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그리스도인의 단식-마태오 9,14-15

2009. 2. 27. 오전 7:02:14

글자
 

2월 2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마태오 9,14-15

 
 
단식하는 것을 남이 보아 주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단식하는 동안 다투고 싸워서도 안 된다. 오히려 불의한 사람의 결박을 풀어 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 주려 애써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런 단식을 원하신다(제1독서). 단식은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절제함으로써 속죄하게 한다. 단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라도 단식을 통해 주님의 수난에 동참할 수 있다. 진정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다. 그분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단식하는 것이다(복음).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네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이렇게 말씀해 주시리라. “나 여기 있다.”
 
시편 51(50),3-4.5-6ㄱ.18-19(◎ 19ㄴ)
◎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주 하느님, 주님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
○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나이다. 주님께, 오로지 주님께 잘못을 저지르고, 주님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나이다. ◎
○ 주님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주님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요한의 제자 몇몇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다분히 볼멘소리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 겁니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단식’으로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단식 자체에 매달리지 말고 예수님과 연관된 ‘신앙 행위’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단식했습니다. 단식에 관한 기록 역시 많습니다. 하지만 공통 요소는 언제나 ‘하늘의 기운’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민족의 회개가 요구될 때는 늘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이슬람교의 ‘라마단’은 한 달 동안 이어지는 단식입니다. 그들은 ‘해가 떠 있는’ 낮 시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여행자나 환자의 경우는 제외되지만 그들도 나중에는 빠진 날수만큼 보충해야 합니다. 지독한 단식입니다.
희생 없이 절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절제 없이 본능은 조절되지 않습니다. 단식 역시 그 근본은 ‘절제의 훈련’입니다.
 
 재의 수요일 다음 금요일-마음은 넓게 위는 작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이든 신자들은  사순 시기가 되면 단식에 대한 강박감 같은 것이 있을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때 어른들은 사순시기가 되면 단식과 금육은 물론 술 담배를 하던 분은 술과 담배를 끊고 부부생활도 하지 않고 자녀들 결혼도 사순시기는 피하여 시켰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커서 그런지 저도 잘 실천은 못해도 사순시기에는 어떤 단식을 할까 매번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재의 수요일 미사를 주례한 형제가 한 말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음은 넓게 위는 작게!”  이 짧은 명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이 얘기하는 사순절 단식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남이 한다고 따라하는 단식은 소용없고  마음에 없는데 하라니까 억지로 하는 단식도 소용없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단식은 더더욱 소용없다 합니다.
이런 단식은 살을 빼기 위해 하는 단식보다도 더  나를 위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기에 아무 소용없습니다.  살을 빼기 위한 단식은 육신을 건강하게 하기라도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단식이 유익한 단식이고 바람직한 단식입니까?

그것은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단식이고,  그러니까 사랑을 증진시키는 단식입니다.
먼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진시키는 단식입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있을 때는 즐거워하며 먹고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하듯이
우리도 하느님이 부재중일 때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키우기 위해 단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식은 이 세상에 안주하던 Mode에서  하느님 갈망의 Mode로 바뀌도록  총동원령을 내리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마른 땅이 비를 기다리듯이  우리 영혼이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게 하는 것입니다.

단식은 두 번째로 이웃 사랑을 증진케 합니다.
위를 작게 하고 마음을 넓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배를 채우려 하지 않고    남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려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쌀 한 줌 나누기가 바로 이 단식의 의미지요.  우리는 이런 쌀을 聖米, 거룩한 쌀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쌀이지만 내 배를 채우지 않고  더 굶주린 다른 사람의 배를 채우는 사랑의 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단식은 도무지 의미 없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재의 예식 후 금요일 - 그리스도인의 단식

학생 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연습장에 까맣게 써 가며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냥 눈으로 보고 암기하면 안 될까?’라고 생각할 때 선생님이 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머리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란다. 몸도 기억을 한단다. 그래서 속으로만 외우는 것보다 입으로 소리를 내고 손으로 써보면 더 잘 기억하게 되는 거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몸이 기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저의 한 친구에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데 많은 과일 속에 복숭아 향만 들어있어도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알레르기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마치 살아오면서 배탈이 났거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음식들을 몸이 거부하여 잘 먹지 못하는 것처럼 알레르기도 그렇게 안 좋은 기억을 몸이 기억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악기를 배울 때나 운동을 배울 때 처음엔 머리를 써가면서 연습합니다. 그러나 나중엔 머리를 쓰면 더 안 되고 그냥 몸에 배인 실력으로 할 때 더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일일이 생각하며 걷고 눈을 깜빡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몸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상어와 같은 물고기들은 뇌를 빼 내도 계속 헤엄쳐서 갑니다. 왜냐하면 헤엄치는 능력은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몸에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느끼며 감사해하는 것도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조금이라도 그 수난을 체험할 때 그 감사가 몸에까지 새겨집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몸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배고파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식을 꺼릴 것입니다. 몸이 원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단식을 며칠 한 적이 있는데 이틀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밥과 물을 먹지 않으니 온 뼈마디가 쑤셔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를 느끼게 되고 그 분께 대한 고마움이 뼛속까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단식은 그저 육체를 절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단식하는 목적은 몸 안에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억을 새겨놓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영적으로만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주님을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저 단식을 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았나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고통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몸을 절제하면 영이 맑아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육과 영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이 메마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극기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제자들도 단식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으로 불렸고 제자들까지 단식 같은 것은 시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식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이 신랑이시고 교회가 신부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단식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잔치를 준비한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빼앗긴 후, 즉 신랑을 빼앗긴 후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해 단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한 단식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단식이 아닙니다.

 단식은 사실 그리스도교보다도 다른 종교들에서 훨씬 많이 합니다. 그런 단식들은 육체를 이기고 영을 충만하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필수불가결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단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육체적 영적인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고통들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합일시키지 않고서는 언제나 핵심을 잃은 부수적인 것들에 머물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과 영으로 체험하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사순이 고통과 죽음이기도 하지만 은총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슬픔을 기쁨으로, 울음을 춤으로 바꾸시는 주님>


   새 성경을 읽다보면 새로운 번역을 위해 그간 애쓰신 많은 신부님들, 평신도신학자들, 봉사자들의 땀과 노고가 고스란히 배어있더군요. 번역이 훨씬 부드러워졌고, 본문에 대한 이해나 의미 파악도 한결 쉬워졌습니다. 경제도 안 좋은데 만만치 않은 가격에 부담스러워하실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새 성경을 읽으면서 한 신부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새 성경의 번역 전담자이셨던 신부님, 그 골치 아프고 고된 성서번역 작업에 한 평생을 거셨던 신부님, 아마도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작고하신 것이 분명한 존경하는 임승필 신부님의 얼굴. 오늘 성서를 봉독하는 내내 신부님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전에는 ‘전도서’라고 칭했는데, 새 성경에서는 ‘코헬’이라고 부르는 성서 3장 1절 이하에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오늘 복음에서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코헬’ 작가의 표현처럼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 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을 기점으로 슬픔의 시기는 지나가고 기쁨의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절망과 비탄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눈물 흘릴 때가 아닌 것입니다.

 

코헬의 저자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삶을 기뻐하고, 현재 이 순간 존재의 기쁨을 만끽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네 옷은 항상 깨끗하고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라.”


   그러나 항상 기뻐만 할 수가 있나요. 좀 살만하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면 어느새 다가오는 것이 고통입니다. 십자가입니다. 불행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기쁨은 고통 속에서도 미소 짓는 기쁨입니다. 언제 사형에 처해 질 지 모르는 절박한 감금상태에서도 행복해했던 사도 바오로의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참혹한 옥살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을 위해 편지를 쓰셨는데, 그 고통 속에서도 되풀이해서 강조하신 단어가 ‘기쁨’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기쁨의 비결이 무엇이었겠는지 묵상해봅니다.

 

바오로 사도의 기쁨은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맡김을 통한 기쁨이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에, 내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이기에, 더 이상 그 어떤 위협도 두렵지 않았던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모두 찰나적인 기쁨입니다. 잠시 지나가는 기쁨입니다. 뜬구름과도 같은 기쁨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의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며, 영속적인 기쁨입니다.

 

시편 작가의 표현처럼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꾸준히 기도하며 기쁨을 간직할 때, 언젠가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울음을 춤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우리의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 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이에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  (시편 29장 12-13절)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22번 / 구원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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