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목요일]내 멍에 (마태 11,28-30)

2018. 7. 19. 오전 5:14:39

글자

  [연중 제15주간 목요일]내 멍에  (마태 11,28-30)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베푸신다고 고백한다. (이사 26,7-9.12.16-19)
7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8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9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16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17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18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19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고 하시고, 당신 멍에는 편하고 당신 짐은 가볍다고 하신다.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이사26,7-9,16-19)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8)


앞선 26장 1절ㄴ에서 7절은 장차 구원의 도성에 입성하는 자들의 환희와 믿음의 선포를 소개하였다. 이제 8절 이하 15절까지는 구원의 도성에 입성하는 자들이 노래하는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에 대한 신앙 고백 소개된다.

 

이러한 내용은 네가지 신앙 고백 형태 제시되는데, 각각의 신앙 고백은 두 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첫번째 단락인 8절과 9절에서는 심판을 통하여 공의를 실현하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심정이 고백된다.

 

먼저 본문은 주님의 진실한 백성들이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과 구원을 바라보면서 그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장차 아루어질 구원에 대한 확신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아는 믿음은 그의 구원을 확신하게 하며, 나아가 악한 자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은 현재의 삶에 비록 고난이 많다 할지라도, 그의 나타나심을 인내로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해당하는 '오하르 미쉬파테카'(ohar ishiphateka)문자적으로 '당신의 심판의 길' 이라는 의미이다. 심판의 길에서 하느님을 기다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심판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하느님을 대망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신의 판결에 따라'에 해당하는 '미쉬파테카'(mishiphateka)의 원형 '미쉬파트'(mishiphat)는 법정에서 행해지는 판결이나 심판을 의미한다. 신명기 4장 8절에서는 '법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무엘 하권 22장 23절에서는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열왕기 상권 6장 12절에서는 '규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역대기 상권 16장 12절에서는 '판결'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종합해 볼 때, 본문의 '미쉬파테카'(mishiphateka)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면서 그 통치의 규례로 사용하시는 법칙, 또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판결(판단)의 기준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에 해당하는 '키우위누카'(qiwuynuka)의 원형 '카와'(qawa)참을성 있게 마땅히 바랄만한 것을 기다리고 대망하는 것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사실상 하느님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주님은 그들의 삶 속에서 눈으로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손으로 확실히 느껴지지 않는 영적 존재이시다. 나아가 그 하느님은 비록 악인들이 세상에서 불의를 행하여도 그것을 모른체 하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중도에 신앙을 버리고 악한 자들의 편과 자리에 서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 제시된 참 하느님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마치 보는 것처럼 참고 기다리는 자들이다(히브11,27). 하느님은 당신이 정하신 종말의 날에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며, 그 인내와 진실에 대해 성실하게 보상하심으로써 당신의 신실하심을 만천하게 드러내실 것이다(히브11,6).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당신 이름'(주의 이름)에 해당하는 '쉬므카'(shimka)는 주 하느님의 고유한 위격과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주 하느님은 거룩한 이름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 이름에 부합한 일을 행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신실한 의인들에게 인자를 베푸시고, 교만한 악인들을 진노로 벌하시며, 자신을 의탁하고 신뢰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며, 필요한 때에 도움과 구원을 베푸신다.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는 것' 에서 이 '기억'이란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과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실 때 보이셨듯이, 하느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당신의 은혜로우심과 전능하심 등과 관련된 기억을 의미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이 영혼' 해당하는 '나페쉬'(naphesh)는 단순히 '영혼'이라는 의미이며, '소원입니다'에 해당하는 '타아와트'(thaawath)'열망', '소원', '갈망' 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적으로 '영혼의 갈망'(the desire of the soul)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전존재를 다하여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도록 소망하고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순수하고 단순한 것이며,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9)


9절의 상반절은 주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토로하는 8절의 내용이 연장되는 예언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원문상으로 8절의 마지막 단어가 9절의 맨 처음에 또 다시 나온다는 사실이다. 즉 8절과 9절 두 구절은 '네페쉬'(nephesh)라는 단어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 단어는 본래 '호흡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생명'(1사무19,11), '마음'(1사무18,1), '숨'(창세2,7), '마음'(에제36,5), '목숨'(창세12,13)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네페쉬'라는 단어가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도 생명의 핵심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밤에'에 해당하는 '빨라울라'(ballaulla)매우 큰 어려움을 당하는 때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즉 그 밤은 주님의 광명이 비추지 않는 때이며, 주님의 의로운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이다. 또한 그 밤은 악인이 횡행하고 궁핍한 자가 억울하게 착취를 당하는 때이다. 그 밤은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이며, 의(義)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는 때이다. 그러한 때에도 하느님의 백성들은 생명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였다.

 

'당신을 열망하며' 해당하는 '이우위티카'(yuithika)의 원형 '아와'(awa)'바라다', '소망하다','열망하다'란 의미를 지닌다(신명14,26 ; 시편106,15 ; 잠언13,4 ; 23,3).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사랑의 열정이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본문에서 '저의 넋' 해당하는 '루히'(ruhi)는 본절 상반절에 있는 '저의 영혼'에 해당하는 '나프쉬'(naphsh)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 단어의 원형 '루아흐'(ruah)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심령(영 ; spirit)을 지칭하며, 이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영적 교제를 나누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저의 영혼'이라는 표현과 병행하여 사용되었으므로,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그리고 생명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모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풀이된다.

 

그리고 '당신을 갈망합니다' 해당하는 '아샤하레카'(ashahareka)의 원형 '샤하르'(shahar)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하며(판관19,25),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모두 12회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하느님을 간절히 구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욥기8,5 ; 시편63,2 ;78,34 ; 잠언1,28 ;8,17 ; 호세5,15).

 

어원적인 의미와 연결시켜 보면, 이 단어는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깊이 사무쳐서 잠을 설치면서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하느님을 찾는 당신 백성의 열렬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더 강조되어 있다.

 

동시에 미완료 시제로 쓰여 그토록 하느님을 찾는 것을 물론,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하느님과 만나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의인들의 진정한 소망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시편78,23).

 

특히 현실적으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악과 불의와 억울함이 자행되기에 인간의 한계를 너무가 잘 알고 있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찬란한 태양처럼 임하시면, 죄악과 불의의 깊은 밤이 사리지고 세력이 약화될 것이기에, 주 하느님을 간절히 소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은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3장,4장).

 

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카이'(kai; and)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묵시14,13).

 

그리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prays; gentle meek)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키며(마태5,5),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humble; lowly)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 (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취하셨고(이사42,2.3;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셧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yoke)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이사야 예언자의 기도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주님께 희망을 걸고, 비록 지금은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일이 ‘밤’이라는 어두움과 고통 속이지만, 하느님을 향한 인간 영혼의 열망과 갈망이 얼마나 간절하며 희망적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하고, “해산하였지만, ……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하는 슬픈 현실의 외침은, 무릇 이사야 예언자의 시대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저출산의 세상에서도 겪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자가 갈망해 온 하느님 나라의 도래, 곧 하느님께서 창조 질서를 회복시켜 주시고,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의와 불공평, 폭력과 거짓을 거슬러 참된 평화와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의 이 짧고 명료한 예수님 말씀이 주는 위로는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짐, 내가 버리고, 포기하고 싶은 멍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십자가가 부활의 희망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함께 걷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언제나 가시밭길만은 아닙니다. 살면서 하느님께서는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통해 겸손을 가르치시고, 내 아픈 멍에를 통해 숙명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십니다. 인생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여정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인주를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 옛사람들이 들려주는 교훈입니다. 현대식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화장품 가게를 자주 가면 향수 냄새가 배이고, 생선 가게를 자주 드나들면 비린내가 난다.’ 성당에 자주 가면 어떠한 향기를 내겠습니까? 바로 겸손의 향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병들고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만 그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반대하며 시비를 걸어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대처하지 않으시고 여유와 인내로 받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더욱 존경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승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셨기에 승복하였습니다. 그 첫자리에 겸손한 모습이 있습니다.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겸손의 향기를 지녀야 합니다. 사랑과 겸손의 자세가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꾸지람과 회초리가 아이들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따뜻한 격려와 애정이 그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 앞에 서면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약함도 인정하려 합니다. 겸손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덕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 마음을 배우기를 원하오니 거룩한 주님의 겸손과 온유함을 저희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내 멍에는 편하다

-반영억신부-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셨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감당하면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하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요한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한계, 죄스럽고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령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