선 사람을 보게 되면 불안(不安)해하며 거부(拒否)하며 울고 따르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어린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곧 하느님 엄마 아빠 만을 의지하며, 하느님 아버지가 먹여주시는 양식(말씀)만을 먹고, 마시고, 입어, 어떤 처지에서 든 깨끗한 상태로 하늘의 평화(平和)와 안식(安息)을 누리는, 아는, 믿는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에제16,9)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요한10,4-5) 4 목자는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현세(現世)의 우리들은 낯선 신(神)을 따라 자신들의 뜻, 생각, 길을 고집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따라 살지 않는, 고집불통(固執不通)의 어린이들이 되어 버렸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오늘 본문 중에 이곳 15절에 만 “어린이” 단수로 말씀하신다. 어린이 하나를 뜻한다. 반드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어린이’다. 곧 스스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어린이들, 그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이 세상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獨生子) 예수 그리스도’시다.(이사9,5 루가2,7.12)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말씀만 말했고, 일만 하셨다. 우리의 죄로 십자가(十字架)에 죽기까지 순명 하셨다. 곧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 사신 것이다.
(요한1,11)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8,28)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 그러니 예수님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은, 예수님 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의 말, 일만 하신 그 어린이와 하나,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곧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생명, 구원을 주시기 위해 짐승(죄인)들의 집에 짐승의 먹이통(구유)에 누우신, ‘죄인(罪人)들의 구원의 양식으로 오신 아기’, 그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받아들여 한 몸이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결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으셨다’ - 완전한 하나, 한 몸이 된 것이다. 곧 자신의 뜻, 고집불통으로 살아, 하느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어린이들인 우리들을 창조의 손이 재 창조, 새 창조를 하신 것이다. 하늘(善, 男子)이 땅(惡, 女子)을 품어, 하나 된 그 누구도 갈라 놓을 수 없는 구원이 이루어진 모습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새 것이 된 그 믿음의 사람만이 이웃의 영(靈)을 살라는 참(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서(야고5,13-16)
13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14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 기름- 진리의 성령(聖靈). 곧 말씀을 주어 죄의 용서(容恕), 자유를 증언 하시는 진리의 성령을 깨닫게 하라는 것이다.(로마8,1-4)
15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ㄱ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 믿음으로 서로 죄를 인정(認定)하고, ‘믿음으로 서로 그 죄(罪)를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16ㄴ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아멘!
= 병(病)의 치유는 영원한 영(靈)의 치유인 죄(罪)의 용서(容恕), 구원을 잠시 보여주는 것이다. 육(肉)의 병이 낫게 된 사람이 결국엔 죽지 않는가.
온갖 질병(疾病)은 질서를 어긴 잘못, 그 죄의 결과가 맞다. 그렇다면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모두 죄가 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사람은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 소원, 욕망(慾望)을 위해 사는 죄인(罪人)이다.
그러니까 질병은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한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이며 구원의 진리이신 우리의 신랑(남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은혜의 싸인(sign)이며, 하느님 나라에는 결코 그 질병과 같은 고통, 시련이 없는 곳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묵시21,1.4) 1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풍랑, 시련)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로마3,25-26)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 하느님께서 죄를 짓도록 조장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 안에 이미 들어있는 흙의 본성인 그 ‘죄가 드러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 그러니 절망인 이 세상에서 감사하며 희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주님의 이끄심이 아니면 어찌 깨닫고,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깨닫고 믿고 살게 하소서. 어둠인 세상에서 빛으나라 하늘을 희망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