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원수 사랑 (마태5,43-48)

2018. 6. 19. 오전 6: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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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원수 사랑 (마태5,43-48)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을 내리시어,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한 아합의 죄를 물으시자, 아합은 단식에 들어가고 주님께서는 재앙을 늦추신다. (1열왕  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 (마태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합의 최후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1열왕21,17~29)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 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27~29)


열왕기 상권 21장 20~26절까지는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아합과 이제벨을 향한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 신탁과(20~24), 저자가 아합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을 부연하여 밝힌(26, 27절) 내용이 기술되었다.

이어지는 21장의 마지막 단락인 27~29절에서는 하느님의 심판 신탁을 들은 아합의 회개와 그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심판 유보 사실을 기술한다.

그 중에서 본문은 다섯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의 회개하는 행위 마치 눈 앞에서 이루어 지듯이 자세히 묘사된다.


옷을 찢거나(2사무13,19; 욥기2,12,) 맨 몸에 자루옷을 걸치는 행위 (굵은 베로 몸을 동이는 행위; 2열왕6,30)는 전형적인 회개의 모습이었으며, 단식을 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자기 부인의 표현이다.

그리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니는 것 행보를 천천히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종의 근신의 표시로 일상생활 모두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내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렇게 아합이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는 결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는 자였다.

백성을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게 하여 파멸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22절) 자신이 돌보아야 할 백성인 나봇을 탐욕으로 인해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의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아합에게 크나큰 자비를 베푸시어 심판 실행을 유보하여 주신다(29절).

이처럼 극악무도한 아합의 회개까지도 받으시는 하느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징계하시지만, 죄인이 회개할 때에는 죄인 자체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때의 아합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아합의 모습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아합은 하느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에 의해 자신에게 임할 재앙이 자신을 비켜 아들의 시대로 옮겨가자, 몇 년이 못 되어 다시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아람과 전쟁을 벌이다가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22,37.38).


즉 엘리야가 먼저 선언한 대로 그의 가문 전체의 파멸은 일시적으로나마 그가 보인 겸손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로 잠시 유보되었지만, 비참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아합 개인에 대한 심판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 예언은 아합 이후 아하즈야를 거쳐 요람 시대에 예후의 쿠테타로 성취되어진다.


'그 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28)

아합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또 다른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첫번째 신탁 나봇을 죽이고 그의 기업인 포도밭을 강탈한 아합왕과 그의 일가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였으나, 본절 이하에 나오는 두번째 신탁 심판을 유보하신다는 메시지였다.

아합 같은 악인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진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따라서 내려지는 자비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고 자비로운 성품에 근거해서 내려지는 신적 자비이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이사42,33; 마태12,20) 죄인이 죄를 떠나 회개하면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29ㄱ)

의문문으로 되어 있는 본문은 죄인이 하느님 앞에 회개하여 돌아오자마자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잘 드러내준다(루카15,7).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유발했던 행위를 나타내는 새 성경의 '(자신을)낮춘 것' (겸비, 겸손)에 해당하는 '니크나으'(niknah)의 원형 '카나으'(kanah)'무릎을 꿇다','엎드리다' 라는 의미이며, 본문처럼 수동형일 때에는 '낮아지다'(2열왕22,19),'뉘우치다'(2역대32,26)라는 의미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합이 하느님께 대적하기를 멈추고 하느님 앞에 낮아져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자, 이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고 심판을 유보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한편, 본 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비가 부각되는 내용이 수록된 것은 저자가 본장에서 강조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서 저자가 속한 당시의 상황과 이를 일차적으로 읽을 대상들, 즉 하느님의 징계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독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서 저자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은 죄로 인한 것임을 아합의 범죄와 이에 대한 심판 선언을 통하여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심판 선언 이후에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같은 본문의 결말은 궁극적으로 이를 읽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29ㄷ)

본문의 '그의 아들' 요람을 지칭한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아합의 아들 요람은 예후의 활에 맞아 전사하여 나봇의 밭에 던져지게 된다(2열왕9,21~26).

한편, 이렇듯 아합의 죄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부당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아비의 죄로 인해 죄의 책임을 자손들에게 전가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불의한 아비로 인해 의로운 자손을 처벌하시는 분은 더더욱 아니시다.


그러므로 본문의 심판 예언은 하느님께서 아합의 아들이 어떤 인물임을 이미 알고 계셨고, 아버지의 악한 영향을 받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당신이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같은 일들을 예고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심판의 시기를 유보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받아들이는 아합의 아들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아합이 회개를 통해 가문이 멸절되는 심판을 유보받은 것처럼 이를 전해 듣는 아합의 아들 요람도 그의 아버지와 같이 회개하였다면, 그 심판은 지속적으로 유보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마태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3~45ㄱ)


마태오 복음 5장 43절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두고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 '사랑해야'와 '미워해야' 대칭을 이루고, '네 이웃을' '네 원수는' 대칭을 이룬다.

문장 구조를 보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네 원수를 미워하는 것'같은 비중을 지니는 가르침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하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표현은 모세 오경이나 예언서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자는 성경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당시 유다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보편적인 교훈이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고, 이민족과 반민족적인 동족들의 압제를 받고 있었기에, 이들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고 증오심을 갖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을 지적하시며, 이웃 사랑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44절'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에서 '사랑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가파테'(agapate; love)의 원형 '아가파오'(agapao)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 단어로서, 자기 희생적인 순수한 사랑을 나타낸다.

사실 인간 본성적으로 생각하면 원수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상이 원수라 할지라도,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하신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누가 베풀 수 있는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지어 사탄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과 원수가 된 자신을 하느님 몸소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조건없이 사랑하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그 사랑을 확신하고 체험한 자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체와 말씀 앞에 아담과 하와의 이기적이고 본성적인 자아를 내려 놓았을 때, 비어진 우리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러한 원수 사랑을 실천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에서 '기도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로슈케스테'(proseuchesthe; pray)의 원형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을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스'(pros) '기도하다', '원하다'는 뜻의 '유코마이'(euchomai)의 합성어로서 '~을 위하여 간구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 지체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원수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자세로 나아가는 영적 수준까지 이르러야, 완덕(完德)의 근원이시고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마태오 복음 5장 45절(ㄱ)'너희 아버지의 자녀'에 해당하는 '휘오이 투 파트로스 휘몬'(hyoi tou patros hymon; the children of your father)에서 '아버지의'번역된 '투 파트로스'(tou patros)는 소유격이다.

희랍어에서 소유격은 그 속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어서, 여기서 '아버지의 자녀''아버지를 닮은 자녀', '아버지의 속성을 가진 자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로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림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6월 17일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 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구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2016년 6월 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정의는 무섭습니다. 나봇의 피를 흘리면서 포도밭을 차지한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에게 내린 하느님의 처벌은 ‘동태 복수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 임금에게 말씀하십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제벨에게 말씀하십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단식하는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자녀들이 다다라야 할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은총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용서하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미운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외면하고 피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사랑할 대상에게 한계와 조건을 설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처럼 절대적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습니까?
자신의 약점과 죄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의 증오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면서 원수를 사랑하시는 표양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인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몸소 보여 주시니 우리가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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