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6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마태오 5,20ㄴ-26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21-2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 주님, 주님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 주님,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주님의 귀를 기울이소서. ◎
○ 주님, 주님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그러나 주님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리이다. ◎
○ 나 주님께 바라노라.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노라.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노라.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
○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도다. 바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구약의 ‘도피성’은 살인자를 보호하는 곳입니다. 물론 우발적인 사고를 낸 사람입니다. 그렇더라도 철저한 율법 국가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살인은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지기에 보복을 막는 차원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그들처럼 글자나 따지는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아버지였던 모세는 ‘도피성’까지 만드는 유연함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그렇게 걸어선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살인이라는 어마어마한 것에 매달리기보다 형제에게 욕하고 성내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소홀히 하면서 ‘먼 곳의 사람들’에 대해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부모를 찾아뵈러 가기 전에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하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기도는 충실히 하면서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얘기가 담고 있는 뜻이 여러 가지이지만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으려고 탑을 높이 쌓다가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은 저 위에 계시어 거기까지 기어 올라올 수 있는 사람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을 만나려면 단절된 관계를 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화해하라고 하신다고 화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내가 스스로 화해하려고 해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 지내자고 찾아가 악수를 했는데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和解, 이 한자어의 뜻을 잘 보면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和하려면 먼저 解를 해야 합니다. 화해란 다 풀어버리고 잘 지내는 것인데 그와 잘 지내기에 앞서 내 안의 풀 것을 다 풀어야 합니다.
무엇을 풀어야 합니까?
미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복수의 감정. 질투의 감정. 서운한 감정.
한 마디로 내 안의 모든 惡感情을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감정을 갖게 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를 봐야 합니다. 그에게 나의 감정 해소를 책임지우지 말고 나의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분노할 때 나에게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해 더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분노의 화살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그런 말에 서운했던 나의 옹졸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말에 상처받았던 나의 허약함을 진정 강인하게 해야 합니다.
그의 계략에 넘어갔던 나의 허술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전에는 그로 인해 내가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제는 그로 인해 넓어지고 강해지고 성숙해져 더 이상 그에 의존하지 않고 나를 진정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대신 하느님 사랑으로 충분하여 그와 상관없이 진정 행복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삶에서 그를 배제하고 오직 기도만 하며 하느님과만 잘 지내려던 나에서 이제 그와도 잘 지내고 그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와 함께 예물을 봉헌하러 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순 1주간 금요일 - 미사의 준비
많은 아픈 사연 중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듣는 것만큼 마음 아픈 사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다가보면 이런 사연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지 않아서 가정이 파괴가 되는 경우는 더 가슴 아픕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신의를 저버린 사람은 새로 만난 사람과 잘 살아가는데 버림을 받은 사람은 병이 걸려 일찍 죽는다든지 자녀를 키우기 위해 혼자 힘든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정이 소중한지 두 집 살림을 하면서도 상대를 속이고 몇 년을 살기도 합니다. 이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사람의 마음은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도 신앙의 힘으로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의를 저버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하면서 몸만 집에 들어와 산다고 하여 그것이 상대나 자녀를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혼인을 하였다면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지켜갈 때야만 상대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지 않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단순한 진리이지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핑계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주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이기지 못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픔을 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진리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해당됩니다. 미사는 단순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혼인 계약을 맺은 신부이고 특별히 성체를 영하면서 그 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어떤 계약에나 서로 간에 지켜야 할 계약조건이 있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계약은 파기되고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혼인도 하나의,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계약입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그리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심으로써 하실 의무를 다 하셨고 지금도 하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과연 그분께서 내려주신 혼인계약 조건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 어쩌면 그 혼인 계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즉, ‘사랑’이 우리가 지켜야 할 혼인조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혼인한 부부가 서로 신의를 지키며 살다가 집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것처럼, 미사를 드리러 오기 이전에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였는지 먼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용서 못한 사람이 있다면 먼저 용서를 하고 미사에 참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신의를 저버리고 몸만 집에 들어와 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신랑인 그리스도께 모욕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채 성체를 영하면 그 분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모욕하는 것이고 그 성체는 그의 영혼과 육신의 독이 되게 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죗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저는 이것을 연옥과 연결시키고 싶지만, 어쨌든 죄를 지으면 그 죗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합니다. 그 죗값은 이 세상에서부터 치러지고 그래서 죄를 지으면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하느님나라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그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믿고 지키지만 그것과 관련된 것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형제들에게 화를 내고 미워합니다. 큰 죄는 사실 다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현재로 말하면 이들은 형제에게 해야 할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전례에만 열심히 참례하며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미사의 준비는 바로 이전 미사가 끝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사랑하는 삶 자체가 바로 다음 미사 때 온전히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왜 내 안에 그 ‘몹쓸 인간’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형제에게 절대로 성내지 마라.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바보라고 부르지도 마라. 최고의회에 넘겨질 것이다. 멍청이라고도 부르지 마라.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평소에는 성인군자 같은데, 한번 ‘욱’하는 마음의 불길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심호흡과 더불어 단 1분만 마음을 가다듬었어도 될 일인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평소에 따놓은 점수, 그 한 번에 다 까먹습니다. 내가 많이 오버했구나, 하는 생각에 평상심에로 돌아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음을 다스릴 일입니다. 특히 화가 솟구치는 순간, 그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수행자의 당부처럼,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성덕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승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겼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祖 혜능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다만 당신들의 마음일 뿐이오.’”(존 CH 우, ‘선의 황금시대’ 참조).
분노의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내면이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정되어 있다면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무시, 소외 앞에서도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화가 나고, 또 자주 우울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욕심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로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한번 비워보십시오. 뜻밖의 평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올 것입니다.
올라서려고만 발버둥치지 말고 가장 밑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가장 미천한 일은 언제나 내 몫이려니 마음먹어보십시오.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의외로 삶이 편안해지기 시시작합니다.
한 착한 수련자 형제가 이런 생각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수도생활, 저는 너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나 행복한지, 나 혼자만 이렇게 행복해서 되나, 하는 걱정과 죄송스러움을 안고 매일을 살아갑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제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매일 하얀 백지 같은 또 다른 오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유 있게 기도할 기회를 주십니다. 형제들과 담소할 수 있는 기회, 기쁜 마음으로 노동할 수 있는 기회, 천진난만한 얼굴로 뛰어놀 수 있는 기회, 저를 성장시키기 위한 선물이 분명한 형제들과 함께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강도 높은 수업, 집중적인 양성과정이 계속되는 팍팍한 수행생활에 힘겨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형제다 보니 단조로운 수도생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사는 데서 오는 불편함, 인간관계 안에서 오는 갖은 상처 앞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 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