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 - 마태오 6,7-15

2009. 3. 3. 오전 8:06:17

글자
 
 

 3월 3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 마태오 6,7-15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분은 당신의 계획과 사명을 완수하시는 분이시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하늘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땅을 적시며 기름지게 한다. 주님의 말씀도 그러하다(제1독서).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라고 하신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빈말을 헛되이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모범 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남기셨다. 단순하면서도 유익한 기도문이다(복음).
 
<나의 말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시편 34(33),4-5.6-7.16-17.18-19(◎ 18ㄴ 참조)
◎ 하느님께서는 의인들을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도다.
○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다 함께 주님 이름을 높이 기리자. 주 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도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 ◎
○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주님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도다.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맞서시니, 그들에 대한 기억을 세상에서 없애시기 위함이로다. ◎
○ 그들이 울부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도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시도다.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주님의 기도에는 ‘아버지’란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 주님의 기도를 한 번 바칠 때마다 아버지를 ‘네 번’ 부르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많이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했을까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생각 없이 바쳤더라도 그만큼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틀림없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남겨진 일은 이제라도 그분의 자녀답게 사는 일입니다. 어떤 삶이 그것일는지요?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의 자녀로서 사는 것인지요? 예수님처럼 살면 됩니다. 물론 부족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쉬운 것부터 실천하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생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긍정적인 분이셨습니다. 제자가 팔아넘길 걸 아시면서도 비난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셨고,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셨고 그들 안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주님의 모습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답게’ 살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물론 방해하는 이들도 늘 곁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유혹입니다. 주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다는 유혹입니다.
 
 
 
연중 1주 수요일-기도할 때에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어떤 때 누가 와서 부탁을 하십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여 답을 못하고 있으면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제가 그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당신의 절박한 필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그것도 아니면 저의 선의에 대해 믿지 못하겠는지 한 말을 하고 또 합니다.
그러면 속으로 은근히 짜증이 나고  저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저도 하느님께 그러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왜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잘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가끔 저는 저의 어머니께 못된 말을 하곤 하는데,  “쓸 데 없는 걱정 하지 마세요!”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걱정을 쓸 데 없는 걱정이라니 얼마나 못된 말입니까?
어머니는 제가 저에 대해 걱정하는 것보다 더 걱정하십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저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못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위한다는 것이 어머니께 모질고 못된 말을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시지 않는 한  사랑이 강요하는 그 걱정을 멈출 수가 없으십니다.  하느님도 그러 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시고자 하시고 더 나은 것을 주시고자 하실 것이고, 우리가 바라는 때보다 더 좋은 때 주시고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주시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하게 청하고, 청하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해주시기를 청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도록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이해하지 못할 말로 복잡하고 장황하게 기도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사순 1주간 화요일 - 주님의 기도

신자들 중에서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하고 싶지만 앉아있으면 잡념만 들고 시간만 허비한다는 생각도 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혼자 자주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하라고 그 방법을 가르쳐주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가 전부입니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나서 밥을 먹기도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대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시간을 허비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만남으로 충분히 시간을 버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과 함께 있다면 그 함께 있다는 느낌으로 기도는 충분합니다. 피곤하면 그 분 앞에서 잠을 자도 됩니다.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고 휴식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형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둘이 만나서 싸운다면 그건 올바른 데이트가 아닙니다. 또 무엇을 해달라고 떼만 쓴다면 그런 만남도 사랑을 증가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만난다면 서로의 사랑을 나누고 증가시키기 위한 어떤 틀 안에서 만나야 하는데 주님의 기도가 바로 이 틀입니다. 이 내용 안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어떤 형식으로 만나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럼 주님과의 만남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기도를 통해 살펴봅시다.

  하늘에 계신: 태초에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지만 아담과 하와의 죄로 땅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이후로 땅은 사막이 되었고 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이제 죄의 땅이 아니라 하늘에만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기도드리기 이전이 나의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한지 먼저 성찰해야 합니다. 우선 하느님을 만나기에 적당한 상태여야지 온 마음이 땅처럼 더럽다면 그 분은 그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먼저 내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하여 그 분을 모시기에 적당한지 살펴보고 아니면 통회하고 죄를 먼저 뉘우쳐야합니다.

  우리 아버지: 내가 누구이고 누구와 만나는지 알아야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는지 예수님을 만나는지 성모님을 만나는지 성인들 중 누구 하나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지 상대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면 이것도 올바른 데이트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이유는 바로 당신과 하나 되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외엔 없습니다. 그 분이 독생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그 분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그분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관계가 가장 중요함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한 명의 구체적인 하와이고 이는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기도하고 있음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영광을 추구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분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버려야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나의 영광을 버리는 것이 결국 한 몸이 되어 그 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사랑하는 사람이 더 사랑하여 한 몸이 되기 위한 것이 만남의 목적이라면 기도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랑과 온전히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그 목적이고 희망입니다. 무엇을 위해 만나는지도 모르면 배가 산으로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곧 그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기도해서 더 평온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힘이 나지 않는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하나하나 되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목적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될 것이다.’에 집결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늘은 주님이고 땅은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시어 땅을 하늘과 맞닿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도 하늘까지 닿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신의 뜻을 죽이는 삶을 본받아야합니다.   이는 기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뜻이 내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 자신이 변화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나의 의무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서로간의 희생 안에서 성장합니다. 따라서 나의 의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은 결국 성령님입니다. 인간이 음식으로 살듯이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삽니다. 특별히 ‘오늘’이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음식을 하루에 세끼를 먹듯이 성령님을 채우는 노력도 매일매일 규칙적이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음식이 에너지가 되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소진되는 것처럼 영적인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사랑의 양식을 위해 구체적이고 규칙적인 기도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 부분만 다시 반복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이것만 공부하면 통과는 할 수 있을 거야.’라고 가르쳐주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나라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바로 ‘용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면 우리도 그분과 조금이라도 비슷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하는 것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닮고 싶다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면서 기도한다고 한다면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유혹을 이길 힘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혹을 이길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쯤이야 이겨낼 수 있겠지.’하며 유혹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피하지 않는 것 자체가 교만이고 죄의 시작입니다. 하와가 뱀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죄가 시작 된 것과 같습니다. 이 기도를 하면서 정말 겸손해 질 것을 다짐하고 그 은총을 청해야합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의심하여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구원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 손을 잡습니다. 이 이야기는 손을 내밀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구해주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교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도 다시 그 분께 손을 내밀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끝까지 손을 내밀지 않고 목을 매어 자살한 유다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어떤 죄든 손만 내밀면 그 분은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잊게 되면서부터 하느님과 남남이 되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너무나 자주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만 외우고 그 교훈을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이니만큼 그 기도 안엔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의미를 새기며 기도하려고 노력합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징징거리지 않아도>


   ‘초보신부’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말로만 듣던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동행하기로 하셨던 신부님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제가 대신 가게 되었지요. 철없던 시절이라서 그랬던지 엄청 신났습니다.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오는 천국 같은 곳을 수도 없이 다녔습니다. ‘죽기 전에 한번은 가봐야 할 텐데’ 생각했던 성지도 들렀습니다. 천사와도 같은 순례자들과 함께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긴 여정이었기에 출발하기 전에 나름대로 계획도 세웠습니다. 어디 도착하면,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누구에게 전화해서 만나야지, 어디 가면 달팽이 요리가 맛있다던데 꼭 맛봐야지, 어디 가면 포도주 맛이 기가 막히다 던데, 원 없이 마셔야지, 기념품 사려면 기본적인 대화는 익혀둬야지 하면서 ‘해외여행 필수 영어회화’도 한권 샀습니다. 백과사전을 펼쳐놓고 경유지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도 수집했습니다.


   그런 나름대로의 준비가 있어서 그랬던지, 성지순례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날마다 흥미진진했습니다. 낯선 세계와 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상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이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결여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회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향기를 맡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지순례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기도는 뒷전이고, 어떻게 즐길까,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돌아다닐까만 생각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엄청 창피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어찌 보면 일종의 성지순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는 여행입니다. 천국을 향해가는 여행길인 우리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들 모두 소중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계획인 ‘기도의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소홀하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 위한 계획,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한 계획, 그분의 풍요로운 자비의 품안에 오래 머물기 위한 계획, 결국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좀 더 시간을 투자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을 위해 ‘이것이 바로 기도’라며 하나의 모범답안을 제시하십니다.


   고대 근동 이방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장황한 기도(말잔치를 벌이는 식의), 잡다한 신들을 잔뜩 불러 모아놓고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동시에 집요하게 졸라대던 유치한 기도를 멀리 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징징거리지’ 않아도, 악을 쓰지 않아도, 눈에 살기를 띠고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우리를 챙겨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손녀 바라보듯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의 눈빛만 보아도 우리가 어떤 심리상태인지 파악하십니다. 우리의 안색만 보아도 우리가 안고 있는 걱정거리,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즉시 아십니다.


   청하지 않아도 소리 없이 다가와 일일이 챙겨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악하다 하더라고 끝까지 우리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지지해주십니다.


   이런 하느님 앞에 필요한 기도는 그분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지속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그분의 놀라우신 업적을 찬미하는 기도입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나도 사랑으로 그분께 응답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랑의기도입니다. 결국 이 모든 요소들이 포함된 주님의 기도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387번 / 주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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