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월요일]성령 (요한15,26─16,4ㄱ)

2018. 5. 7. 오전 6: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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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간 월요일]성령 (요한15,26─16,4ㄱ)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에서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라는 여자와 그의 온 집안에 세례를 준다. (사도 16,11-15)
11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트라케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폴리스로 갔다.
12 거기에서 또 필리피로 갔는데, 그곳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첫째가는 도시로 로마 식민시였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13 안식일에는 유다인들의 기도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성문 밖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14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15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께서 당신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사도16,11-15)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14-15)

 

사도행전 16장 11절부터 마지막 절인 40절까지는 바오로 일행의 유럽 선교의 시발지인 리피에서의 활동을 기록한다. 필리피에서의 선교 활동을 이렇게 길게 기록하는 것은 이곳이 유럽 선교의 시발지일 뿐 아니라 이곳에서의 선교 성공으로 인해 유럽 선교의 기틀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필리피 교회는 바오로의 선교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이것은 바오로가 다른 교회에서는 거부하였던 재정 지원을 필리피 교회에서는 받은 것으로 보아서(1코린9,3-14) 그들에 대한 바오로의 신뢰를 알 수 있다(필리1,3-5; 4,18). 

필리피에서의 활동과 관련된 기사는 바오로 일행의 필리피 도착,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의 회심(사도16,11-15), 점 귀신들린 하녀에 대한 구마 행위로 인한 바오로와 실라의 투옥 및 필리피 감옥 기적 사건(사도16,16-34), 필리피 관리들의 공식 사과와 바오로와 실라의 명예로운 석방(사도16,35-40)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는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가 새롭게 등장한다. '티아티라'는 고대 리디아(Lydia) 지역에 속한 한 성읍으로서 '티아의 성읍' 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헬무스 계곡과 카이쿠스 계곡을 연결하는 소아시아의 국경의 요새이기도 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염색, 의복등의 제조업의 중심지였고, 특히 자색 염료로 유명했다. 바오로 일행은 그들이 찾아간 필리피의 기도처에서 옛날  로마 시민의  겉옷이나 왕족의 겉옷으로 사용되던 자색 옷감 장수를 하던 리디아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원래 티아티라 성읍 출신이었으나, 더 큰 도시인 필리피에 와서 거주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녀는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자로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섬기는'으로 번역된 '세보메네'(sebomene)는 현재분사인데, 이 단어의 원형 '세보마이'(sebomai)는 단순히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공경하는 인륜적 차원의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이나 신적 존재를 예배하며 숭배하는 종교적 차원의 의미를 나타낸다. 리디아는 하느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3잘 43절에는 유다교로 개종된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본문의 리디아는 유다교에 깊은 관심이 있고 율법을 따라 하느님을 섬기기는 하나, 완전히 개종하지 않은 자로서 코르넬리우스 티리우스 유스투스유사한 신앙(사도10,1.2; 18,17)을 가지고 있던 여인으로 보인다. 

그녀는 티아티라 성읍에 살던 때에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티아티라 성읍에는 유다인 정착지가 있었고, 그 유다인들을 통해 리디아는 하느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이 본문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예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려면, 첫째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로마10,17),  둘째로 들은 그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들은 말씀을 깨닫고 수용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말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루카24,45). 

여기서 '열어 주셨다'로 번역된 '디에노익센'(dienoiksen ;opened)단순히 '열다'는 의미보다 더 강한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원형 '디아노이고'(dianoigo)는 '철저히' 라는 의미가 있는 '디아'(dia)'열다', '열어 젖히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노이고'(anoigo)의 합성어로서 '철저히 열어 젖히다', '(닫혀 있는 것을)확짝 열어 젖히다'라는 의미이다.

 

사도행전 17장 3절에는 '설명하고'로 번역되었으며, 루카 복음 24장 32절에서는 '성경을 풀이해 주다'로, 그리고 루카 복음 24장 31절에는 '눈이 열려'로 번역되었다. 

한편 사도행전 16장 15절에는 리디아가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호 모이코스 아우테스'(ho oikos autes; the members of her household)로 번역된 '온 집안'은 단순히 건물(house)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정(home)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정은 그녀의 혈육만을 한정하는게 아니고 사업가로서 많은 직원들과 인들을 거느리고 있던 리디아에게 속한 모든 자손들을 다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견해이다.


5월 10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요한 15,26-16,4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5,26~16,4ㄱ)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6)


여기서 '성령'을 지칭하는 '보호자'로 번역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 comforter)'옆에', '곁에'라는 뜻의 '파라'(para; by, at, beside)'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의 '클레토스'(kletos; invited, called)합성어로서, 원래는 '돕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자'라는 수동적인 의미를 가졌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가리켜서 쓰이며, '남을 위해서 나타난 자', '돕는 자', '상담자', '위로자', '중재자' 등을 뜻한다.

그리고 '진리의 영'에 해당하는 '토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to pneuma tes aletheias; the Spirit of truth)성령의 본질 대표적인 일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그분은 진실하신 하느님이신 주님(시편31,6)에게서 나오셨으며(요한15,26), 믿는 이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므로(요한16,13), 진리는 성령을 특징짓는 가장 적절한 용어이다.

또한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속이는 영'(1요한4,6)과 대립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진리의 영'의 특징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요한15,26),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시며(요한14,28), 믿는 이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로 번역된 '알레테이아스'(aletheias)'알레테이아'(aletheia)단수 소유격이며,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에메트'(emeth)의 역어흔히 나온다.

성령께서는 사건들을 밝히 드러내시며, 어떤 사건을 참된 모습으로 제시하는 분이다. 

그러기에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제자들에게 감추어진 부분을 확실하게 보여 주시는 이해의 빛이라는 말이다(요한14,16.17,26).


요한 복음에 나오는 '보호자', '진리의 영'에 대한 구절들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과 성령의 하시는 일이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요한 복음 15장 26절에는 이러한 구절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이다.

1인칭 단수 동사 '보낼'에 해당하는 '펨프소'(pempso; I will send) 앞에 1인칭 단수 대명사 '내가'에 해당하는 '에고'(ego; I)단독으로 쓰인 사실이 이것을 더욱 강조한다.


물론 요한 복음 15장 26절에서도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라는 표현으로서 성부 하느님께서 보내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지만, 동시에 성자께서도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사실이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와 동일한 신성(神性)을 지니셨으며, 본질적으로 하나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나오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는 교리의 성경적 근거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으로부터 발출한다는 이 교리를 동방 교회에서는 거부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성령을 오직 성부 하느님에게서만 발한다고 주장하며, '아버지에게서'에 해당하는 '파라 투 파트로스'(para tou patros; from the Father)성령 발출의 근원으로 보고, '보낼'에 해당하는 '펨프소'(pempso; I will send)이것에 종속된 것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 차이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절의 표현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가 성부 하느님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으로서 성자 하느님 역시 성령을 발출함을 볼 수 있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에 해당하는 '마르튀레세이 페리 에무'(martyresei peri emou; he will testify about me)'나에 관하여' 혹은 '나를 위해서 계속해서 증인이 될 것이다'는 뜻이다.

전치사 '페리'(peri)'관하여'(of)라는 뜻 뿐 아니라 '위하여'(for) 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서 성령께서 증거하는 이중적인 내용을 나타낸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관하여 증거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증거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증언하실 것이다'에 해당하는 '마르튀레세이'(martyresei)'마르튀레오'(martyreo)의 미래 시제'계속해서 증언하실 것이다', '계속해서 증인이 되실 것이다'라는 뜻으로서, 성령께서 오실 때에 계속 진행될 일이 예수님께 관한 증거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모든 믿는 이들의 활동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에 맞추어져야 함을 일깨우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성령의 현존과 역사를 가시적인 특수한 은사와만 관련지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사용되어지지 않는 은사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사도1,8 참조).


환대(歡待)와 보호자 성령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해주는 기억의 단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호자, 곧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앞두고, 전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승천 후에 보내주실 성령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역할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15,26). 나아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어떠한 은총 중에 있게 되는지도 가르쳐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이 당신의 죽음을 보고 믿음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격려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으신 뒤에도 제자들을 내버리지 않고 함께 하실 것이며, 제자들은 진리의 영 안에서 당신을 증언하실 것이라 하십니다(15,27).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16,4) 시련과 박해를 겪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시련과 고통을 없애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어낼 수 있는 원천적인 힘으로서의 ‘기억의 단서’를 주신 것이지요. 우리 인생 여정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시련과 고통이 없는 세상을 희망하지만, 고통 자체가 바로 인생의 본질에 속하지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런 순간에조차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발견하고,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시련과 박해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늘 나와 함께 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기만 하면, 그분의 영께서 도와주시어 시련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서 성령을 보내시어 늘 함께해주시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될까요. 

세상은 하느님의 선과 자비와 정의를 거슬러 가려고 합니다.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고 교묘하지요. 따라서 복음을 선포하려고 할 때마다 늘 반대와 박해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신 진리의 영을 보내주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시면서, 박해를 받을 때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과거 박해시대보다 더 심한 도전과 어려움 속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보와 첨단과학의 발달, 편리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각종 전자기기들, 물질의 풍요, 다양한 가치관의 등장, 포스트모던 사상에 따른 개인주의의 강조, 세계화, 신자유주의 경제 등 급변하는 사회여건 자체는 신앙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올바로 분별하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진리의 영께서 나와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버리지 않고, 늘 시선을 그분께 두는 일입니다. 늘 나와 함께 하시며 내편이 되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만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자,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내다보고 계셨기에 당신 대신에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였지요.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리다툼이나 하다가, 예수님께서 위험에 처하시자 다들 제 목숨이나 구하려고 도망마저 갔지요. 더욱이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마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령께서 오시자 제자들은 완전히 변하고 맙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제자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고, 심지어 죽음마저 당하고 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진정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이 이 시대 언어와 문화, 관습을 통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지요. 그런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정성을 다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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