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유혹 ]- - 마르코 1,12-15

2009. 3. 1. 오전 7:09:46

글자
 
 

3월 1일 사순 제1주일- 마르코 1,12-15

 
 
주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다시는 홍수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약속의 징표로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라고 하신다.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무지개는 주님 사랑의 표지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다.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이다. 그분의 죽음으로 모든 이가 구원받게 되었다. 누구든지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나면 주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광야에 머물러 계셨다. 단식과 기도를 통해 당신의 사명을 묵상하신 것이다. 당연히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했다. 때가 되자 그분께서는 갈릴래아에 나타나시어 복음을 선포하신다(복음).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8-15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14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15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시편 25(24),4-5ㄴ.6과 7ㄴㄷ.8-9(◎ 10 참조)
◎ 주님, 주님의 계약을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길은 모두 진실이옵니다.
○ 주님, 주님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주님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주님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주님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기억하소서, 주님, 먼 옛날부터 베풀어 오신 주님의 자비와 자애를. 주님, 주님의 자애에 따라, 주님의 선하심을 생각하시어 저를 기억하여 주소서. ◎
○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도다.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고, 가련한 이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시도다. ◎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3,18-22
사랑하는 여러분, 18 그리스도께서는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19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고, >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의 묵상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사십 일 동안 유혹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짐작할 뿐입니다. ‘당신은 왜 사서 고생하려 하는가?’ ‘막강한 하늘의 힘을 지닌 당신이 허약한 척한다고 누가 믿겠는가?’ ‘어찌하여 쉬운 길을 제쳐 두고 그토록 황당한 길을 가려 하는가?’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유혹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충동질한 사탄이 우리라고 그냥 둘 리 없습니다. 그분께서 유혹받으셨기에 모든 유혹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기 싫다는 생각이나 참지 말고 기분대로 하고 싶은 느낌은 자연스러운 유혹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불공평’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어진 시련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첫 행동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첫걸음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삶의 ‘어두웠던 체험’을 묵상합니다. 잘나가던 때보다 힘들었던 때를 되새겨 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봅니다. 그리하여 ‘내 인생 속에’ 깊이 들어와 계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뜻깊은 사순 시기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사순 제 1주일-광야에서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십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 
하여  광야에서 예수님은 외로우십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겪으실 고독을 앞서 체험하십니다.
당신을 따랐던 그 수많은 사람들과 제자들도 떠나고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세 제자도 쿨쿨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당신 곁에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괴롭다 해도 아무도 당신 마음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외로움은 누가 옆에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있다 해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의 십자가 고통 앞에서 너무도 고독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는 혼자 져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어머니도 이 십자가는 대신 질 수 없습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절대 고독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 되고  이 절대 고독이 기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광야의 고독 가운데서  하느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광야의 고독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 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해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어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알 듯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합니다.
이런 면에서 집안에서는 가장이 가장 고독하고,  직장에서는 최고 경영자가 가장 고독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장상이 가장 고독하고,  더 올라가면 하느님께서 가장 고독하십니다.

제가 관구장을 할 때입니다. 형제들은 힘들다는 하소연을 저에게 쏟아놓습니다.
형제들은 불만도 저에게 다 쏟아놓습니다.  저희 수도회 여러 문제들을 저의 잘못이라 비난하며 해결책을 내 놓으라 합니다.
저 또한 같은 인간이고  그래서 힘들고 하소연하고 싶고 불만을 터뜨릴 데가 있으면 좋겠는데  형제들은 이런 저에게 온갖 것을 쏟아 붓고  저는 달리 터뜨릴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바로 이 때 누구 의지할 데를 찾기보다 홀로서기를 해야 했고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쓰레기를 쓰레기통이 받아들이는 덕분에 방이 깨끗하지요.
만일 쓰레기통이 쓰레기 받아들이기를 싫다하면 온 방이 지저분하겠지요.
‘그래 내가 형제들의 쓰레기통이 되어 주자!’  ‘그리고 가장 큰 쓰레기통인 하느님께 쏟아버리자!’  ‘나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찾아가 하소연하지 않고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한탄하지 않고 하느님께 한탄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힘을 얻지 않고 하느님께 힘을 얻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사순절 우리의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김 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느끼셨던 고독은  우리에게 교훈적입니다.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 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시려고 그러시나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겠지?”

두 번째로 광야에서 예수님은 배고프십니다.  광야에는 돌덩이밖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여 사탄이 다가와 예수님께 유혹을 합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시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우리는 이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안심도 하게 됩니다.
유혹을 받으시기까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심에 감사드리고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시니 수없이 유혹받는 우리도  유혹 자체가 죄가 아님에 안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하고 감사만 드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유혹의 본질을 깨닫고  유혹을 통하여 하느님 아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유혹은 배고픈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배부른 사람은 식욕이 없고  식욕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는 법이지요. 이것은 비단 먹는 것 뿐 아닙니다.
없을 때 소유욕이 생기고 소유욕이 있을 때 유혹을 받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자가 하는 짓은  뱀이 하와에게 부족한 것, 없는 것을 일깨우듯  없는 것을 일깨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고 가지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돌을 내밀며  당신은 빵은 없고 돌밖에 없으니  당신의 능력으로 빵을 만들어 식욕을 채우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빵은 없어도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유혹자가 많습니다.
명품을 걸치고 와서 내게 명품이 없음을 일깨우고  소유욕을 부추기며 유혹합니다.
갖가지 없음을 일깨우고 욕심을 부추기며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도 배고프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뱀이 가지지 못한 것 하나를 일깨우니 못 가진 것만 보고 가진 것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못 가져서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못보고 못 누리기에 불쌍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욕심내는 것을 못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배고프고 궁핍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에 대한 욕구를 단식을 통하여 말씀에 대한 욕구로 바꾸십니다.
아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빵에 대한 욕구를 잠재웁니다.
우리도 사순절 단식으로 우리의 온갖 욕구를 영적인 갈망으로 바꾸고  하느님 말씀, 즉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께서는  광야를 나와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단식으로 복음을 소유한 행복을 당신 혼자 소유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과 그 복음, 그 행복을 나누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나도 행복하니,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김 추기경의 말씀과 같습니다.
나누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줄 수 없는 법이지요.
같은 이치로 행복이 없는 사람은 행복을 나누지 못할 것이고  나눌 마음이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기 혼자 행복한 것을 미안해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주고도 나누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행복한 우리는  기도와 단식으로 우리 시대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불행한 사람에게  우리의 행복을 나누어야 하고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자선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사순 제 1 주일 - 자신을 이겨야 하는 이유 

초등학교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세상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 째는 베짱이와 같은 사람, 즉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부류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개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들이랍니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베짱이가 배고픈 것은 그들이 일을 하지 않은 탓이라 하며 나누기를 거부합니다. 사회에서 있거나 없거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과 같은 부류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꿀을 만들지만 꿀을 먹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초등학생에게나 적합할 이 이야기를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비유가 단순하지만 옳은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이 세 단계의 과정을 차례로 거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고 부모로부터 받기만 합니다. 그 어린아이들은 세상에 큰 도움을 줄 수 없고 오히려 다른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베짱이와 같은 단계입니다.   조금 크면 공부를 하고 일도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직장을 얻고 집 사고 결혼하기 위한 개인적인 목적이 강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느냐?’, 뭐 그런 삶이죠. 이것이 바로 개미의 삶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숙하면 슈바이처나 마더 데레사 등과 같이 남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단계까지 다다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위인들은 바로 꿀벌과 같은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사실 세상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삶을 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비길 만큼 세상에 좋은 것을 남기고 떠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남겨주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짧은 삶 안에서도 베짱이-개미-꿀벌로의 삶의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완전하신 분이셨지만 인간이 거쳐야하는 이 단계를 무작정 뛰어넘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베짱이의 삶을 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다른 많은 아이들이 몰살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란 이름만으로 세상에 피해를 준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 땅에 가서 숨어 살게 됩니다. 부모까지 고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식을 치르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는 혼자 사라져서 부모가 삼일 밤낮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는 정말 세상에 피해만 주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인식을 거치고 서른이 되기까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면서 집에서 조용히 지냅니다. 아마 아버지 요셉의 일을 도와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올만하게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 일은 열심히 하셨지만 자신과 가정을 위해 사신 것입니다. 나이가 서른이 될 때까지 당신과 가정에 충실한 개미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꿀벌의 삶을 사셨던 것인 불과 3년이 되지 않습니다. 가정을 떠나서 세례를 받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온전하게 꿀벌의 삶을 사셨습니다.  세례란 죽고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개미처럼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죽이고 꿀벌처럼 사랑을 자신의 밖으로 향하게 하는 이타적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있어야합니다. 베짱이로 살던 개미로 살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에게마저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아주 어리석인 예가 될 수 있겠지만 하나 들자면, 제가 어렸을 때 한 친구가 사탕을 먹으면서 약을 올리기에 저도 좀 달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저에게 나누어주지 않아서 제가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워낙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동네에는 사탕을 사 먹을 가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는 사탕 하나가 가장 큰 보물일 수도 있었습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치아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치아가 다 썩어서 한 번에 열 몇 개의 치아를 치료해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어린이처럼만 사셨다면, 또 당신 가정을 위해서만 사셨다면 하느님나라 문은 지금까지 꼭꼭 닫혀있을 것이고 예수님도 어떠한 기쁨과 영광도 받으실 이유가 없으실 것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뭐 예로 들고 싶지 않지만 굳이 들자면 연쇄 살인범 강호순을 보면 쉽기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종교도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에 대해 통제 불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들도 원하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을 자주 경험하기도 합니다.

  세례는 사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지만 그것으로 끝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간 광야에서 교만과 육체와 욕심과 싸웠습니다. 그 무기는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이렇게 육신을 괴롭힌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짱이의 이기적인 마음은 모든 사람의 세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육체를 죽이다시피 하지 않으면 베짱이의 욕망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기도와 단식으로 자신을 죽인 이후에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실 수 있는 힘이 생기셨습니다. 이 말은 이제 이기적인 인간형에서 이타적인 인간형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유혹은 자꾸 배짱이와 개미형 인간으로 만들어 이기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참다운 자유이고 온전한 자아실현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과 기도로 자신과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복음은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복음이란 바로 당신 자신이 체험하신 자유와 행복이 이 세상에서 이미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처럼 자신을 이기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하느님나라라고 선포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순은 바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예수님처럼 40일간 광야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새로 부활한 우리의 모습은 우리 안에 감추어져있는 참 사랑일 것입니다. 다만 나의 욕망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이번 사순 기간 동안 싸워 이기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만큼 덜 이기적이 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더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7,000원에서 2,000원을>


   지난 재의 수요일 아이들과 함께 봉헌했던 저녁 미사 때 제가 이런 요지의 강론을 했었습니다.


    "아이들아. 오늘부터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는데, 사순절이란 말이 너희들에게는 아주 생소하겠지? 한자로는 넉 사(四)자에 열순(旬)자를 쓰는 데 결국 4와 10을 곱하니 40일이 되지.


   그런데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부활절 전야까지 계속되는데, 날짜를 모두 세어보면 40일이 아니라 45일이 된단다. 왜냐하면 주일은 작은 부활을 의미하는 축제일이기 때문에 사순절 기간에 포함시키지 않아 닷새를 빼면 40일이 되는 거란다.


   왜 40일로 정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하셨던 기간이 40일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사막을 횡단했던 햇수도 40년… 40이란 숫자는 여러 의미가 담긴 숫자란다.


   이 기간 동안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장 극진한 사랑의 표시인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면서 단식도 하고 금육도 한단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신부님 수사님들은 술도 끊고, 간식도 끊고 음료수도 끊는 등 몇 가지 공동체적인 노력을 해서 아낀 금액은 해외 선교사들에게로 보내기로 했단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아직 신자도 아니고, 아직 어리기에 특별한 희생을 요구하지는 않을 거야. 그 대신 여러분은 자신이 맡은 작은 일에 대해서 좀 더 열심히 하고, 검정고시 더 열심히 준비하고 더 기쁘게 살면 좋겠어."



  그리고 농담 삼아 제가 그랬습니다. "혹시 우리 친구들도 주말에 거금의 용돈을 받으니 성의를 보탤 친구들이 있으면 삥땅 안하고 선교사 신부님께 잘 전달할게."


   오늘 점심을 먹고 마침기도를 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제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제 호주머니의 뭔가를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에 꺼내보았더니 접고 또 접은 1000원짜리 2장이었습니다. 의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이게 뭐냐? 뇌물이냐? 아니면 내게 빚진 것 있었냐?"


   "아니요! 신부님, 지난 수요일 미사 때 신부님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요. 약소하지만 보태세요."


   그제야 생각이 정리가 된 저는 너무나 기특한 아이를 바라보며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번 7,000원 용돈 받는데, 그 용돈에서 과감하게 2,000원을 떼서 보태라는 아이의 마음이 정말 대단해보였습니다.


   너무나 행복했던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고맙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니 이 돈 도로 집어넣어라. 하느님께서 네 마음을 보시고 아주 기뻐하실 거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들 신앙 여정 주변에는 항상 갖은 유혹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광야를 걸어갈 때 우리가 느끼는 큰 유혹 중 하나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거라."는 유혹일 것입니다.


   아버지 집을 향해 순례를 떠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순례를 지속하기란 어렵습니다. 광야를 향해 출발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횡단하고 광야에 머무르기란 어렵습니다. 세례를 받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살기란 어렵습니다. 수도자로 서원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서원을 살고 지속적으로 서원에 충실하기란 진정 피곤한 일입니다.


   가끔씩 포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포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공통된 성격 유형을 지닙니다. 자신의 의지나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보겠다는 자존심 강한 유형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끼리끼리" 혹은 "나 홀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 한가운데 언제나 함께 계셨음을 기억합시다. 때로는 불기둥으로, 때로는 장막 안 성궤로 당신 백성들을 보살피셨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에게서 유혹도 많겠지만 그 여정에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하는 은혜로운 나날 되길 빕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18번 / 골고타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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