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모습이 변하셨다> - 마르코 9,2-10

2009. 3. 8. 오전 6:41:06

글자
 

3월8일 사순 제2주일 - 마르코 9,2-10

 
 
 
오늘은 사순 시기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보더라도 오늘의 모습을 기억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배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만났던 은혜로운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2,1-2.9ㄱ.10-13.15-18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시편 116(115),10과 15.16-17.18-19ㄴ(◎ 9)
◎ 산 이들의 땅에서,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 “내가 모진 괴로움을 당하는구나.” 되뇌면서도 나는 믿었노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도다. ◎
○ 아, 주님, 저는 정녕 주님의 종, 저는 주님의 종, 주님 여종의 아들. 주님께서 저의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주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 나이다. ◎
○ 주님께 나의 서원들을 채워 드리리라, 주님의 모든 백성 앞에서, 주님의 집 앞뜰에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4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오늘의 묵상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가십니다. 그러시고는 ‘하늘 나라에서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 자리엔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황홀경에 빠집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짓고 오래 머물자고 합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요? 우선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두려움보다 기쁨과 환희가 더 큰 놀람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희열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을 오랫동안 화려하고 근엄한 모습으로만 상상했습니다. 천상의 빛이 감싸기에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모습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만 했다면 어떻게 가까이 갈 수 있을는지요? 제자들은 한순간 깨달았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본모습이 편안한 모습이며, 아무나 바라볼 수 있는 모습이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주시기만 하는 모습이며,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요구를 해도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발견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확신을 안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들은 평생 이 체험을 지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실 때에도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변모 사건은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사순 제 2주일-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지난 주일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영광 받으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장엄하게 선포되십니다. 몇 주 후 주님께서는 해골산에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는 주님께서  광야-타볼산-해골산으로 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예수님은 유혹과 시련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수난을 받으시지만 이 모든 여정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가의 문제입니다.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고 장엄하게 선포되는 것을 보고 이미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았기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하라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요르단 강 세례 때 하느님의 아들로 장엄하게 선포되신 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타볼산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다시 영광스럽게 선포됩니다.
그러나 해골산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의 예수님처럼 다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을 당하십니다.

제 친구 손 희송 신부는 자기 책에서 주님의 기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를 풀이하며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은 우리가 실망에 빠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실망은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지 않는 표시이며 특히 하느님 사랑에 믿음과 희망을 두지 않은 결과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편이 되시는데 어찌 실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하고 얘기합니다.
친 아드님도 유혹을 받으시고 수난을 받으시니 우리가 유혹과 수난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거두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과 수난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표시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받은 표시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단련받는 표시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시련을 통해서 굳건해집니다.
그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아들이라면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도록 우리에게 고통으로 단련하실 뿐 아니라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마음으로  우리의 고통과 단련에 함께 하십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사순 2주일 - 고통의 생명성

신학생 때 여름 방학은 이태리 한 본당에 가서 있으면서 여름 산간학교에 따라 갔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험한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였습니다. 개울도 건너고 경사진 곳도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특별히 한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비탈을 무서워서 못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는 일도 없고 해서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그 아이를 번쩍 집어서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함께 갔던 주일학교 교사들이 저를 안 좋은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선생님들이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 안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가 홀로 해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가 빼앗은 것입니다. 저처럼 안쓰러워서 도와준다면 아이는 점점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면 스스로 해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의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겉에서 보기엔 아주 얇은 막이지만 그 안에 있는 병아리가 나오기 위해서는 발악을 해야 합니다.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안에 있는 병아리만이 알 것입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가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엄마보다는 말 못하는 아기가 더 고통스럽게 태어나는 것이고 엄마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아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제왕절개를 해서 더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면 모르겠지만 사실은 정상적으로 고통을 느끼며 태어난 아기가 더 건강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기를 위해서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태어날 때부터 그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누에고치라면 나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태어남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남의 고통은 누구도 대신 겪어줄 수 없고 이것을 예수님은 ‘세례’라고 표현하십니다. 죽음과 새로 태어나기 위한 고통을 겪어야 그런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진리를 오늘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느리고 힘들어보여서 저는 나비만 빼서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나비는 마치 누에모양으로 쭈글쭈글해져 있었고 날개도 누에모양으로 오그라져있어 좀체 펴지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나비의 노고를 줄여주기 위해 살짝 입김을 불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하게 날개가 빨리 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것에 재미가 들려 바람을 불어주었습니다. 물론 마음 안에는 이렇게 하면 나비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실험삼아 계속 해 보았습니다.

나비는 드디어 조그만 공간 안에 움츠리고 있던 날개를 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날지를 못했습니다. 날개에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 기억으론 결국 그 나비는 날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고 스스로 날개를 펴지 못한 나비는 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새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도 겪어줄 수 없는 고통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왜 구약의 많은 위대한 성조들 가운데 오직 이 둘만이 예수님께 나타났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새로 태어남이 이 둘의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과 예수님은 겉은 영광스러운 모습이지만 사실 ‘출애굽’, 즉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시나이산 부근에서 40년을 숨어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타는 덤불로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모세는 기가 막혀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모세가 야훼께 "주여, 죄송합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고 당신께서 종에게 말씀하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 하고... 모세가 다시 "주여, 죄송합니다.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십시오." 하고 사양하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크게 화를 내시며...

모세는 좀처럼 백성들을 구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도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당해야하는 수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모세가 처음에 거부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하시며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죽음의 골자기로 내려가십니다.

모세가 이집트 땅에 내려가 거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온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어 지옥에 내려가 당신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훨씬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엘리야 역시 처음엔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으로부터 구해내기를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다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엘리야만을 남겨놓으십니다. 이스라엘엔 심한 가뭄이 들게 하고 엘리야는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머물게 하십니다.

3년 반이 지나고 아합과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 간의 운명의 결전이 갈멜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송아지를 잡아놓고 그 위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편이 참 하느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야가 이겼고 그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였습니다.

우상이 사라지자 이스라엘에는 비로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불과 비는 성령님을 나타내고 엘리야는 성모님을 나타내고 희생제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어쨌든 자신들이 믿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말에 이세벨은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엘리야는 우상숭배를 없애 은총이 땅에 내려오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참을 도망 다니다가 너무 힘들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는 죽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우상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것과 같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셋의 사명이 서로 공통되고 그 공통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고통 없이는 무엇도 새로 태어날 수 없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을 깨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살리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기에 자신이 받아야합니다.

고통의 생산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고통 없이 자신은 물론 어떤 누구에게도 생명을 선사할 수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의 영광은 그래서 수난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순을 지내고 있는 지금 우리, 우리가 겪어야하는 고통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고통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알을 깨는 고통들입니다. 이것을 이겨낼 때엔 타볼산의 예수님처럼 더 영광스러운 나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을 지향하는 성인들은 항상 ‘저에게 멸시와 고통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우리도 ‘고통 안에 숨어있는 생명성’을 묵상하며 사순 2주간을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이 초라한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날>


   ‘부스럼’, ‘마른버짐’, 이런 말들 들어보셨습니까? 요즘도 가끔 이런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계신데, 전쟁이 끝난 후 아무것도 없던 시절, 영양 상태를 점검할 겨를이 없던 시절, 그저 배만 채워도 감지덕지이던 시절, 환경적 요인으로 저희 또래 중 많은 아이들이 이런 병을 끼고 살았습니다.


   얼굴 여기저기가 허옇게 일어났습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너무나 보기 싫어서 죽어라고 씻고 문질러 겨우 없앴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일어났습니다. 머리카락 속은 부스럼으로 만발했는데, 약을 바르기 위해서 어머니는 부스럼 부위를 가위로 잘라내다 보니 그 몰골이 참으로 볼만했습니다.


   거기다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별로 어울리지 않는 구호품 옷을 걸치고 있으니, 이런 저를 보고 친구들이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양아치’였습니다.


   이런 저였는데, 많이 ‘발전한’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놀라운 일을 제게 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바람을 지녀봅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삭고 부석부석한 영혼이지만, 덕지덕지 때가 많은 영혼이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언젠가 또 다른 변모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이 초라한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빛나는 구원의 갑옷을 입혀주시리라는 희망 말입니다. 그 때 우리의 얼굴은 성인성녀들과 더불어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토록 고달파도, 이토록 부끄러워도, 이토록 힘겨워도 다시금 힘을 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변화와 변모의 삶을 사셨습니다. 나자렛 예수에서 골고타 언덕 위 수난 당하시는 메시아에로 변화 인간 예수에서 만왕의 왕 그리스도에로 변화를 거듭 추구하셨습니다.


   변화 변모 쇄신… 이런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제 개인적으로 씁쓸한 심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그토록 변화되기를 좀 더 나아지기를 기대해왔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맴도는 제 수도생활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한번 보란 듯이 변화하고 싶지만 생각뿐이요 다짐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변화 일 것입니다. 부정적 사고방식에서 긍정적 사고방식에로 변화 비관적 인생관에서 낙관적 인생관에로 변화 폐쇄적 생활에서 개방적 생활에로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언젠가 얻게 될 상급은 영적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능력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매일 만나는 형제들을 순간마다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상을 뵙게 될 것입니다.


   영적 눈을 뜨게 될 때 우리 영혼이 얻게 될 선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것입니다. 한번 영적 눈을 떠보십시오. 지금까지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부여될 것입니다. 그 삶이야말로 변모의 삶이요 회개의 삶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19번 / 주님은 우리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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