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토요일]세례자 요한의 죽음 (마태 14,1-12)

2018. 8. 4. 오전 6: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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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간 토요일]세례자 요한의 죽음 (마태 14,1-12)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신을 사형에 처하려는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아히캄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한다. (예레 26,11-16.24)
그 무렵 11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귀로 들으신 것처럼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12 이에 예레미야가 모든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13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14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15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16 그러자 대신들과 온 백성이 사제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24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헤로데 영주는 생일에 아내 헤로디아의 딸이 청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게 하여 선물로 준다. (마태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1독서(예레26,11~16.24)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15)

 

자신의 무죄함을 확신하는 예레미야는 본절에서 재판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만약 무죄한 자신을 죽이면, 그 부당한 죽음의 결과가

그들 및 그들의 도성과 백성들에게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내용의 서두에 나오는 본문은 원문으로 볼 때, 명령법이 아니라

그들이 이어지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에 해당하는 '아크 야도아으 테데우'

(ak yadoah thedeu)에서 '아크'(ak)는 '그렇지만', '그러나' 로 번역될 수 있는

대조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부사이고,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로 번역된 '야도아으 테데우'

'알다'란 의미의 동사 '야다으'(yadah)의 부정사 절대형과 미완료형이 결합한 형태로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구문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면, 그 피가 가해자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신명19,10), 예레미야 재판에 관여한 자들은

예레미야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무고한 재판의 필연적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경고했던 것이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후반절은 상반절에 나오는 바,

예레미야를 죽이는 일이 왜 무죄한 피를 흘리는 일이며, 왜 비참한 결과를

당해야 하는 것인지 분명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사제들과 예언자들의 고소처럼(예레26,8~9), 주님의 이름을

사칭하는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주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

참 예언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것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일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고 역설한다.

 

한편 본문에서 '참으로'에 해당하는 단어 '뻬에메트'(beemeth)는 전치사 '뻬'(be)

'진리', '진실' 나타내는 명사 '에메트'(emeth)가 결합한 형태이다.

전치사 '뻬'(be)는 기본적으로 '~안에'(in)란 뜻을 지닌다.

 

그러나 '뻬'(be) 특색이나 상황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설명은 후자의 입장을 취해서 '뻬에메트''진실로'(truly;

for of a truth)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뻬에메트'란 표현에는 '진리 안에서'(in truth)라는 의미의

뉘앙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이 나타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확실히', '참으로'

보내셨다는 의미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들려',

'진리의 말씀만을 전하도록' 보내셨다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예언, 즉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 대한

어두운 예언주님께서 주신 진리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과 예언자들을 대표하여 예레미야를 대적한 자들이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주님의 이름을 사칭한

거짓 예언으로 몰아붙인 것은 그들 자신이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18,37).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마태14,1~12)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8~11).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에서 '부추기는 대로'에 해당하는

'프로비바스테이사'(probibastheisa; being before instructed; prompted)

'~앞에'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프로'(pro) '폭력을 사용하다',

'강제로 들어가다' 등의 뜻을 지니는 '비아조'(biazo)가 결합되어

'앞으로 내세우다', '선동하다'라는 뜻을 지닌 '프로비바조'(probibazo)의

분사 수동형이다.

 

이것은 어린 살로메가 간교하고 사악하며 잔인한 어머니 헤로디아의 강압에

가까운 권유에 따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에서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도스'(dos; give)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부정 과거 명령형은 반복되는 동작이 아니라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동작을 요구할 때 쓰인다.

 

또한 '이리'라는 뜻의 부사 '호데'(hode; here)가 사용되어 바로

잔치가 벌어진 그 장소에서 이 일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살로메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른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세례자 요한의 즉각적인 처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임금은 괴로웠지만'에서 '임금'('호 바실류스'; ho basileus;

the king)이라는 말이 세례자 요한의 순교 기사가 수록된 마태오 복음

14장 1~12절 가운데서 여기만 나온다.

 

1절에서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분봉왕'('테트라아스케스'; tetraarches;

tetarach)이라는 표현이 한 번 나온 후, 계속 '헤로데'(Herodes)란 이름이

나오다가 본문에서 '분봉왕'이 아니라 '임금','왕'이라는 직함이 등장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처형 결정의 기로에 놓인 이러한 시점에서 특별히 '임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임금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가 임금으로서의

권한만을 행사하는 데 대한 조롱과 고발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괴로웠지만'에 해당하는 '뤼페테이스'(lypetheis; was sorry;

was distressed)의 원형 '뤼페오'(lypeo)는 여기서 수동형으로 쓰였는데,

이럴 경우 '슬퍼하다', '마음이 상하다', '고민스럽다'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닌다.

 

당시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의로운 이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이 들고 마음이 상했을 것이고, 또한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소요 사태에 대하여

고민도 하는 혼란 가운데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원문 성경에는 '맹세'에 해당하는 '투스 호르쿠스'(tous horkoos;

the oath's sake; of his oaths)가 복수형으로 나와 있어서

헤로데 안티파스가 그 자리에서 여러 차례 맹세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맹세를 되돌릴 수가 없었다.

 

당시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6장 21절에 의하면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이었다.

 

자신의 그릇된 맹세와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에 불의(不義)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례자 요한의 처형을 명령한 이러한 행동에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비열함

잘 나타난다.

 

한편, '소녀'에 해당하는 '코라시오'(korasio; girl; damsel)의 원형

'코라시온'(korasion) '처녀'를 뜻하는 '코레'(kore)의 지소어(指小語)로서

'작은 소녀'라는 뜻을 가지며 다소 경멸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소녀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샬롬'(shalom)에서 파생한 '살로메'이며, 당시 나이는 15세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평화'였으나 그녀는 전혀 평화에는 기여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던 위대한 예언자를 죽게 함으로써

역사에서 악녀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14장 11절을 보면, 죄와 쾌락에 눈이 어두워

실로 주어서는 안되고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을 태연스럽게

주고 받는 비극의 역사가 연출되고 있다.



[오늘의복음]연중 제17주간 토요일(8/02)




<세례자 요한의 죽음>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판하다가

그것 때문에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14,3-12),

그 내용만 놓고 보면,

요한의 죽음을 헤로데와 헤로디아라는 개인의 죄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선포했고(마태 3,1-2),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죄를 특별히 더 엄하게 비판했습니다(마태 3,7).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에 대한 요한의 비판은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요한의 비판 속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헤로데와 헤로디아만 요한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은 모두 요한을 미워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헤로데와 헤로디아라는 개인이 요한을 죽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이 요한을 죽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사사로운 살인죄가 아니라,

당시의 집권 세력에 의한 공적인 박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살인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헤로데가 했다는 말도(마태 14,2)

헤로데 개인의 말이 아니라,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불안감을 대변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였던가?

우리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인 것인가?" 라는 불안감.


(이것은 양심의 가책은 아니고, 미신적인 불안감입니다.

양심의 가책은 자기가 한 일이 죄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미신적인 불안감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하고 불길한 불안감입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예언자들은

요한처럼 사람들의 죄를 꾸짖다가 요한처럼 미움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그렇게 박해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죄를 꾸짖는 예언자적 활동을 하는 이들이

미움 받고 박해를 받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회개를 하기는커녕

예언자들을 죽여서라도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려고 합니다.

듣기 싫은 말이 안 들린다고 해서 자기들의 죄가 덮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런데 정말로 세례자 요한은, 또 예언자들은 꼭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사람들의 죄를 꾸짖는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고,

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박해받고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예언자는 원래 그렇게 박해를 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사람들의 살인죄가 당연하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박해자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언자들이 회개하라고 꾸짖을 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당연한가?

아니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것이 당연한가?


만일에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했다면,

요한은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영혼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요한을 죽인 일은,

요한 쪽에서 보면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떠난 일이 되지만,

헤로데와 헤로디아 쪽에서 보면,

그들 자신들이 자기들의 영혼을 죽인 일이 됩니다.


그들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멸망하는 길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요한의 죽음에 동조한 기득권층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들이 미움 받고 박해받고 살해당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운명이 아닙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죽이신 것과 같고,

살인자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언자들의 죽음이 당연한 일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십자가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특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은 다 당연히 죽도록 고생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부러 고생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가다보면 힘든 길을 만날 수도 있고,

죽을 고비를 만날 수도 있고,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편한 길을 만날 때도 있고,

죽을 위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체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종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기쁨과 행복은 주님을 충실하게 따름으로써 얻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몸이 많이 고달프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이 기쁨과 행복은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오늘 예수님의 운명을 예시하는 세례자 요한의 최후 소식을 듣습니다. 갈릴래아와 페레아를 다스리는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이는 요한이 전하는 말이 자주 헤로데에게 충격을 주었음을 드러냅니다. 복음에서 요한의 표상은 그의 출생부터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점에서 선구자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요한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의 회개를 외친 사절이요, 썩어 없어지지 않는 진리의 증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유일한 죄라면 예수님과 같이 생명으로 대가를 치른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러 이 세상에 왔다가 내적 자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이복형제인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하려고 첫째 부인을 버렸기에, 요한은 이 혼인을 율법에서 금지된 것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비난하였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보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진리와 정의를 외치는 의로운 이를 감옥에 가두어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끝내는 죽음으로 내몰고 맙니다. 제1독서에서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외치는 예레미야의 말을 깊이 새겨 봅시다.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헤로데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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