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 마태오 25,31-46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9,1-2.11-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작은 이’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내가 책임질 사람입니다. 그들을 ‘모른 체했으니’ 나도 너를 모른 체한다는 게 주님의 말씀입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작은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사는 것이 두려운 이들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될는지요? 희망 외에 대안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의 말과 희망의 몸짓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감옥에 갇힌 ‘작은 이’는 부정적 시각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먼저 그 대상이 ‘내 자신’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스스로를 편견과 열등의식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면 빨리 그곳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완성은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종말의 구원 역시 그분께서 허락하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언제라도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작은 이들’을 그분처럼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사순 1주간 월요일 - 양과 염소
저와 함께 사시는 한 신부님이 사기를 맞을 뻔 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지금 유학 1년차이기 때문에 로마에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에 차가 서더랍니다. 젊잖게 생긴 청년이 밀라노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빠지는 길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유명한 모 의류회사의 디자이너로 근무한다고 하고 자신이 디자인한 가죽코트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동차 연료 게이지를 보여주며 연료가 다 떨어졌는데 연료 넣을 돈을 조금만 빌려줄 수 없느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용하는 신용카드가 작동이 안 되어서 돈도 뽑을 수 없다고 하며 답례로 그 코트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도와주고는 싶지만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보여주었던 코트를 바로 집어넣으며 싹 가버리더랍니다.
저는 이런 사례를 이전에 들어 본 일이 있어서 같은 수법의 사기꾼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나중엔 연료 값 외에 코트 재료비라도 조금 달라고 해서 그것까지 받아내곤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비슷한 사기를 당해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정말 친절하게 다가오고 큰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사기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을 판단해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도가 정말 순수한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오시어 모든 사람을 양들과 염소들로 나누는 심판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양들은 자신들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에게 해 준 것들이 바로 그리스도께 한 일인지 모르고, 염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그들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해 주지 않은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두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라고 하며 그리스도께 되묻기 때문입니다. 이는 두 부류 모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베푼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해 준 것”임을 모르고 선행을 행했든 그렇지 않았든 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베풀었으니 그들의 사랑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기 전에 양과 염소로 나뉘어져있습니다. 양은 이미 세상에서 양대로 살아왔고 염소는 또 염소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심판은 이미 그들이 하늘나라 들어가기 위해 한 행위보다 그들이 어떤 존재이냐에 따라 이 세상에서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느님나라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합시다. 그들의 자선이 분명 하느님나라에 기록되겠지만 그렇다고 염소가 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연말만 되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 자선을 하고 사진을 찍는 장면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 행동으로 그들이 모두 양이란 근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 여인이 절구질을 하고 있으면 한 여인은 데려가고 한 여인은 남겨 놓으신다고 하고 또 둘이 같이 밭을 갈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 놓으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질이 행동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물론입니다.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도 의도가 섞여 불순할 수 있음에도 그런 행동으로 자신들이 이미 양들이 되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양은 자신이 착한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내 자신이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참 믿음은 결국 그 사람의 본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사람 흉내 낸다고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으로 만족하지 말고 진정 우리 자신의 본질이 양인지 염소인지 먼저 살피고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명 설교보다 따뜻한 떡라면 한 그릇이>
신 새벽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도시에 홀로 내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그래서 오라는 사람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의 새벽, 참으로 막막합니다. 여행을 좋아했던 저는 젊은 시절 혼자서 이 도시 저 도시 많이도 쏘아 다녔는데, 새벽녘에 도착하면 숙소를 잡기도 그렇고, 날이 샐 때 까지 그저 서성댑니다. 때로 역 대합실에서 잔뜩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자기도 많이 했었는데, 당시의 그 스산함, 처량함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시간이 그리도 더디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첫차가 출발할 때까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조금은 맛보았습니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분들, 머리 눕힐 곳 없는 분들의 고초를. 어딜 가도 오라는 사람이 없는 분들, 어딜 가도 반기는 사람 없는 분들, 다음 끼니가 보장되지 않는 분들의 서러움과 막막함을.
그래서 때로 수백 번의 명설교보다도 따뜻한 떡라면 한 그릇이 훨씬 복음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따뜻한 관심 한번, 작은 배려 한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저는 자주 체험합니다. 때로 단 한 번의 환한 미소가 죽음을 향해가는 한 형제를 살려낼 수 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행이 확정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천국행 티켓을 확보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란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주변은 살펴보면 천사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얼굴 뵙기만 해도 마음이 안쓰러워지는 말기암환자들, 선뜻 찾아뵙기가 망설여지는 임종 직전의 형제들을 줄기차게 찾아가는 호스피스 봉사자들,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텐데, 얼굴은 언제나 천사 같습니다. 마치도 친부모 간병하듯 지극정성입니다.
돈 되는 일도 아닌데, 누가 칭찬해주는 일도 아닌데, 주말마다 갇힌 형제들을 찾아가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들 다가는 꽃구경 한번 안가십니다. 가족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전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사시사철 쓸쓸하고 허전한 영혼들을 어루만져주러 꾸준히 담장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친부모, 친형제보다 더 낫습니다.
노숙자들을 위해 하루 온종일 지지고 볶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식들한테도 잘 해주지 않는 ‘산해진미’를 산더미처럼 만들어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노숙자들에게로 달려가십니다. ‘우리한테 반만이라도 해봐라’는 자식들의 원성이 자자함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그 일을 계속 하십니다.
제대로 봉사하시는 분들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한번 시작했다하면 여간해서 그만두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티끌만큼의 대가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한 가지 , 나타나셨나 하면 어느새 ‘휘리릭’ 사라지십니다.
왜 그분들은 저리도 ‘쓸데없는’ 일들을 하고 계실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소리 없이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가시는 분들, 언젠가 하느님께서 주실 상급이 클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가지 못하시는 분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지? 우리는 바로 지옥행이네!’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몸이 아파서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가기는커녕 평생 도움만 받고 살았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되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봉사할 기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평생 십자가를 잘 지고 오셨지 않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반드시 당신 오른편에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해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가고픈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내 코가 석자라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하는 분들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뜻한 바를 실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 좋은 지향들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나이가 들어 몸도 성치 않은데, 기도 밖에 할 것이 없는데’ 하시는 분들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매일 와 닿은 고통과 십자가를 잘 견디는 것,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시는 것, 그것은 봉사 못지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제물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하지 말길 바랍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하길 바랍니다. 천국을 살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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