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 루카11,29-32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10
1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주 하느님, 주님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 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
○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주님의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주님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
○ 주님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주님 마음에 들지 않으 시리이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얽매이는 것이 싫었거나 아니면 남다른 취미 활동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말로써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을 체험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자 태풍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더구나 자기 때문에 무모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요나 1,12). 요나는 마음을 비웠던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죽음의 위협을 느꼈기에 회개했습니다. 요나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힘을 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뻔했던 사건들’은 모두가 은총입니다.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살아 있음’은 분명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청중들에게 요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 안에서 ‘하늘의 표징’을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사순 1주간 수요일 - 믿기 싫은 것은 아닌지
어떤 수녀원에서 부탁을 하여 그 수녀원의 창립 정신을 바탕으로 피정강의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저를 알고 있던 한 수녀님이 돌아오는 길에 함께 왔는데 그 원고를 뽑은 출처가 어디냐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쓴 것이라고 했지만 그 수녀님은 계속 인터넷 어디에서 뽑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엔 장난인줄 알았으나 나중엔 그 수녀님이 그 모든 것을 제가 썼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어서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수녀님이 수련 받으실 때 한 연세 든 수녀님이 돌아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믿을 분은 예수님뿐이고, 여자는 조금 믿어도 되고, 남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
돌아가시기 전에 참 희한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말씀이 그 수녀님께 영향을 많이 준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수녀님은 그 이후로도 제가 하는 말은 거의 믿지 않으셨고 그것은 저의 겸손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믿기 싫은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교리를 가르치다보니 교리서에 한국 천주교는 삼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즉, 소득의 30분의 1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십일조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적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시며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마태 23,23)이라 하시며 십일조도 잘 지켜야 하는 것임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천주교인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고 교리서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가끔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느냐고 신자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성경에 그런 말씀이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십일조를 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그런 말씀이 보이지도, 믿기도 힘든 것이 아닐까요?
과연 기적을 쫓아다니는 신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일까요? 혹 성경 말씀도 믿지 않는다면 왜 표징을 쫓아다니는 것일까요? 어떤 확실한 표징을 본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살아가게 될까요? 믿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그저 표징만 청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 사람들은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또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표징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은 세 명의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처음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인데 어린아이였고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짜고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더 큰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엔 나임이라는 곳을 지나시다가 과부의 젊은 아들이 관 속에 죽어 있는 것을 살리셨습니다. 조금 더 큰 사람이고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때였지만 역시 사람들은 확실히 믿도록 더 큰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번엔 라자로를 살리시는데 그가 무덤 속에서 며칠 푹 썩도록 기다렸다가 살려내십니다. 썩은 사람을 살려내도 사람들은 더 큰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급기야는 요나의 표징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냈던 것처럼 당신도 죽어서 땅에 묻혀 3일을 지내다가 스스로 부활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려봐야 소용이 없으니 당신 스스로 죽임을 당해 부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성경말씀은 전합니다. 이렇게 믿지 않으려는 사람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아야하기에 변화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먼 아프리카로부터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왔던 세바의 여왕, 그리고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던 니느베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바의 여왕은 먼 곳에서 찾아오는 노력을 할 줄 알았고 니느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믿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기적을 찾기 이전에 성경부터 믿고 실천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믿지 못하면서 표징만을 원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맙니다. 믿기를 원하고 노력한다면 표징은 바로 눈앞에 있고 굳이 기적을 요구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짝사랑의 괴로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체험하는 많은 일들 가운데 정녕 고통스런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응답 없는 사랑’ 다시 말해서 ‘짝사랑’이란 것,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쪽에서는 지속적으로 사랑을 보내는데, 다양한 몸짓으로, 여러 가지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이글거리는 눈길을 보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 눈길을 외면합니다. 딴전을 부립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한 ‘짝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짝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은 오가는 맛이 있어야 제격인데,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사랑은 일방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도 끔찍이 우리를 챙기시는데, 그리도 간절히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는데, 우리는 그분께로 눈길 한번 드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묵묵부답인 우리 때문에 늘 괴로우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결코 사랑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자유로움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예속되셨다는 것. 사랑스런 손자손녀 앞에서 꼼짝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속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완전무결하신 하느님, 우리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 없이는 하느님이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시고, 우리 없이는 행복하지 못하겠노라고 단언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사랑을 갈구하십니다. 이것처럼 큰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하느님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이 사건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구세주께서 죄인들 앞에 벌거숭이로 서셨습니다. 조롱의 표시로 병사들은 예수님께 홍의(紅衣)를 입힙니다.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웁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한갓 병사들 앞에 고개를 숙이십니다. 그 철없는 인간들은 존귀하신 예수님의 얼굴에 침까지 뱉는군요.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끔찍한 십자가 위로 자진해서 올라가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마음만 먹었다하면 지금까지의 최악의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킬 수 있는 능력의 예수님께서 인간의 횡포 앞에, 인간의 실수 앞에, 인간의 착각 앞에 침묵하십니다. 그저 조용히 희생제물이 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집요하게도 기적과 표징만을 쫓아다니는 백성들을 향해 강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들은 많은 경우 진정한 의미의 기적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 갑자기 먹구름이 걷히고 나타나는 십자표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암세포... 사실 이런 기적들은 대체로 유한한 기적입니다. 치유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치유의 은총을 입었다고 합시다. 끝없이 치유가 계속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영원히 살겠습니까?
결국 진정한 의미의 기적은 십자가의 기적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기적입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함을 통한 기적입니다.
우리가 매일 지고 가는 십자가를 얼굴 찡그리지 않고, 투덜거리지 않고, 오히려 환한 얼굴로,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지고 가는 것이 이 시대 또 다른 기적입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유능하지만,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만 기쁜 얼굴로 상대방의 밑에 서는 것이 또한 기적입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끊임없이 우리 인생 안으로 드나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무수한 십자가, 힘에 겨운 십자가 앞에 울고불고, 힘들다고, 외롭다고 외치며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십자가 중의 왕 십자가인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 고독과 소외라는 십자가, 배척이라는 십자가, 낙담과 내적 번민이라는 십자가, 이 모든 십자가를 나 홀로가 아니라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지고 오셨고, 앞으로도 함께 지고 걸어가실 것이기에 십자가 앞에서도 행복해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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