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수요일] 내 이름으로 (마르 9,38-40 )

2018. 5. 23. 오전 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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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간 수요일] 내 이름으로  (마르 9,38-40 )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원하시면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한다. (야고4,13-17)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16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마르 9,38-40 )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 (야고4,13-17)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15)

 

앞의 야고보서 4장 13절, 14절에서 자신의 뜻대로만 사는 인생의 어리석음에 대해 경계한 야고보는 4장 15-17절에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성도의 인생 자세에 대하여 피력하고 있다. 

야고보서 4장 15절에서 야고보는 계획을 세우려고 할 때 하느님의 뜻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도리어'로 번역된 '안티'(anti)'~에 대항하여', '~에 반대하여'라는 뜻으로 하느님을 고려하지 않고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자들의 교만한 태도(13절)에 반대하여 참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를 대조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반드시 '주님의 뜻 안에서' 세워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글 새 성경에서 번역하지 않은 단어 '에안'(ean)'만일'(만약)이라는 의미의 조건 접속사로서 성도는 항상 '주님께서 만약 원하신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가지고 인생 계획을 세워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은 반대로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신다면 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서간 왕래를 할 때 그들은 편지에 'd.v'라는 문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는 라틴어 'deo volente'의 약자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의 신심있고 경건한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구현될 수밖에 없음과 또한 구현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미래의 계획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종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신념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에페소의 성도들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여러분에게 다시 오겠습니다"(사도18,21) 고 말했고, 또한 코린토의 성도들에게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여러분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1코린16,7)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절대 주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삶 속에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뜻을 고려하는 것을 전제하고 선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주님의 뜻 안에서 적극적으로 이것저것을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또한 그것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배제한 채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고자 계획하는 자들과 달리 자신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의탁하는 겸손함으로 살아야 한다.







      "막지 마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 자신의 모습과 공동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얼마나 복음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요한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잘했다고 칭찬듣기 위해서 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잘못된 요한의 행동을 꾸짖으셨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요한의 행동의 기준은 어떤 사람이 옳은 일을 하였는지 착한 일을 하였는지 또는 예수님의 일을 하였느냐가 아니고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냐 아니냐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그 판단의 기준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면 우리편이라면 나쁜 일을 하더라도 괜찮고 다른 사람은 좋은 일을 한다하더라도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는 논리는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인가?

개인적인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자신을 망치고 사회를 망친다. 우리 사회를 보라.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안 되는가, 우리편인가 아닌가? 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조는 대부분 지방색, 학교의 선후배 관계, 당리당략에 좌우되는 일이 많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이고 선인지가 중요하지가 않은 사회가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고, 우리 편이면 눈 감아 주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신앙인이면 무엇하는가?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일반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  신앙인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은 항상 복음적이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또는 상대방이 하는 일이 복음적인가 아닌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굳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익이 아니라 또 자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에 따라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자신이 복음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즉 우리의 이익과 편가르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보고 그를 막은 이유가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 일을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
개인적인 죄의 근원이 하느님의 자리에 자기(나)를 놓았다면 요한의 잘못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하는데 요한은 그 자리에 "저희"를 갖다 놓은 것이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곳이다. 인간이 인간을 따른다는 것은 불행을 재촉하는 것이다. 예수가 아니라 "우리"를 따르게 할 때 또 다른 분열이 일어나는 법이다.

본당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되고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안되고 하는 서로 편을 가르는 일은 없는가?  본당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료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끼리끼리만 모인다면  그리고 자기들이 하는 일만을 인정한다면 끊임없이 남을 나쁜 쪽으로 판단해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적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들만의 울타리 속으로 갇히는 것이다. 우리는 갇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교류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로 개방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막지 마라."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교회는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항상 보편적이고 모든 세계를 향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개인주의를 깨닫지 못하면 선한 일도 이기주의의 명목으로 한다.
요한의 자세에서 우리가 반성해야할 또 다른 것은 특권의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악령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던 것과 같이 좋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다. 그 이유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외에 자기들만의 특권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 쫓아내는 일은 제자들인 자기들에게만 주신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즉 자기들의 특권인줄로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마귀를 쫓아내고 있으니 기분 나쁜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특권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자기들은 마귀를 쫓아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내용은 예수 시대가 아니라 사도들의 시대에 쟁점으로 떠오른 문제였다. 사도단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할 때, 특히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일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는 실로 미묘한 문제였다.
초대 교회에서 이러한 사건은 흔히 벌어졌으며 다양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마르코가 전하는 답변은 분명하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는 안 되고 배타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요한처럼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반대하는 자세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 제자의 본분을 잃어버린 자세이다.

다시금 어제 복음에서 묵상했던  "받아들임"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 가를 생각하게 한다. 즉 넓은 마음으로 좀더 대범하게 교회 울타리밖의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특권의식을 버려야 한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 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가르는 식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와 함께 다니고 안 다니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도와주는 일이다. 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은 순전히 집단 이기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다.
우리도 이런 특권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막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선은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록 우리의 것이 아니더라도.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즉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타종교와도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가야하고 다른 사상과도 대화의 장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교황님은 세계를 다니시면서 그 누구와도 손을 잡아주시고 진리의 대화를 하신다. 다른 사람이 나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잘 하도록 격려해주어야지 하지 말라고 막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란 옹졸한 사람이 아니다.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나의 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비록 생각이 다를지라도 또 가톨릭 신자가 아닐지라도 그를 포용하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려면 우선 나의 생각부터 개방된 사고 방식이어야지 자기 생각으로 갇혀있는 옹졸함을 갖고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알을 깨고 새가 나오듯이 우리의 좁은 낡은 사고를 깨어버려야지만이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좀 더 큰 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좀 더 개방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 그것이 곧 "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 "이다. 
그것이 머리로만 하던 신앙 생활에서 몸과 마음으로 하는 참다운 신앙생활로 옮겨지는 과정이다.



저희라는 이기주의를 넘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말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 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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