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사순 제 2주간 월요일 - 루카 6,36-38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도 양보하라는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심판을 서둘러 하는지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내가 먼저 ‘감정을 섞고’ 언행을 높입니다. 별일도 아닌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분위기를 흐립니다. 때로는 침소봉대하며 떠벌립니다. 모두가 내 삶에 ‘어두운 기운’을 불어넣는 행위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을 만드는 것이지요. 먼저 양보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던 ‘업’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잠든 영혼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실천에 옮긴다면 매일매일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말씀입니다. 늘 부딪치는 관계를 새삼스레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순 2주간 월요일 - 반사
어릴 적 놀이 중에 ‘반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놀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남이 자신에게 안 좋은 말을 하면 ‘반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친구에게 바보라고 했다면 그 친구는 재빠르게 ‘반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반사’라고 외치면 상대는 ‘또 반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보라는 말은 서로 자신이 바보임을 인정하지 않는 둘 사이를 왔다갔다 거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복음에서 이 반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삶에 적용시키며 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랑 하여라. 그러면 사랑 받을 것이다.’
사랑을 받고 싶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하여라.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판단하지 마라.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많은 판단을 하고 삽니다. 그러면서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 ‘반사’의 원리는 이웃이 바로 나의 거울이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즉, 내가 이웃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 이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놓은 안 좋은 점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저는 그들이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둘은 참 닮은 데가 많아.”
그 친구는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를 챈 것 같았습니다. 내가 비록 행동하면서 살지는 않아도 내 안에 숨겨진, 혹은 억눌려진 안 좋은 면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타날 때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판단하는 꼴입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유다를 비롯해 사도들, 그 분께 은총을 받은 사람들까지 그 분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마음 안엔 배신의 마음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을 슬픈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로마에서 자칭 ‘바티칸 베테랑 가이드’라고 자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이드와는 달리 신학적인 면까지 첨가하여 가이드를 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가면 브라만테가 설계한 팔각정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칼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잘라 손으로 들고 있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머리가 잘려진 여자는 메두사입니다.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정작 포세이돈을 좋아하던 처녀신 아테나가 있었습니다. 포세이돈은 메두사와 아테나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고 아테나는 그것을 목격함으로써 크게 화가 나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녀의 눈을 보는 누구든 돌이 되게 해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영웅 페르세우스를 보내어 메두사를 죽이게 합니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로 메두사의 얼굴을 반사시켜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목을 벤 것입니다.
저는 이 동상을 볼 때마다 결국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보이는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재차 느낍니다. 메두사는 결국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렇게 죽게 된 것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이웃에게 화가 나는 것은 결국 나의 모습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합시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
형제들과 가끔씩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를 한편씩 보고 있습니다. 물론 수도자답게 수도원 시청각실에서, 비디오를 빌려서 봅니다. 교육자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영화, 폭력이나 선정성이 없는 영화, 그래서 다시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주는 좋은 영화를 골라야하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주로 이런 영화를 보지요. ‘여선생 VS 여제자’ ‘선생 김봉두’ ‘내 마음의 풍금’ 등등.
‘12세 관람가’의 영화, ‘야한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 ‘단 한명도 죽지 않는 영화’들이기에 밋밋할 수도 있겠지만, 조폭들의 무가치한 일상을 영웅적으로 그린,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을 자기도 모르게 폭력성에로 몰고 가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무가치한 영화들보다는 백배 더 낫습니다.
오늘은 ‘패왕별희’의 감독으로 유명해진 첸 카이커 감독이 제작한 ‘투게더’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정말 제대로 골랐더군요. 시종일관 진한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참부모란, 참스승이란 이런 모습이로구나, 하는 것을 잘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스꽝스런 모습의 아버지 리우청의 모습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색한 구식양복, 어울리지 않는 원색 와이셔츠에, 전혀 아닌 빨간 모자를 쓴 아버지, 아들 입장에서 보면 조금은 창피한 ‘촌뜨기’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아버지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신동이란 말을 듣고 자란 아들 ‘샤오천’의 장밋빛 미래를 위해 아버지는 그야말로 ‘전력투구’합니다. 아들이 훌륭한 교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아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바보가 되어도 좋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에게 입히기 위해 직접 뜨개질을 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오디션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봐 공연장에조차 나가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결국 아들의 성공을 위해 아들을 떠나가는 아버지입니다.
중요한 무대를 앞둔 어느 날, 지도교수는 바이올린 연주가 잘 안 된다는 소년에게 “네 연주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 ‘꼭 제자로 삼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밝힌 소년의 출생내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추운 겨울, 북경역을 지나던 아버지 리우청은 바이올린과 함께 한쪽 구석에 누워있던 갓난아기 샤오천을 발견합니다. 착해빠진 아버지는 추위와 배고픔에 자지러질듯 울어대는 아기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늘이 준 인연으로 여기고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 죽어가던 아기, 생모로부터 버림받은 아기,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북경 역에 누워있던 아기를 끌어안고, 그 아기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은 완전히 포기하는 아버지 리우청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 자비의 한 자락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자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의 인내, 풍요로운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펄쩍 펄쩍 뛸 것입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 흘릴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알게 되는 순간,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비를 맛보기 전까지 우리 삶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크신 자비를 깨닫는 순간 우리 삶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충만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크신 하느님 자비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면 다들 그저 불쌍한 존재, 측은한 존재,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는 사랑스런 존재일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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