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루카 9,22-25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살아남을 것이다. 주님의 규정과 법규에 충실할수록 축복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어기고 등을 돌리면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보호를 받는 길은 율법 준수뿐이다(제1독서). 십자가는 고통이며 시련이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아픔이다. 하지만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된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신다. 사순 시기 동안 새로운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복음).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시편 1,1-2.3.4와 6(◎ 40〔39〕,5ㄱ)
◎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여라.
○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
○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도다.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로, 본래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쌓인 저주의 나무였습니다. 일반 사형수는 간단히 죽였지만 십자가형은 달랐습니다. 사형수는 먼저 채찍으로 반쯤 죽도록 맞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회복되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했습니다. 형장에 도착하면 군인들이 산 채로 손발에 굵은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고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아 놓았습니다. 일주일 가까이 숨이 붙어 있는 모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수치의 나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형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죽음을 체험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인지요?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늘의 이끄심’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온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비참한 상황’을 극복해야 부활의 현실을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의 희망으로 지는 십자가가 되어야겠습니다.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나의 십자가란?
매년 이맘땐 유럽에선 축구 클럽별 대항인 챔피언스 리그를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습니다. 작년 이맘때도 박지성이 뛰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우승을 하였고 박지성은 한국인 처음으로 클럽 챔피언의 일원이 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박지성은 작년 결승전까지 중요한 개임을 연달아 뛰면서 맨체스터의 다크호스로 부상하였고 이태리 팀과의 경기에서도 중계 아나운서가 박지성 선수를 경계해야 한다고 자주 말할 정도로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내는 선수였습니다. 실제로 박지성은 맨체스터가 결승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박지성이 당연히 챔스 결승에서 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막상 결승 날 박지성은 후보 명단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영국 언론까지 놀랄 정도로 이 사실이 크게 보도 되었고 한국 네티즌 사이에서는 감독 퍼거슨이 결국은 박지성을 이용해 먹은 것처럼 비난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었습니다.
결국 맨유가 우승을 하였지만 우승 메달은 결승에 출전한 사람들만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고생하고 큰 공헌을 했던 박지성은 우승 메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감독은 박지성이 골을 넣지 못하는 선수이기 때문에 작전상 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결국 그동안 그렇게 고생하고도 우승의 영광을 그 동안 거의 뛰지도 않았던 벤치 후보 선수들에게 양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박지성이 수승메달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공을 잘 못 차서가 아니라 다만 결승에 참가하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잘 져서 스스로를 구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분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하나의 영광을 향한 노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 받지 않으셨다면 그 영광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구원의 영광은 그 십자가 희생에 동참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아무에게나 나누어주시지 않고 그 고통의 자리에 우리가 참여할 몫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으로 우리가 그 영광에 참여합니다. 마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주어서 그 희생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듯이 우리도 그분의 희생에 참여함으로써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고통은 우리가 영광을 차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고통을 받는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바로 그 고통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고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려는 누구도 제외시키시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십자가의 조각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헬레나 성녀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아와 조각조각 나누어 귀중한 곳에 보관하도록 여러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조각들이 합쳐지면 하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저보고 ‘당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제가 진 십자가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온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십자가를 결합하여 예수님 십자가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
외국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다보면 다들 큰 호기심을 가지고 제게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십자가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저게 다 교회가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땅에는 정말 십자가가 많더군요. 여기 저기, 50미터 100미터도 못가서 나타나는 교회들, 그 교회의 꼭대기에는 다들 보란 듯이 십자가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恨)으로, 고통으로, 슬픔으로 점철된 ‘십자가의 민족’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십자가는 왜?’ ‘고통은 왜?’ 라는 질문은 인간 역사 안에서 늘 되풀이되어온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십자가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시편작가들도 고통의 연속인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 빠져나가듯이 평생토록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고통 앞에 시편작가는 차라리 체념하고 수용하는 게 더 낫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대답합니다.
“인류의 고통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 특히 원죄에 대한 경고이자 징벌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기 위해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고난은 인생의 보약입니다.”
‘고통은 왜?’란 질문 앞에 지금까지 교회가 제시한 전형적인 답안이었습니다.
물론 고통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일취월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 십자가에 대한 도에 넘치는 수동적, 소극적인 자세는 최선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라는 당부는 힘에 겨우니 체념하라는 말, 어쩔 수 없으니 그 자리에 주저앉으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신의 그릇을 더욱 크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난관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매일 와 닿는 고통과 악, 병고와 불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지내라는 말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라. 그러나 퇴치할 수 있는 고통은 마땅히 퇴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거슬러 투쟁하셨습니다. 인간의 불행과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이를 없애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셨으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멸시받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에 겨운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갖은 고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십자가는 미리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은 각고의 노력을 다해 극복해야만 합니다.
폴 클로델이란 영성가의 기도가 오늘 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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