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화요일]첫째와 꼴지 (마르 9,30-37)

야고보 사도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주님께서 높여 주실 것이라고 한다(야고 4,1-10)
사랑하는 여러분, 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4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5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9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르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야고4,1~10)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7~8)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7)
여기서 '너희는 복종할지어다'로 번역된 '휘포타게테'(hypotagete)는 '복종하다', '순종하다'란 뜻을 지닌 '휘포탓소'(hypotasso)의 명령형으로 6절("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과 같은 사실을 안다면, 이기적인 욕망과 세상과의 벗됨을 거절하고 더욱 큰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복종하라는 강력한 명령이다.
'휘포탓소'가 '~아래'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높다','두다'란 뜻의 동사 '탓소'(tasso)의 합성어란 점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느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 아래 굴복시키는 적극적 순종을 말한다.
즉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자발적인 자유 의지의 행동에 의해 내어 맡기는 겸손한 태도인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께 순복하는 것은 마땅하다. 더욱이 세상적인 정욕으로 인한 시기와 다툼으로 일어난 신앙공동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겸손함으로 하느님께 순종해야만 비로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 의해 유혹받을 때 성경말씀으로 대적함으로써 믿는 자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다. '악마에게 대항하다'는 본문의 명령은 바로 이와같은 자세를 가지라는 말이다.
특히 악마는 분쟁과 다툼과 이기적 욕망의 주범이다. 따라서 악마를 대항해야만 분쟁과 다툼을 극복하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본문에서 '대항하다'로 번역된 '안티스테테'(antistete)는 '대적하다', '거역하다'란 뜻을 지닌 '안티스테미'(antistemi)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서 마귀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싸우라는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끊임없는 마귀의 공격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적한다면, 분명 마귀는 그들을 피할 것이며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들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달아날 것이다'로 번역된 '퓩세타이'(pheuksetai)의 원형 '퓨고'(pheugo)는 '달아나다', '도망하다', '피하다' 라는 뜻이다. 마귀가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성도들을 피하여 도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처럼, 이제 더 이상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쾌락적인 정욕을 쫓아 세상과 벗하는 삶이 아니라 악마를 대항하는 보다 적극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8)
여기서 '가까이 하다'로 번역된 '엥기사테'(enggisate)는 원형 '엥기조'(enggizo)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명령의 단호함과 명령 이행의 즉각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만큼 그 명령이 시급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야고보는 만약 신도들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이킨다면, 그분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즉각적인 반응으로 그들을 가까이 하셔서, 도우심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8)
야고보는 이어서 세상과 벗(친구)한 성도들을 '죄인들이여',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하는 동시에 하느님과 벗하려는 성도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그들을 부르는 호칭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만큼 당시 본서의 수신자들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손을 깨끗이 하다'로 번역된 '카타리사테 케이라스'에서 '카타리사테'(katharisate)의 원형 '카타리조'(katarizo)는 구약 제사의 문맥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자가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특히 손을 씻는 행위는 구약의 사제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중요한 의식이었다(탈출30,20-21). 이 의식은 유다인들에게는 음식을 먹기전에 행해야만 하는 전통이기도 했다(마르7,1-4).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는 의식적 정결례를 도덕적, 영적 정결의 의미로 전환한다. 죄인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의 범한 죄를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성혈에 씻음 받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둘째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라'로 번역된 '하그니사테'(hagnisate)의 원형 '하그니조'(hagnizo)는 '정결하게 하다', '순결하게 하다'라는 뜻으로서 깨끗하게 하는 것과 동일하게 구약의 사제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제반 정결례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마음을 한 곳으로만 돌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의심과 믿음 사이(야고1,6-8), 바알과 하느님 사이(1열왕18,21), 세상과 하느님 사이(야고4,4)에 서 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집회서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며 새겨야 할 주옥과 같은 지혜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집회 2,4-5)
그래서 참다운 신앙은 고난과 가난에서 드러난다고 하지요. 누군들 호의호식하며 대접받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겠지만 이것을 넘을 수 있는 겸손과 청렴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오히려 비천한 삶도 여유로움으로 바꾸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생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중에 하나가 그분의 나라사랑은 두 번이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처벌을 받으면서도 그 수모를 견디어 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군 형벌 중의 하나로 장수의 제복을 입지 못하고 갑옷 속의 백의만 입고 근무하게 하는 ‘보직해임(補職解任)’의 표시인 것입니다.
한번은 녹둔도 둔전관 시절에,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에 이 처벌을 받았던 것이지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듯,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라는 집회서의 말의 의미가 살아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군보직해임이 사병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체험하는 계기가 되어서 후에 여러 차례의 위기 속에서도 군 통솔과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과도 왕래를 하며 서민들의 어려운 삶을 접하면서 나라에 대한 사랑을 더 깊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비천한 처지가 명량, 노량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된다.’라는 교훈의 말이 그의 삶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미래를 향해 나가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은 낮추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데 제자들은 길거리에서 자기들 중에 제일 으뜸인지를 놓고 다툽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에 다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이충무공은 백의종군을 통하여 장군의 자리에서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의 길을 가신다는 말씀을 흘려 버리고 높은 자리를 놓고 다툽니다.
낮은 자세에서는 자리에서 자유로운데 일단 그 자리에 서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으로 착각을 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도를 위해서 자리는 필요하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경계할 것은 그 자리가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 자리에 고착하고 맙니다.
잠깐 필요해서 마련한 자리인데요.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어린이는 가진 것이 없이 가난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가난한 이를 위해 나누는 이를 하느님께서 기억하시고 계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내세울 것이 없는 겸손한 모습입니다. 자기 것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과 절대적 신뢰가 있는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가진 것이 없어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세상에 취하는 일 없이 여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 세상의 길과 믿는 이의 길 ♣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기점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세 차례나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수난과 부활 예고를 거듭 듣고도, 누가 가장 높은지에 대하여 말다툼을 합니다.
제자들은 수난 없는 부활, 시련 없는 행복과 기쁨만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세상의 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고, 아직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합니다. 예수님의 기준과 시각으로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그분을 따르려 한 것이지요.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9,32) 그들은 사랑에 젖어들기보다는 자기 생각과 욕구에 몰두해 있었기에 두려움이 앞섰을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분이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과 사랑이 없어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는 세상의 논리에 따라 물질과 명예를 더 많이 얻어 성공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평가기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고 다른 이를 섬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끝자리에 둡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 다른 이를 소중히 여기며 '떠받드는 섬김'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살아야 할 소명이자 고유한 유전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사랑 바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9,37) 예수님의 이름으로, 곧 사랑과 선으로 보잘것없고 힘없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복된 길이라는 것이지요.
허름한 말구유에서 나시어, 보잘것없는 나귀를 타시고, 가난한 이를 위해 갈릴래아를 순례하시다가 나무토막에 매달려 죽어가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서 바보가 되고 꼴찌가 됨으로써 참 행복에 이르는 이 엄청난 역설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세상맛에 길들여져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은 하느님 사랑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을 믿고 내면을 자신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것이 교만이요 어리석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신념을 앞세우고 자신의 능력을 믿기에 하느님께서 거처하실 여백이 없습니다. 제멋대로, 제 잘난 맛에 살아가니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세상에 기대지 말고, 내 몸과 마음의 힘을 빼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말씀과 수난의 사랑을 관상해야겠지요.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디며, 보잘것없는 이를 받아들일 때,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을 받게 될 것(집회 2,4-9)임을 믿고, 기꺼이 꼴찌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제1독서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는 욕망 때문에 서로 다투곤 합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메시아 직무를 깨닫지 못하였지요. 그러니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차근히 타이르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세속적인 포부를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화시키십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위해 봉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남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마음을 지니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것입니다. 어린이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 못하지요. 어떤 의미로 어린이는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전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자신에게 도움을 줄 만한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다가가려 합니다. 반면 남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쉽게 접근하려 하지 않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보다, 오히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느새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