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9주간 화요일]하느님의 것 (마르12,13-17)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베드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한다. (2베드 3,12-15ㄱ.17-18)
사랑하는 여러분,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15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8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이제와 영원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고 한다. (마르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요한묵시록 11장 19절>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2베드 3,12-15ㄱ.17-18)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12-13)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주적 대심판이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신도들은 악이 횡행하고 거짓 교설이 난무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말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님의 재림의 날이 도래할 것을 기다리고, 협조해야 한다.
여기서 '기다리고'에 해당하는 '프로스도콘타스'(prosdokontas)의 원형 '프로스도카오'(prosdokao)는 '(희망 중에) 기다리다'(사도 27,33) 즉 '바라고 기다리다'(루카 3,15)라는 뜻을 지닌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쓰였으며,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앞당기도록 하라'에 해당하는 '스퓨돈타스'(speudontas)의 원형 '스퓨도'(speudo)는 영어의 'speed'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원래는 '빨리 하다','서두르다'(루카 2,16) 란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본절에서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어 보이는 이유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는 하느님의 뜻 때문이라는 3장 8-9절의 말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은 신도들의 믿음과 선행이 그 날을 재촉할 수 있다는 사상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는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의 도래를 위해서는 최우선적 과제가 무엇보다도 선교인 것만은 사실이지만(마태 24,14), 재림의 때에 대한 준비는 '그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착하고 거룩하고 신심깊은 생활(2 베드3,11; 1베드 2,12), 회개와 순종(사도 3,19.22-23)의 삶도 더불어 준비해야 한다.
선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회개와 신심(경건)과 순종 등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및 거기에서의 영원한 삶이라는 궁극적인 성취를 앞당기는 데 기여하는 요소들이다.
'그날이 오면'으로 번역된 '디 헨'(di hen)에서 전치사 '디아'(dia)의 축약형 '디'(di)는 본문에서 목적격을 수반하고 있는데, 이것은 '~때문에'라는 원인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그날 때문에' 즉 '주님의 재림이 임하였기 때문에'란 의미이다.
이것은 그리스철학의 스토아 사상에서 그려지듯, 우주의 주기적인 대화재와 같은 자연 순환 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적인 의지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버릴 것입니다.
'원소'(element)에 해당하는 '스토이케이아'(stoicheia)는 '스토이케이온'(stoicheion)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는 '진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테이코'(steicho)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일련의 어떤 것'(series)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단어가 그리스 철학에서는 '일련의 어떤 것을 이루는 기본 요소','원소' 혹은 '첫째 원리'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우주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던, 흙과 물과 공기 혹은 더 나아가서 '천체'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본문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모든 기본 기본 요소들이 빠짐없이 해체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불에 타 녹아버릴 것입니다'라는 표현이 10잘에는 '불에 타 스러지며'로 나온다. '(뜨거운) 불에' 해당하는 '카우수메나'(kausumena)는 '불태워버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카우소오'(kausoo)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 '불태워지면서'라는 뜻이다.
'스러지며'에 해당하는 '뤼테세타이'(lythesetai),'뤼테손타이'(lythesontai)는 묶인 것을 '풀다', '느슨하게 놓아주다', '분해하다','해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뤼오'(lyo)의 직설법 미래 수동태로서 철저하게 해체되어 버릴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12절에는 '녹아버릴' 것이라는 단어 '테케타이'(teketai : shall melt)가 더 첨부되어 있다.
즉 본문는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불에 타면서 해체되어 버릴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천지 만물의 대변혁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어지는 종말의 대심판이 장엄하게 전개될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기다리고 있습니다(13)
베드로 사도는 거짓 교사들의 교설의 유혹에 맞서 확고한 재림 신앙을 가지며, 그에 합당한 생활을 권면하는 1장 12절~3장 13절의 마지막 구절인 본절에서, 신도들에게 재림 및 종말에 관한 약속에 근거하여, 의로움이 실현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을 최종적으로 권면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에 해당하는 '프로스도코멘'(prosdokomen)은 '희망 중에 기다리다' '바라고 기다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프로스도카오'(prosdokao)의 직설법 현재 시제로서, 신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 중에 기다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지금의 현 세계가 해체되어 소멸된다(10절과 12절) 하더라도, 신도들은 그 후에 도래할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 있고, 그 희망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이 없는 불신자들과는 다르다.
신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 중에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분명한 하느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이사야 예언서 65장 17절에서, 하느님은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사야 예언서 66장 22절에서는, "정녕 내가 만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서 있을 것처럼, 너희 후손들과 너희 의 이름도 그렇게 서 있으리라." 고 약속하셨다.
즉 베드로 사도는 전혀 성경적 근거도 없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공허한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실효성 있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로움'(의)로 번역된 '디카이오쉬네'(dikaiosyne)는 주격 단수이며, '깃든'(거주하는)으로 번역된 '카토이케이'(katoikei)는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의로움이 깃든' 혹은 '의가 거주하다'는 것은 불의와 부정이 가득 찬 이 세상과 대조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거하고 있는 그곳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견고하게 계속된다.
세상은 심판 가운데 멸망하지만, 믿는 자들 곧 '착하고 거룩하고 신심깊은 생활'로 주님의 날을 기다리던 자들에게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좋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얻게 될 희망이 있음을 본문은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재림시의 그토록 엄청나고 끔찍한 대변혁의 사건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롭고 안전한 새 세계의 창조를 위한 서곡(序曲)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에 관해서는 마태오 복음 13장 41-43절, 19장 28절.사도행전 3장 19-23절, 요한 묵시록 21장 1-2절. 5절. 10-27절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복음(마르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17ㄴ)
'돌려주다'로 번역된 '아포도테'(apodote; render; give)는 '~로부터', '~에서'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와 '주다'라는 뜻의 동사 '디도미'(didomi)가 합성되어 '갚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디도미'(apodidomi)의 명령형이다.
'아포디도미'(apodidomi)는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듯이, '필연적으로 어떤 것을 되돌려 주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 12장 14절의 '우리가 바쳐야 합니다'에 해당하는 '도멘'(domen; should we pay; shall we give)의 기본형이 '주다'라는 뜻의 '디도미'(didomi)인 것을 고려할 때, 이 세금 논쟁에 있어서 예수님과 질문자들 사이의 시각차를 알 수 있다.
바리사이들은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주는'것으로 여겼다. 말하자면, 자신의 소유권을 빼앗기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세상 임금과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위에서 세속사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여기신다.
예수님께서는 국가에 대한 납세의 의무와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둘다 충실히 행할 것을 가르치신다. 당시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들은 앞의 것을 무시하고, 뒤의 것만을 강조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국가에 대한 납세는 국민의 의무로서 사도들도 권장했다 (로마13,1~9; 1베드2,13~17).
비록 로마 제국이 지배국으로서 식민지인 이스라엘을 종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핍박한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1티모2,2).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에 해당하는 '타 카이사로스'(ta kaisaros; what is Caesar's)와 '하느님의 것'에 해당하는 '타 투 테우'(ta tou theou; what is God's)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으신다.
데나리온에 담겨진 그 동전의 금전적 가치는 황제에게 돌려야 하지만, 그 위에 새겨진 황제 숭배의 어떤 사상도 용납하지 않고 거부하신다.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 외에는 경배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부당한 경배를 요구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으로 창조된 인간은 마땅히 신적(神的)인 영광과 위엄을 황제가 아닌 하느님께 되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만유의 통치자이시며, 모든 권세는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니2,20.21; 4,34; 요한19,1; 로마13,1).
정치의 상대성과 하느님 나라의 절대성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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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경제민주화니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경제성장이니 하는 소리를 밤낮으로 한다고 해서 서민 경제가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편복지를 외쳐도 실제적으로 재원마련대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눈앞에 것만 보아서도 안 되고 기금을 이용해 먹어서도 안 됩니다.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을 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을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 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하여 “이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도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서로 다른 탈란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복된 사람 ♣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논쟁했으나 실패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그분께 보내어 올가미를 씌우려 합니다(12,13).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지 여쭙습니다(12,14).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2,17)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심으로써 그들의 계략에서 벗어나십니다. 나아가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과 황제에게 바쳐야 할 것을 구별하시어 그 차이를 알려주십니다. 황제에게는 그의 흉상이 박힌 은화를 돌려주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들, 권력과 명예와 인간이 이루어낸 성과 등은 세상에 돌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얼과 형상을 지닌 인간은(창세 1,27)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내 전부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하느님께는 나의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12,30). 나의 시간과 재능과 하느님께서 주신 온갖 은총의 선물을 기꺼이, 그리고 남김없이 되돌려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황제에게 바쳐야 할 것은 세상적인 것이지만,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입니다. 따라서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나,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있다가도 사라져버리지만,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에게 속한 세상의 일과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일을 분별하라 하십니다. 양자를 구별하여 일시적이고 세상적이며, 영혼 구원과 무관한 것들에 대해 애착을 두지 말라 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되돌려야 하는 것은 일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 존재와 인격 전부, 내가 받은 모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횡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을 복됩니다.”(영적 권고 11,4) 여기서 성찰해야 할 점은 ‘소유없이’(sine proprio)의 삶입니다. 세상의 것이든 하느님께 속한 것이든 모든 것을 다 되돌리는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되돌릴 줄 아는 가난한 사람은 좋은 대우, 인정과 배려, 존경에 대한 기대를 버릴 줄 압니다. 그것이 자기 소유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기대심 뿐 아니라 자존심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조차도 남겨두지 않기에, 모욕과 멸시를 받을 때에도 겸손합니다. 나를 찾아오고, 나에게 주어지는 내적, 외적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당신 뜻대로 나에게 주기기도 하고 앗아 가실 수도 있습니다. 주시는 것도 주님의 뜻이요, 되돌림으로써 나를 떠나가는 것도 주님의 뜻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마음 쓸 일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리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의 풍요 안에 머물기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방향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유에 초점을 맞추고 몰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때, 나 자신은 물론 교회와 우리 한국사회도 변할 것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