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목요일]행복하다 (마태 13,10-17)

2018. 7. 26. 오전 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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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목요일]행복하다 (마태 13,10-17)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은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저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고 한다. (예레 2,1-3.7-8.12-1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3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
7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8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12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13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신다. (마태 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제1독서(예레2,1~3.7~8.12~13)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 (2~3)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2)

 

예레미야서 2장 2~3절은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태동기, 즉 출애굽 광야 시대에하느님과 선민 사이의 순결하고 복된 사랑과 보호의 관계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즉 시간상으로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형성기인 출애굽 시대를 회상하는 내용인 것이다.

 

여기서 출애굽 시기는 인생의 태아기로부터 노년기에 이르는 기간 중에서 가장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 시기인 청년기, 즉 혼기에 접어든 성숙한 여성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네 젊은 시절의 순정' '신부 시절의 사랑'은 그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다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여기서 '네 젊은 시절'이란 구체적으로 '신부 시절'을 가리키는 것이며, '사랑''순정'과 동의어이다.

 

특히 '신부 시절'이라는 의미의 '켈룰로타이크'(kelulothaik)의 원형 '켈룰라'(kelula)는 구약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되는 명사로서 '신부''며느리'를 의미하는 명사 '칼라'(kala)에서 유래하였으며, 결혼 자체의 의미보다는 '신부의 상태나 조건'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에서 '사랑''아하바'(ahaba)는 결혼 생활을 통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결혼을 앞둔 약혼 상태에서 오고 가는 순수하고 달콤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은 법적으로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갖기 때문에 (창세19,14; 탈출22,16; 마태1,18) 본절의 표현은 혼인 계약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의 '순정'(hesed) '사랑'(ahaba)라는 표현을 두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사랑하였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느님께서 그 깊으신 뜻 가운데 많은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므로 값없이 먼저 사랑하셨고, 또한 그들과 영원한 사랑의 계약을 체결하셨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분명 하느님의 순정과 사랑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시 하느님께 순종하여 그 사랑의 계약을 소중히 여기고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섬길 것을 맹세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순정과 사랑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사랑의 친교(교감)전체를 통틀어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앞서 말한 '네 젊은 시절의 순정' '신부 시절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로부터 광야 생활까지를 통틀어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은 그때에 그들은 경작하거나 추수할 수도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느님만 의지하여 살았음을 하느님 편에서 회상하시는 내용으로 묘사된다.

 

당시 그들의 신앙은 '나를 따랐다'란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즉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대해 그림자처럼 당신을 떠나지 않고 철저하게 따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결혼의 계약 안에서 신랑이 신부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처럼, 아무런 소출도 없는 광야에서 남편이신 하느님께서 신부인 이스라엘의 필요를 공급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신부가 자신의 공급자인 신랑을 따르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자신의 공급자이며 자신의 영적 남편이신 하느님을 신실하게 따르고 의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신실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회상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 말씀을 듣는 청중들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선민들로 하여금 지금도 여전히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고 계신 그들의 보호자 주님을 기억하고 옛 이스라엘처럼 이제 신실한 백성이 되라는 도전과 격려의 메시지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3)

 

본절에서 '주님께 성별된''그분 수확의 맏물'이스라엘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해 대구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대구를 통해 이스라엘이 선택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성별된'이라는 의미의 '코데쉬'(qodesh)'거룩하게 하다', '구별하다' 라는 의미의 동사 '카다쉬'(qadash)에서 유래하였으며, 하느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 나타난 '거룩함'의 본질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하느님 자신이시다(레위19,2).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속성으로서의 거룩함(탈출15,11)을 갖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도 성별된 거룩한 이름이며(1역대29,16), 또한 하느님께 속한 성별된 것들도 거룩하다.

 

예를들어 안식일을 다른 6일과 구별하여 거룩한 날로 정하셨다(탈출16,23). 또한 '코데쉬'를 이중으로 사용하여 '거룩한 것들 중에 거룩한 것' (qodesh haqqodasim ; 코데쉬 학코다쉼)이라고 표현되는 지성소하느님을 위해 구별된 장소이므로 거룩하였다(탈출26,33).

 

이외에도 '거룩한 옷'(탈출40,13), '거룩한 제단'(탈출40,10), '거룩한 성별 기름'(탈출37,29), '거룩한 땅'(탈출3,5), '거룩한 일'(탈추36,4) 등  하느님을 위해 구별된<성별(聖別)된>많은 거룩한 것들이 존재하였다.

 

이스라엘도 특별히 하느님께서 많은 민족들 중에서 선택하셔서 구별하셨기 때문에(신명7,6)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었다.

 

특히 2절과 함께 3절의 '주님께 성별된'이란 표현은  하느님께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모든 민족들 중에서 선택하여 당신 백성들 삼으셨다탈출기 19장 4~6절의 내용 연상케 한다.

 

한편, '맏물'(첫 열매)에 해당되는 '레쉬트'(reshith)소출로서는 첫 수확이나 최상의 상품을 나타낸다.

 

하느님의 백성은 제정된 제사 규정에 따라 해마다 처음 익은 열매를 제일 먼저 하느님께 드려야 했다(탈출23,19; 민수3,13).

 

이처럼 '맏물'(첫 열매)을 드리는 행위는 '하느님께서 모든 소출(소산)의 주인이심' 표현하는 신앙 고백에 빗댈 수 있는 것이었다(민수18,12~18).

 

그런 점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맏물'(첫 열매)이라고 칭하신 것은 하느님의 소유로 구별하셨다는 성별(聖別)의 의미하느님을 위해 가장 좋은 열매로 엄선하셨다는 최상의 선택의 의미를 내포한다(레위2,12; 23,10).

 

그러나 과거 이스라엘의 이러한 상태와 현재 상태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현재 이스라엘은 우상을 따라가기 때문에 주님께 속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으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고발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성별된 이스라엘의 수호자였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거룩한 것을 접촉하거나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었다. 대사제의 임직식에 사용된 제물은 대사제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 먹도록 제한되었다(탈출29,33.34).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제물은 사제와 레위인들만 먹을 수 있었다 (레위7,6~14; 신명18,3.4). 사제나 그 가족이라도 부정한 사람은 제물로 드려졌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레위22,6). 또한 사제의 집에 함께 거할지라도 외국인이나 객이나 품팔이꾼은 거룩한 예물을 결코 먹지 못했다(레위22,10).

 

이와같이 하느님을 위해서 구별된 거룩한 예물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한도내에서만  접촉하거나 먹을 수 있었다.

 

한편, 본문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거룩한 예물을 더럽힌다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이 침해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됨을 선언한다(레위22,15.16).

 

이방 민족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삼킨다면, 아말렉족이 징벌을 받았던 것처럼(탈출17,8~16)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징벌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시리아 제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빌론 제국도 비록 징계의 채찍으로서  남부 유다를 침략하는 것이 허용되었을지라도, 그들은 결국 멸망의 징벌을 받는 것이다(예레51,1~3; 54~56).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무조건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님을 위한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오히려 그 백성이 이방인처럼 거룩함을 상실하고 이방 신들을 따라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고 이방인처럼 취급하여 당신 자신의 명예를 지키실 것이라는 암시가 본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외부의 적들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들 또한 물리치시는 분이시다.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3,10~17)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5)

 

여기서 '무디고'에 해당하는 '에파퀸테'(epachynthe; is waxed gross; has become calloused)'두껍게 만들다', '살찌게 만들다'는 일차적 의미와 '마음을 무감각하게 하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동사 '파퀴노'(pachyno)의 부정 과거 수동태형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들 스스로가 아닌 제3의 존재에 의해서 무감각해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사야서 6장 10절에 의하면,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백성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두껍게 살찌게 만들어 무감각하게 하는 주체는 예언자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자이다.

 

그러나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백성들이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고, 죄로 기울어지는 인간 본성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며,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에 쉽게 길들여지고 타협하며 죄짓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그 마음이 더욱 완고해지고 사악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완고하고 사악하게 만드는 주체는 바로 죄스런 인간 본성으로 가득 차 있는 백성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주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고쳐 주다'로 번역된 '이아소마이'(iasomai; I should heal)'치료하다', '(병을)고치다'(루카9,11)는 의미를 지닌 동사 '이아오마이'(iaomai)의 직설법 미래 1인칭 단수이다.

 

그런데 이 문장 앞에 '결코 ~하지 않도록', '혹시라도 ~하지 않도록'이라는 의미를 지닌 부정어 '메포테'(mepote)가 있어서, 직역하면 '결코(혹시라도)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도록'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고쳐 주지 않기를 바라는 주체는 백성 자신들이 아닌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 완고한 사악한 상태의 백성들을 고쳐 주기를 거부하는 것공의로우신 하느님께서 회개의 여지가 없는 완고하고 사악한 그들을 심판의 자리에서 보자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라는 로마서 1장 28절의 내용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13장 16절이하에 나오는 데로, 구약의 많은 예언자와 의인들은 천국 비밀의 그림자만 보았을 뿐실체를 보지 못했으나(히브11,39), 비록 예언자도 의인도 아니지만 예수님 바로 곁에서 그분을 통해 천국의 실체와 그 비밀들을 보고 듣는 제자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 되는 것이다.




2016년 7월21일 목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가진 사람

 

세상 것에 눈이 밝으면 영적인 것을 놓칩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영원히 귀한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중복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겔러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과 나의 일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육을 넘어 영혼의 맑은 눈과 귀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영을 갈망하는 가운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둘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때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상처 받고 아파할 사람은 그만큼 관계의 형성이 덜 되었으니 비유가 편할 것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에게는 직접얘기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많은 사고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외에는 다른 이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에게 비유로 말씀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에게는 바로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듣느냐? 말과 표상을 통해 제시되는 실재를 파악하느냐는 분명 다릅니다. 분명 믿는 이들은 속뜻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 입맛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과 사실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자로(子路)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冉有)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論語-先進)”. 비유를 통해서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먹고 싶은 것만 먹음으로써 병을 만듭니다. 마음이 무디고 건성으로 보고 듣는 사람은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유는 넘치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풍요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찾고자 하면 발견되는 것이고 찾을 의도가 없으면 감추어진 채로 있게 됩니다. 능력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은 보고 들은 것을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과 그 사랑을 가진 자는 날이 갈수록 더 넉넉해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것을 가진 이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함께야). 속뜻을 알았으면 뜻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듣기 싫어, 그만해라!' 하는 완고함으로는 하늘 나라 신비를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0-13)


여기서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저 사람들은 복음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라는 뜻입니다.

(‘허락되었다.’, 또는 ‘허락되지 않았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 대우하신다는 뜻의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시는데,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를 겉으로만 보면, 마치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만 은총을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주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못 받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 잘 알아듣게 되고,

그래서 더 잘 믿게 되고,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는데,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더욱더 못 알아듣게 되고,

그래서 믿음에서 더 멀어지게 되고,

또 믿었다면 받을 수 있었던 은총도 못 받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사실 사도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알아들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사도들은 이해하고 나서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 믿고, 나중에 믿음을 통해서 깨닫고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우선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깨달을 때가 오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욱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안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비유를 사용해서 그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라는 말씀과 듣지 못하고”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장애가 있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보여 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말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입니다.

“깨닫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의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여기서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보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당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예로 들거나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끝끝내 보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고집 센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비유 자체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이 말씀은 ‘반어법적 표현’이 사용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귀와 눈과 마음을 닫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셔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은총을 보여 주셔도 보려고 하지 않고, 구원하려고 하셔도 믿지 않습니다.

여기서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려고 해도 그들 자신들이 거부한다.”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라고

말하면서 놀라긴 했지만,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만 생각하고서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마태 13,55-57).

그들은 말씀을 들려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들은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 일이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고,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마태 12,24).”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 라고 말했습니다(마태 12,23).

똑같은 일을 보았으면서도 반응이 이렇게 다른 것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 탓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보았으면서도 그 일은 ‘사탄의 일’이라고 말한 바리사이들은

보려고 하지 않아서 못 본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나자렛 사람들이나 바리사이들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읽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또 적극적으로 묵상하거나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자렛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태도입니다.

어떤 은총 체험에 관한 증언을 해도,

‘옛날이야기’ 같은 이야기라고만 생각하면서 비웃거나 무시한다면,

그것은 바리사이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은 태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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