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목요일]중풍 병자 (마태 9,1-8)

2018. 7. 5. 오전 6: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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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간 목요일]중풍 병자 (마태 9,1-8)


아모스 예언자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지만 주님께 붙잡혔다며,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고 한다. (아모 7.10-17)
그 무렵 10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가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집안 한가운데에서  임금님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
11 아모스는 이런 말을 해 댑니다.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갈 것이다.’”
12 그런 뒤에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는 ‘이스라엘을 거슬러 예언하지 말고  이사악의 집안을 거슬러 설교하지 마라.’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아내는 이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네 땅은 측량줄로 재어 나누어지고 너 자신은 부정한 땅에서 죽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으니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마태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아모7,10-17)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14)


앞선 10-13절 기록된 북부 이스라엘 아마츠야의 아모스 예언활동에 대한 악의적 호도와 협박과 회유 이어, 14절이하 17절에는 아모스의 답변 나온다.

아모스의 첫번째 답변은 자신이 예언자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하야'(haya)동사가 기록되지 않아, 아모스가 과거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현재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자신은 종교적 기득권에만 연연하는  당신과 같은 직업적 종교인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아모스가 이런 당당한 태도를 갖는 것이 예언 행위를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이나 직업과 관련시키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래서 영역본 중에는 본문의 전반부를 "나는 당신같은 직업적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 (I'm not one of your professional prophets.)로 번역한 것이 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이 예언자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첫째, 아모스가 당시 하느님의 계시와 무관하게 혈통을 따라 세습되던 직업적 종교인이 아님을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열왕기 하권 2장 3절, 4장 1절등에 제시된 예언자 학교 생도(제자) 출신이 아니라는 언급으로도 볼 수 있다.

셋째, 어느 특정한 예언자 단체의 회원이 아니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아모스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직업적 예언자도 아니고,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예언자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런 본문의 아모스의 주장에는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나는'에  해당하는 '아노키'(anoki)가 두번이나 사용되었다.


즉 본문은 아모스가 예언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반복하여 강조하여 묘사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다른 예언자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한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하는 예언의 신적 기원과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본절 상반절에서 자신은 직업적  예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계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하반절에서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직업을 소개한다.


즉 자신이 생계를 위해서 예언 활동을 하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의도로 제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모스는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언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생계에 지장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을 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먼저 '목자'에 해당하는 '보케르'(boker)는 구약 성경에서 본문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원어의 표현은 '노케드'(noked)이다. 이는  새끼 양 십만 마리와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친 모압의 왕 메사를 언급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모스는 흔히 생각하는 가난한 목자라기 보다는 상당한 재력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돌무화과나무' 에 해당하는 '쉬케밈'(shiqemim)의 원형 '샤캄'(shaqam)은  팔레스티나 저지대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sycamore-figs)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가꾸는'에 해당하는 '볼레쓰'(boles)의 원형 '빨라스'(balas)는  '모으다' 혹은 '관리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무화과 나무과 같은 식물들을 심고 가꾸어 자라게 했다기보다는 야생으로 자라는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서 파는 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모스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신을 예언자라고 소개하지 않고 목자와 농부로 소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신 사실을 부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15절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이 북부 이스라엘에 전한 모든 예언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말씀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본문은 아모스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 활동을 감당하는 자신과 사제직에 대한 소명은 없이 직업적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아마츠야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며, 자신이 북부 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하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마태9,1~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4~5)


마태오 복음 9장 4절'아시고'에 해당하는 '이돈'(idon; knewing)원형'호라오'(horao)로 추정되는데, '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의 마음속까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관찰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시편 7장 10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심장, 즉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으로 계시된다.


천주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도 전지전능하신 신적(神的) 속성을 가지고 계셨기에 즉시 율법 학자들의 마음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는 내용은 마르코 복음이나 루카 복음에는 없고, 마태오 복음사가가 첨가한 부분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율법 학자들의 생각이 하느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보호하려는 율법의 근본정신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은 결국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병고침의 기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죄사함의 기적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당신 자신이 바로 그 권세를 지니신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음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부각시키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의 일차적인 독자인 유대계 크리스챤들에게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확하게 알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편, '어느 쪽이 더 쉬우냐?'에서 '쉽다'는 의미로 번역된 '유코포테론'(eukopoteron; easier)은 '좋다'는 뜻의 부사 '유'(eu)'일하다',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코포스'(kopos)의 합성어로서 '일하기 좋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보다 쉽다' 혹은 '보다 알맞다'는 비교급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가시적인 결과가 요구되는 선언이지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은 선언의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율법 학자들은 유다인들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에 입각해서 죄로 말미암아 병이 생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를 가지고 병을 먼저 치유하면, 그 병의 원인인 죄가 자동적으로 없어진 것이니,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9장 2절에서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그 선포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고,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선포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이다.


7월 6일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내가 죄인이라서 벌을 받는구나. 또는 내가 못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외부에서 오는 위기인지 아니면 연약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님께서 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2006년 7월 6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중풍 병자는 혼자서 자기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갑자기 병에 걸려 손발을 쓸 수 없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지 알게 됩니다.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살던 사람은 병에 걸린 자신보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존심의 상처를 더 크게 느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병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손가락질할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예언자라고 해도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보다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회심을 먼저 일으켜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병으로 마음과 몸이 옹졸해진 중풍 병자는 치유를 받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법을 가장 잘 안다는 율법 학자는 병의 치유라는 하느님의 능력을 눈앞에서 보고도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며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죄의 용서가 하느님께 유보된 권한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던 율법 학자의 눈에 예수님은 신성 모독을 저지르는 불경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자신들의 기준에 가두어 두려던 율법 학자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치유가 오히려 병자에게서는 일어납니다. “일어나 …… 집으로 돌아가거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본향, 곧 하느님께 돌아가려면 내 몸과 마음을 가두고 있는 죄를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중풍 병자처럼 죄를 용서받아 치유를 얻고 일어나 이웃을 향해 걸어갈 날을 기다립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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