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수요일]부활 (마르 12,18-27)

2018. 6. 6. 오전 5: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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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9주간 수요일]부활 (마르 12,18-27)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안수로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라고 한다. (2티모 1,1-3.6-12)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물음에,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신다. (마르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독서(2티모1,1-3.6-12)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6-7)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의 은사를 다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과거 자신이 안수했을 때 하느님께서 티모테오에게 주셨던 은사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 구절은 티모테오 전서 4장 14절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라는 말씀과 상통한다.

몰론 표현의 차이는 다소 드러나지만, 이 둘은 거의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티모테오 전서 4장 14절에서는 티모테오에 대한 안수가 원로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내 안수로' 언급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디아 테스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 무'(dia tes epitheseos ton cheiron mu; through the laying on of my hands ; by the putting on of my hands)에서 전치사 '디아'(dia)는 '~에 의해서'( by), '~을 통하여'(through)라는 의미로서, 이것은 곧 '나의 안수를 통하여'가 된다.

 

그렇다면,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개인 안수를 받은 것인가?  아니면 원로단의 안수를 받은 것인가? 

당시 초대 교회의 관례를 보면, 티모테오는 원로단의 안수를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안수를 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티모테오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자신(2티모1,1)의 계승자요, 대리자요, 영적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은사' 번역된 '토 카리스마 투 테우' (to charisma tu theu;the gift of god)에서 '카리스마'(charisma)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리스마'는 본래 '거저 주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리죠마이'(charizomai)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코린토 전서 1장 7절, 코린토 후서 1장 11절, 로마서 1장 11절 등에서 나타나는 바오로 사도의 특유한 용어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성령께서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교회의 건설과 선익을 위해 베푸시는 은혜와 능력(특은)을 말한다.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며 교회를 다스리고', '참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을 식별해서 그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은사일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로 하여금 이러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한편, '안수'로 번역된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epitheseos ton cheiron)에서, '에피테세오스'는 본래 '얹어 놓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티테미'(epitithemi)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70인역(lxx)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이것은 '손'(타스 케이라스 ;tas cheiras)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사도6,6 ;8,19 ;13,3 ;1티모5,22) 안수 행위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 행위는 안수하는 자를 통하여 안수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능력이나 축복, 그리고 권위등이 전달되는 것을 상징한다.

 

티모테오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은사를 부여 받았다. 그런데 티모테오 전서 4장 14절에서 바오로는 이 은사가 '예언을 통하여' 부과되었다고 첨언하고 있는데,'예언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기 보다는 '예언과 함께 동반된 것'임을 드러낸다.

아마 이 예언은 티모테오가 안수를 받을 때, 안수에 동참한 원로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베푼 교훈을 가리킬 것이다. 결국 이 예언은 테모테오가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께서 부르신 사람으로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여기서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는 사목적 직책과 소임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받은 은사가 외적이거나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은혜라는 점을 '그대가 받은'(호 에스틴 엔 소이; ho estin en soi ; which is in you)이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네 속에 있는' 이다. 곧 티모테오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목적 소임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은사를 이미 부여받았으므로, 그 받은 은사를 다시 불일듯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불태우십시오'라고 번역된 '아나죠퓌레인'(anazopyrein)본래 '계속해서 새롭게 불타오르도록 하다', '계속해서 극렬하게 타오르도록 하다' 라는 뜻을 지닌 '아나죠퓌레오'(anazopyreo)의 현재 부정사로서,'티모테오 안에 있는 은사가 새롭게 불타오르도록' 이라는 의미이다(to kindle of fresh ; to fan into flame).


바오로가 보기에, 티모테오는 거룩한 하느님의 사목을 위임받던 당시의 은사들이 식지않고 계속 뜨겁게 타오를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당시 나이가 어렸던 티모테오는 내적으로는 교회 내에서 활동하던 거짓 교사들로인해, 그리고 외적으로느 점차 가중되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탄압으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로마 감옥에 있었던 바오로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 티모테오에게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사목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안수받을 때의 일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무릇 모든 그리스도교 봉사자들은 그들 자신이 받은 일들이 아무리 보잘것 없고 작은 일일 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한 특별한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맡긴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 for)가 포함되어 있어서, 티모테오에게 그의 안수식을 상기시켜 그가 부여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워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를 밝힘에 있어, 바오로는 영어의 'not ~ but' 용법처럼, 전자를 부정함으로 후자를 보다 강조하는 '우 ~ 알라'(u ~alla)란 표현을 사용한다.

 

바오로가 먼저 부정하는 것은 '비겁함의 영'이다. '비겁함의'로 번역된 '데일리아스'(deilias)는 본래 '의기소침함' 이나 '비겁함', '두려워함'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비겁함의 영' 곧 '의기소침한 마음'이나 '비겁한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번역되고 이해됨이 타당하다.  바오로가 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티모테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마음 혹은 정신 ;프뉴마 ;pneuma)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힘의 영'이다. 여기서 '힘'(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메오스'(dynameos)는 바오로 특유의 표현으로, 로마서 1장 16절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어구에서 강력하게 표명된 바로 그 힘(능력)이다.


나아가,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사랑의 영'이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아가페스'(agapes)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표명된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서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이다(1요한4,18).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부여하는 것은 '절제의 영'이다.

여기서 '절제의 영'으로 번역된 '소프로니무스'(sophronimus)의 원형 '소프로니스모스'(sophronismos)는 '보존하다'(루카17,33)라는 의미의 동사 '소죠'(sozo)와 '생각'이란 뜻의 명사 '프렌'(phren)의 합성어로서, '근신하다', '통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소프로니죠'(sophronizo)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자기 통제'(self-control)을 말한다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12,18-27)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5)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26ㄴ)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27ㄱ)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에서 원문에 있는 '알르'(all')의 기본형 '알라'(alla; but) 번역이 생략되어 있다.

'알라'(alla)는 주로 절이나 문장들 사이에서 정도의 차이나 대조를 나타낼 때 '그러나'의 뜻으로 쓰이는 접속사인데, 여기서는 '오히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활한 사람이 장가 시집을 가기는 커녕 '오히려' 하늘의 천사들과 같게 된다이 말씀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견해를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며,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알라'(alla)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혼인하고 자녀를 낳으며, 나중에는 결국 죽는 현세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혼인하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늘 나라도 창조하셨다는 것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사람이 천사와 같은 '지위'의 존재가 됨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부활 후 인간은 혼인의 문제에 있어서 성적(性的)이고 생식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 땅의 현세적 존재와는 전혀 다른 존재, 영원 불사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천사'를 언급함으로써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성경관을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만족 때문에 성경을 왜곡하여 부활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존재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말씀들(창세19,1.15; 28,12; 32,1)을 의도적으로 비켜갔다.


한편, 마르코 복음 12장 26절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서 '되살아난다'에 해당하는 '에게이론타이'(egeirontai; rise; rising)'일으키다', '다시 살리다'라는 뜻을 갖는 '에게이로'(egeiro)의 직설법현재 수동태이다.


부활 논쟁에 있어서의 부활 시점은 미래인데, 여기서 '에게이로'(egeiro)현재 시제가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부활' 교리 문제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였다고 하는 것은 부활이 죽은 이의 능력이나 자연 발생적 사건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능력, 즉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을 암시한다.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이 모세오경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던 것(마르12,19)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모세오경 중에서 답변을 이끌어내셔서 그들을 반박하신다.

그것이 바로 탈출기 3장 1~6절의 말씀인데,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신 말씀이다.

원문 성경은 동사를 생략하고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22장 32절에는 '~이다'라는 뜻의 '에이미'(eimi) 동사 현재형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여기서도 그 뜻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시면서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신 것 그들의 하느님 되심이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가 이 말씀을 들었을 떄는 이미 그 조상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죽은 지

오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하느님께서 죽은 그들을 부활시켜 거느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미 부활하여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이 육체적 죽음으로 그들의 모든 것이 끝났다면,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도 끝난 것이다.

그러나 모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언제나 현재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불리는 것은 아브라함과 아사악과 야곱이 살아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지금 여기서 찾는 영원한 생명의 보화

-기경호신부-


사두가이들이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력화 하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한 여인이 일곱 형제와 살다가 죽었다면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12,25)

부활은 현세의 연장이나 육신 생명의 재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변화를 말합니다. 부활은 시간과 공간, 인간의 지식과 감각 세계, 그리고 세상의 질서에 갇혀 있지 않은 하느님의 신비요 은총이지요. 부활의 신비는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오직 성경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12,24) ‘카이로스의 선물’이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이며, 부활의 때는 하느님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가는 절대적인 시간입니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 늘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총의 현재’인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여정도, 나의 인생길도 그렇게 하느님의 얼과 호흡 안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연속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12,27) 따라서 나의 물리적 조건과 시간,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어, 내 안에 변함없이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요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육신을 지니고 시간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사두가이들처럼 거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알게 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까닭이지요.

사두가이처럼 부활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연연하고 애착을 두게 되겠지요. 나아가 육신의 죽음은 곧 끝이라는 생각과 믿음을 지니게 됨으로써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 너머로 이어지는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도 갈망도 사라져버립니다.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안과 근심걱정과 동거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즐기고 욕구 충족을 하는데 몰두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심각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때에도,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절망하거나 체험해버립니다. 그 안에 보화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신 주님을 추방해버린 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내가 살아가는 순간마다, 내 삶의 모든 계기에 의미가 되어주시고 희망이 되어주시며, 생명을 혼을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내 마음과 혼에 모시고, 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고 체험하여, 삶의 자리에서 생명의 보화를 찾아 나누는 희망의 축제, 사랑의 축제를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겠습니다. 영원의 선물이 지금 나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재미있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현세에서 일곱 형제가 다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가 죽어 하늘 나라에 가면 누가 그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 할 것인지 묻습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떠한 모습을 가질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의 기준은 현세의 상황을 하늘 나라에까지 끌고 가는 자세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현세에서 우리는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고, 우리의 몸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우리는 불멸의 질서로 편입됩니다.
하늘의 질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존재 형태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시대를 거쳐 세상은 무수한 변화를 겪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현존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삶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생명이 보존되고 살아 있는 그 범주에 우리가 현존하는 것입니다. 그 삶은 다시는 고통과 죽음이 없는 경지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의 세계에 빠지는 영혼들은 살아 있는 하느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생명의 세계에 머무는 영혼들은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불멸의 생명을 받습니다. 죽음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거룩하게 살다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과 절제의 영을 지녀 하느님께서 부르신 목적을 완성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요한5,29)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부활 논쟁>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중략)...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마르 12,18-23)”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모세의 규정은 신명기 25장 5절-10절에 있습니다.

이 규정은 강제 규정은 아니었고, 권고 사항이었습니다.

어떻든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1) 부활은 없다.

2) 만일에 부활이 있다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그냥 부활이 없는 것이 낫다.

(사두가이들의 주장에는, 만일에 부활이 있다면, 그 ‘삶’은 ‘지금의 삶의 연속’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두가이들이 말한 ‘일곱 형제의 이야기’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만든 이야기인데, 구약성경에 비슷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다(토빗 3,8).”

(결혼식만 따지고 보면, ‘토비야’는 사라의 여덟 번째 남편입니다.

앞의 일곱 명의 신랑들도 정식으로 결혼식을 한 사람들입니다.

만일에 사두가이들이 사라의 이야기를 인용했다면, “사라는 여덟 명의

신랑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1) 부활은 있다.

2) ‘부활 후의 삶’은 ‘지금의 삶의 연속’이 아니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삶이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 완전히 새로운 생명, 완전히 새로운 인생입니다.)

3) 부활 후의 세상에서는 아무런 갈등도 없고, 복잡한 문제도 없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는

말씀은, 부활 후에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모든 본능과 욕망과 욕심과 이기심 등을 초월한,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 같은 것도 없고, 인간 세상의 복잡한 문제들도 없습니다.

오직 기쁨, 사랑, 평화만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는 몰라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질문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당신 앞에서 살아 있음을

직접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지상에서는 죽어서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생명이 끝나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 주신 일은,

“부활은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죽어서 소멸되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하느님은 ‘죽음이라는 것’에게 당신의 자녀들을 빼앗기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영원히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은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죽음이라는 것’에게 당신의 자녀들을 빼앗기는 분이라면,

즉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없는 분이라면,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면 하느님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6-19).”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고, 그러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없고,

우리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인간은 하루살이와 다를 것이 없는 불쌍한 존재이고,

하루살이처럼 사라질 인생이라면, 사는 동안 복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허무한 일이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더욱 불쌍한 사람들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극기, 고행, 절제 등을 하는 것도

허무한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신앙인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믿고 있고,

또 우리의 믿음이 결코 헛일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불쌍한 존재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3,20-4,1)”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아무나 부활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는 생활을 통해서, 즉 충실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 자격을 얻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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