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목요일]근심은 기쁨으로 (요한16,16-20)

2018. 5. 10. 오전 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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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6주간 목요일]근심은 기쁨으로 (요한16,16-20)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로 가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사도 18,1-8)
그 무렵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2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나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코린토에서 설교하는 바오로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18,1-8)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1-3)


사도행전 17장에서는 바오로가 유럽 선교의 시발점이었던 필리피를 떠나 테살로니카, 베로이아를 거쳐 아테네로 가서 복음을 전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유럽의 동부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을 방문한 바오로의 제2차 선교 여행은 유럽 선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본문은 바오로가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에 이르렀다는 간단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코린토는 도자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뿐 아니라, 북쪽 그리스와 필로폰네소수스 반도 사이와 지협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관장하는 무역의 중심지로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였고, 전반적으로 다 도덕적 타락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성채 아크로코린토(566m)의 북쪽에 세워진 이 도시에는 그리스 신화에 사랑의 여신으로 등장하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다. '사랑의 여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일천 명에 이르는  '히에로둘리'(신전 창녀)를 마음대로 희롱하는 이 도시는 성적 타락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인구 75만명의 거대 도시 코린토는 한 마디로 쾌락의 도시였으며, 육욕과 술취함과 강탈로 가득한 도시였다.


코린토의 비도덕성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코린토 사람처럼 행동하다' 라는 뜻을 지닌 '코린티아조'(korinthiazo)란 말이 '음행하다'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코린토의 친구들'이란 뜻을 지닌 '코린티아이 헤타이라이'(korinthiai hethairai)나 '코린토의 아가씨들'이란 뜻을 지닌 '코린티아이 코라이'(korinthiai korai)란 말이 '매춘부'란 의미로 쓰였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곳이야말로 바오로가 복음을 전세계적을 전파하기 위해서 반드시 복음이 전해져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즉 코린토는 그 자체가 발칸 반도 지역인 아카이아의 수도로서  최대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해마다 종교 순례자들이 수십만 명 방문하는 중교의 중심지였고, 또한 대규모의 체육 경기로 인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매우 잦은 곳이었다.


따라서, 코린토는 단순히 아카이아 지역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와 로마 전 제국을 복음화 하는데 있어 주요 요충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 전략상의 중요성 때문에 바오로는 제2차 선교 여행시에 이곳에서 1년 6개월 간이나 머문 것 같다.


대략 그 시기는 A.D.50년 말에서 52년 가을사이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8장 21절에 갈리오 총독이 부임한 후에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났는데, 그 시기가 델피의 비문에 의하면 51년 또는 52년으로 언급 되어 있고, 18장 2절에서 바오로가 코린토에 도착했을 때  로마 제국의 4대 황제인 클라디우스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를 로마에서 '최근에' 추방한 사실이 언급되는데, 그 시기가 50년 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인구 75만명의 거대 도시이며,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인 코린토를 방문한 것은 그 도시의 특성을 이용하여 복음의 확장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3차 선교 여행 때도 인구 50만명의 거대 무역 도시이자 아시아 종교의 중심지인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사도18,24-19,20), 이것 역시 복음의 확장을 염두에 둔 바오로의 선교 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바오로는 복음이 효과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하여 선교에 힘썼던 것이다.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에 온 바오로는 아퀼라를 만났다.  '독수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퀼라'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소아시아 북동쪽 지방에서 흑해 남동쪽 연안에 있는 '폰토스'출신이었다.

폰토스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순절 성령 강림때 폰토스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음이 언급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사도2,9) 이때 성령 강림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살던 지역에 돌아가 복음을 전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퀼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들어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만났다'로 번역되 '휴론'(heuron)은 '(우연히)찾아내다', '~을 만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휴리스코'(heurisko)의 과거분사이다. 이 동사는 특별히 어떤 것이나 다른 사람을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을 묘사할 때에 쓰인다.

 

바오로가 코린토에 들어가서 아퀼라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둘 다 천막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섭리로 볼 때 우연한 만남이 아니며, 복음 전파를 위한 필연적 만남이었다.

18장 2절은 아퀼라와 그의 아내 프리스킬라가 로마를 떠나 코린토에 오게 된 이유를 보여준다. 클라우디우스는 A.D.41-54년까지 재위한 제4대 로마 황제인데, 그는 A.D.49-50년경에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이들이 쫓겨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었다고 전한다.  유대인들은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선동가의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크레스투스'는 그리스어로 '유용한'이라는 뜻으로 그 당시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졌던 이름이다. 그러나 그 발음이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크리스토스'와 유사하다는 점에 따라, 이 당시 로마에서 일어난 폭동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로마의 유대인 박해 정책에 맞서 '크레스투스'란  사람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일어난 정치적 성격의 폭동으로 볼 수 있다.

둘째, '크레스투스'는 당시 로마 세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던 '그리스도' 즉 '크리스토스'(christos)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란 인물을 믿는 그리스도교 유대인들을 부르는 이름일 수 있다는  추정에서 출발하며, 비그리스도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믿는 유대인들을 박해하여, 그로 인해서 발생한 종교적 사회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약 2만명 가량의 유대인들 가운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추방이 이루어졌는데,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도 이 때 로마를 떠나게 되었고, 떠나올 때부터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퀼라의 아내 '프리스킬라'는 '프리스카'(Prisca)의 애칭으로 보인다.(로마16,3) 바오로가 그 여성을 존경한 이유가 로마의 귀족 가문의 귀부인이었기 때문인지, 교회내에서 유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것은 교회내에서의 역할이 남편보다 더 컸음을 암시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아퀼라에게는 기술이 있었고, 로마 귀족 가문에 속한 프리스킬라에게는 돈과 인맥이 있어서, 그들이 공동으로 천막 제조와 가죽 수공의 상사를 소유했을 것이며, 이 상사의 지점이 로마, 코린토, 에페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로마16,3 ; 1코린16,9 ; 2 티모4,19)

로마에서 이 일을 시작하였던 두 사람은, 당시 클라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 칙령으로 인해 코린토에 온 상태였고, 코린토에서도 천막 제조와 가죽 수공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바오로를 만나게 되었고, 같은 직업과 같은 신앙을 가진 그와 여러모로 동역하다가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날 때에 함께 에페소까지 동행하였던 것이다.

그후 이들 부부는(사도18,18-28) 에페소에 또 다른 지점을 냈다가 오래지 않아, 아마 클라디우스 황제가 죽은 후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완화되자 로마로 돌아와서(로마16,3) 그 일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스킬라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에, 유대인 추방령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을 것이지만,  유대인인 남편을 따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코린토로 쫒겨 왔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을 따라 산 그들의 기업을 크게 일으키시어, 바오로의 동역자로서 위대한 일들을 감당하게 하셨다.


한편, 그 당시 선교사들은 보통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때, 신도들로부터 물질적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따로 직업 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바오로도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2코린11,9 ; 필리4,16)
그러나 많은 경우, 자신이 스스로 선교 자금을 조달하였다. 즉 신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봉사함으로, 자신의 복음 선교가 훼방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오로의 선교 방침이었으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술인 천막 만드는 일로서 경제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1코린9,11.12) 

특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크고 번창한 도시 코린토에서 생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우연히 만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거하면서,스스로 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때 바오로가 했던 일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다. '천막을 만드는 것'에 해당하는 '스케노포이오이'(skenopoioi)의 원형 '스케노포이오스'(skenopoios)는 일차적으로 '천막 제조자'(tentmaker)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이 단어가 단순히 천막을 만드는 일 뿐 아니라, 천막을 만드는 재료이기도 한 가죽을 다루는 모든 종류의 일을 가리켰다. 즉 가죽을 연결하는 일,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 신발을 만드는 일 등이 다 이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특히 여기서 '일을 하니'에 해당하는 '에르가제토'(ergazeto)가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바오로가 끊임없이 매우 부지런하게 이 일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자식에게 직업 훈련을 시키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다. 

또한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보수를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도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바오로는 이 천막 만드는 기술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사도22,3)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16,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0)


요한 복음 16장 20절에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세상과 제자들이 보이는 상반된 반응이 나온다. 제자들은 울며 애통하고 근심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한다.

여기서 '세상'에 해당하는 '호 코스모스'(ho kosmos) 어두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세력들을 대표하는 표현이며, 특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한 유대인들을 말한다.

이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이들이 죽이고자 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곧 반전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근심하겠지만'에 해당하는 '뤼페테세스테'(lypethesesthe; will be sorrowful; will grieve)'뤼페오'(lypeo)의 미래 수동태로서 '슬퍼할 것이다', '괴로워 할것이다', '마음이 상할 것이다'는 뜻을 전한다.

이것은 내면적인 비탄과 슬픔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70인역(LXX)에서는 서로 다른 13개의 히브리어 동사들의 역어로 나타나는데, 신체적인 고통, 역경, 비애, 슬픔, 괴로움, 공포, 분노 등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용례로 쓰였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제자들이 겪게 될 내면적인 고통을 잘 나타낸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제자들의 근심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제자들이 일시적으로는 극심한 슬픔과 두려움에 싸여 있었지만(요한20,19), 이것이 곧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게 된다(요한20,20; 사도2,46).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표현은 그들의 슬픔과 근심이 깊었던 만큼 기쁨과 즐거움도 클 것임을 나타낸다.

'기쁨'으로 번역된 '카란'(charan; joy)'즐거운 잔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슬픔과 불안으로 깊이 가라앉았던 제자들의 내면에 기쁨과 즐거움으로의 일대 국면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잠시 동안 겪은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요한 복음 16장 20절에 나오는 '울며 애통하겠지만'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초상집 같은 우울한 분위기를 즐거운 잔칫집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건들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어지는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역사상 모든 인간을 억눌러 왔던 죄와 죽음이 정복되고, 예수님의 대속적 십자가상 죽음의 구속성혈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 때, 죄사함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그들이 현세적, 정치적 메시아로 알았다가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께서, 사실은 온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진정한 메시야이시고,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영신적 메시야이기에 그분의 통치 아래 그들이 살아가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16. 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조금 있으면...‘.보지’ 못하고...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앞의 보다는 ‘테오레오’라는 단어로 구경거리를 보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뒤의 보다는 ‘호라오’라는 단어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본다는 이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시선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그러므로 스승과의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여정도 한결같이 좋기만 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앞날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것이지요. 이어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뜻이지요.
이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머지않아 세상은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역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악함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선과 생명으로 가득 차게 만드셨습니다. 미움과 파괴의 문화를 사랑의 문화로 바꾸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가치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의 틀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밖에 모르고, 자신만을 모든 기준으로 삼다가 어느 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하고 삶의 모든 기준이 바뀐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악과 불신에 가득 찬 나머지 세상을 미움과 증오로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이 열려 선과 사랑을 지닌 존재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나’부터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나 자신’이 변화되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직장과 사회마저 서서히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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