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수요일]가라 (마태 8,28-34)
아모스 예언자는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한다. (아모 5,14-15.21-24)
14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만군의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21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22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23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2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두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들의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한다. (마태 8,28-34)
예수님께서 호수 28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31 마귀들이 예수님께, “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3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제1독서(아모5,14~15.21~24)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만군의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14~15)
'행선피악'(行善避惡)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계명과 율법의 중심사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함'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고, '거룩함'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가르침이며, 하느님과 일치하고 구원받기 위해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며, 이것의 실천 여부에 따라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심판의 원리이며 근거이다(시편37,27; 잠언12,2).
본문은 이러한 하느님의 심판 원리가 북부 이스라엘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북부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을 피하는 길은 지금까지 행하여 온 악을 멈추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본문은 물론 표면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셔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란 의미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 표현의 이면에는 하느님을 떠나 악을 행하면서도 선민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에게는 심판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하느님께서 여전히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는 북부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꼬집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당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되게 의지하는 내용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약속을 받은 선민이라는 의식이다.
예레미야 예언서 7장 8절~11절을 보면,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향해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맹세 심지어 우상숭배까지 자행하면서 여전히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고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확신하는 자신들의 구원은 사실 그들이 내세우며 말하는 바와 같이 선민으로서 합당한 삶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만군의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느냐의 여부는 그들의 말에 상응하는 선민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사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감안할 때 본문은 만군의 주 하느님께서 북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평화롭고 복된 삶이란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서 갖는 축복의 확신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그대로 행할 때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궁극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만군의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 (15)
앞의 14절에서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 주어졌다.
그런데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그대로 이행할 때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14절의 형식이 15절에도 사용되고 있다.
즉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공정(정의; 공의)을 세워야(행해야) 구원을 얻는 남은 자가 될 것이란 약속이 주어진다.
14절과 15절은 앞의 11절에서 경고된 필연적 심판을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아모스를 통해 전해지는 예언은 단지 심판과 멸망에 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구원을 얻는 방법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선을 사랑하라는 15절의 표현은 14절의 선을 찾아라는 표현과 대구를 이룬다. 그리고 내용상 이 두 구절은 6절의 주님을 찾으라는 내용과 이어진다.
14절의 '찾아라'에 해당하는 '띠레슈'와 '너희는 (주님을)찾아라'에 해당하는 '띠레슈'는 동일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5절에서 사랑하라고 한 '선'(tob)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이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15절의 상반부에서는 구원의 조건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악을 그치며 사회적 공의(공정; 정의)를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였고, 15절의 후반부에서는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은 북부 이스라엘에 행해질 심판을 피해 남은 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어쩌면'(혹시)이라고 번역된 '울라이'(ullai)는 일차적으로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 불확실한 경우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이전의 죄악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가 반어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강한 소망을 암시하기도 한다.
15절의 후반부의 경우에는 '울라이'가 '혹시나 ~할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고, '반드시 ~할 것이다' 혹은 '반드시 ~하기를 원한다'는 확고한 의지와 소망을 피력하는 내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용례가 창세기 16장 2절에서 사라가 자신이 잉태하기 불가능한 나이가 되자 자신의 몸종인 하갈과 아브라함을 동침시키려고 하였고, 성경저자는 그 때 하갈을 통해서라도 자녀를 얻기 원하는 사라의 강렬한 의지를 '울라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또한 여호수아서 14장 12절을 보면, 갈렙이 '울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낙 사람의 성(城)을 자신의 기업으로 주면 반드시 정복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따라서 본문은 선을 사랑하고 공의를 행하면 요셉의 남은 자들을 구원할 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볼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반드시 남은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복음(마태8,28~34)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29) 예수님께서 "가라."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2)
영적 존재로서 영적 지각력이 뛰어난 존재인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의 아드님'에 해당하는 '휘에 투 테우'(hye tou theu; the son of God)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람들에 의해 고백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명칭은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적 명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데, 이러한 사람들의 고백 이전에 더 먼저 마귀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지하였고, 예수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티 헤민 카이 소이' (Ti hemin kai soi; what do you want with us)에서 '당신'으로 번역된 '소이'(soi)와 '저희'로 번역된 '헤민'(hemin)은 여격의 형태인데, 직역하면 '저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이것은 '당신께서 저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또는 '저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는 뜻으로서 자신들의 주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사적 질문이다.
그리고 '때가 되기도 전에'로 번역된 '프로 카이루'(pro kairou; before the time; before the appointed time)라는 표현은 먼저 마귀도 종말론적 심판과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권세의 종말이 올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임했지만 그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과 마지막 도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구약에서 돼지는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기짐을 하지 않으므로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어(레위11,7; 신명14,8) 그것을 먹는 일이 가증스런 일로 여겨졌다(이사65,4).
하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 있어서 돼지는 주요 음식이었고, 돼지 사육은 주요 수입원이었다.
본 사건의 배경이 되는 가다라인들의 지방은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이었으므로 돼지를 사육할 수 있었다.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 5장 11절에는 2천 마리라는 구체적인 수가 제시된 반면에, 마태오 복음사가는 능력을 행하시는 그리스도께만 초점을 맞추기 위해 구체적인 보도를 단순화시켜 '많은'에 해당하는 '폴론'(pollon; many)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마태오 복음 8장 22절에서 호수로 빠져들어간 주체인 '돼지 떼'를 단수형으로 취급했지만, 물에 빠져 죽은 존재에 대해서는 복수형으로 취급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기에서 '돼지 떼'로 하여금 내리 달려 호수로 들어가게 만든 내면적 동인은 '마귀'가 제공했지만, 실제 죽은 것은 '돼지 떼'였음을 나타내는 문학적 기법을 썼다.
그렇다면, 왜 마귀는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였을까?
이것은 그곳 사람들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원인을 예수님께로 돌려 예수님을 경계하게 하고, 그 지방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마태8,34).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셨지만, 사람의 영혼 생명이 물질적인 재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마귀가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셨다고 본다.
돼지보다 젖소가 좋다
-반영억신부-
돼지가 젖소에게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보다 너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죽은 후에 햄이며, 베이컨에 족발, 삼겹살 곱창까지 몽땅 주는데 말이야?" 그러자 젖소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내 생각에 말이야 넌 죽은 후에야 모든 걸 주지만 난 살아생전에 우유며 치즈, 좋은 것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돼지는 새김질을 못해 구약에선 더러운 짐승으로 먹지 못하게 했고,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사람들은 먹지 않습니다. 가나안과 시리아, 로마 사람들은 돼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돼지를 키우는 일조차 금기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지역은 하느님의 뜻이 전해지지 않는 곳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돼지를 키웠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돼지 취급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이방인지역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으로 마귀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고장에서 떠나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돼지들이 죽었으니 예수님께서 거기에 머무신다는 것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벌써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악의세력인 마귀가 죽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경제적 손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돼지를 잃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을 모시지 못하고 악의 세력이 자리할 때 이방의 지역이 되는 것이요, 그곳에 죽음이 온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방 지역이란 다른 곳이 아닌 내 삶의 자리 한 가운데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남을 위해 배려하지 못하고 나중에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이기적인 마음, 힘들이지 않고 한몫 챙기려 하는 한탕주의, 소위 용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하는 미신행위, 가정을 뒤 흔드는 향락을 쫓아 즐기는 행위 등등 우리 삶의 자리가 유혹의 자리요, 이방의 자리가 되고 있으며 죽음의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사람들을 뒤 흔들었지만 예수님께는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역을 가만히 지나가시는데도, 견디지 못하고 빨리 멀어지기를 바라면서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못 쓰고 꽁무니를 뺐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들이 아무리 날뛰더라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근심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방황하면 마귀는 다가오고 절망이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를 하느님을 모신 자리로 빛내야합니다. 결코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여 하느님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누구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느님입니까? 세속입니까? 사실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을 못살고 있을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며 공정한 마음을 지키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 차별 없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봉헌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을 하려거든 돼지 보다 젖소가 되어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아모스 예언자의 선포에는 성경을 관통하는 예언자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곧 세상 속에서 선과 악이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자비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께 대적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어 하느님을 거부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마귀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았기에, 결코 대적할 수 없는 하느님의 능력 앞에 자신들의 존재감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몰아낼까 봐 두려워하고, 결국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물속에 빠져 죽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예고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을 얻으려면 세상의 악과 타협하는 일을 끊어 버려야 하지만, 그렇게 살려면 포기하고 잃어버릴 세상의 즐거움들이 너무 많을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리워하면서도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는 주저하는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세상의 악을 이기는 선의 승리는 화려한 축제나 잔치, 생색내기 예물 봉헌이나 위선이 아니라,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임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악의 존재를 몰라서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악과 죄를 알면서도 선을 사랑하는 데 주저하기에 세상에는 마귀들의 유혹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시편 저자의 말씀을 오늘 하루 새겨 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