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마태오 23,1-12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0.16-20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다.” 진리는 주님께만 유보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이론도 그분 앞에선 ‘참고 사항’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아는 사람’은 고개를 숙입니다. 낮추어야 할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스승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인지천산 불여 천지일산’(人之千算不如天之一算)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 번’을 계산해도 하늘이 ‘한 번’ 계산함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하늘이 한 번 봐주는 것에 못 미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늘의 힘이 개입하기에 그렇습니다.
옛날 신분제가 있을 때 도련님을 머슴 아들과 비교하여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면 칭찬을 들은 도련님이 머슴 아들과의 비교 자체를 수치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심사겠지요.
그런가 하면 대단히 속물적으로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당시 저의 주제였지요.
그러니 그 당시에는 비록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저의 세속성을 뛰어넘으려는 좋은 뜻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지독한 교만이 숨어 있었음을 저도 몰랐던 것입니다.
진정 제가 인간과의 비교를 초월한 그런 경지에 있었다면 그저 하느님 앞에 있을 뿐 아예 비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 우위에 서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그래서 탁월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듯 우리는 진정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하지 않은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고 하느님 앞에 같이 서 있는 존재입니다.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같이 하느님 뜻을 받드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받든다는 말은 ‘함께’라는, 즉 공동체성을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누구는 하느님을 더 잘 흠숭하고 받들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는, 그런 것이 없이 ‘모두 똑같이’라는, 즉 평등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어제는 수도원 당가 형제께 외국에 나가 있는 어른께 보낼 선물 좀 사다달라고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본다면 시장가는 김에 사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지만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한 번도 그런 것을 제 손으로 산적이 없는 저의 무의식 안에는 ‘나는 그런 것 살 줄 몰라’ 하면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손가락 하나 까닥하려 하지 않음이 숨어있습니다.
부탁해도 되는 사람 따로 있고, 부탁 받아도 되는 사람 따로 있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자기 손가락은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다른 사람 어깨에 큰 짐을 올려놓는 것이
그저 시장바구니 정도라면 그래도 낫겠는데, 그것이 자기 십자가든, 공동체의 십자가든,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신 그래서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닌지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십자가는 지지 않고 칭찬과 영광만 받으려는 그 날도둑놈의 심보가 있지 않은지 오늘 복음을 통해 들여다보는 오늘입니다.
사순 2주간 화요일 - 투명해져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칭찬은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이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해 주면 저는 너무 얼토당토하지 않아서 기쁨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그 다음 기분 좋게 들어본 칭찬은 이런 것입니다.
“제가 새로 간 성당의 보좌 신부님은 키도 크고 잘생기고 기타 치며 노래도 잘합니다. 다른 성당에서 신자들이 이 신부님을 보러 몰려들어요. 그러나 전 신부님이 더 좋아요. 왜냐하면 그 신부님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이게 하지만 신부님은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니까요.”
뭐 저도 잘 생겼다고 그래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튼 한 사제로서 듣기에 너무 행복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고 있지만 자신들이 가르치는 대로 살지는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가르침은 잘 따르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 자신을 반성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자리에 앉아 가르치면서 주위 해야 할 것은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 때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신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혹 지금의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신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똑 같은 비난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면서 첫 마음은 어떤 일을 하던 가장 먼저 나와서 가장 늦게 들어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늦게 나와서 가장 빨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이 하던 일들은 모두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정말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면이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제생활 얼마 안 했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전혀 생소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는 지금도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누구도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고 결국 다 평등한 형제들임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그의 자리에서 가르치는 일꾼들에게 잊어서는 안 되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걷지만 사람들이 자꾸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고 그래서 자연적으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성직자들은 이 나귀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정작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자신이 스승이 되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버리는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태양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끼고 보면 태양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는 마치 이 선글라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신자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중간에 서서 보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글라스에 이물질이 묻어 투명하지 못하다면 사람들은 태양은 보지 못하고 선글라스만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체현시를 할 때의 성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광은 예수님의 성체를 넣어 신자들이 볼 수 있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성광이 투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여 쓸모없게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투명하게 만들어 나를 통해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해야 합니다.
도로 표지판이 도로 한 복판에 있으면 안 되고 옆에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주님께 가는 데 도움만 주면 되지 그 앞을 가려 막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쓸모없는 종이 되는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 때문에 내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자리를 빼앗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삶을 원한다면 자신을 버리라는 주님의 이 말씀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말하기에 앞서 먼저>
여기저기 ‘꼭 오셔서 귀한 말씀 나눠달라’는 곳에 자주 다니다보면 스스로 ‘이게 아닌 데’하는 생각과 함께 사람이 좀 이상해진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쉽고 간결하게, 또 재미있게 풀이해서 전해드리고, 지치고 힘들어하시는 분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런 일들이 절대로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본인에게 손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솔직히 별 것도 없는데 사람들 앞에 그럴듯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사람들의 호응과 박수갈채에 맛을 들여갑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좀 더 극적인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과장해서 말도 하고, 거짓말도 자주 하게 됩니다.
결국 사람들 앞에 자주 서면 설수록 자신의 고유한 가치, 에너지가 고갈됩니다. 품위도 하락됩니다.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입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내면은 점점 공허해지고 자주 허탈감을 느낍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받고, 환호하고,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정작 나 자신은 우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들 역시 외면적인 삶은 그럴듯했겠습니다. 멋있게 차려입고, 어디를 가든지 귀빈석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들의 명 강의에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가르침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명 설교 안에는 자신의 박학다식을 드러내려는 사적인 욕심만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로서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저 이벤트 회사 사람의 노련한 이미지만 풀풀 풍겼습니다.
오늘도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 최고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떠벌이지 않고 늘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생길을 잘 걸어가고 계십니다.
사사건건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묵묵히 온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참된 스승으로서의 좋은 자질을 갖추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말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들, 말뿐인 사람들,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사람들,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던진 말에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말하기에 앞서 먼저 심사숙고하고, 말하기에 앞서 먼저 사랑을 실천하고, 말하기에 앞서 먼저 겸손의 덕을 갖추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