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7주간 토요일] 증언 (요한21,20-25)

2018. 5. 19. 오전 5:43:32

글자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증언 (요한21,20-25)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자신은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사슬에 묶여 있다고 말한다. (사도 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한다. (요한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사도28,16~20.30~31)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28,20)

 

바오로가 유다인들의 오해를 받아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된 것은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하고 있던 것을 전파하였기 때문이요, 또한 바오로가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유다인 유력자들을 자신이 기거하는 곳으로 청한 것도 일차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그 이스라엘의 희망' 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희망'이라고 번역된 '엘피도스'(elpidos)라는 용어의 개념은 바오로가 유다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중에 여러 번 사용한 적이 있는데(사도23,6; 24,15; 26,6.7),  그것은 곧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약속들의 성취' 를 의미한다(사도26,6.7).


바오로는 바로 이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나자렛 예수에게 그 희망이 성취될 수 없다고 믿는 유다인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 있는 유다인들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 희망'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유다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죄수의 몸이 된 바오로가 로마에 있는 유다인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점들을 해명하고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요한21,20~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25)


요한 복음 21장 25절은 과장법에 의한 수사학적 표현인데,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요한 복음 사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지식조차도 모두 기록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그대로를 다 기록했다면, 그 내용이 엄청나게 방대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4복음서 저자들에게 그 책을 기록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주셨고, 각 저자들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지식과 능력을 사용해서 많은 내용들 중에 꼭 필요한 내용만을 취사 선택하여 하느님의 의도대로 기록한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온전히 담기에는 부족했다 알아들을 수 있다.

세째로, 자신의 한계이자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일을 기록하는 작업의 한계를 인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 아니며, 또한 자신이 기록한 요한 복음의 내용이 부분적이므로, 요한 복음사가가 함께 했던 교회 공동체가 요한 복음에만 한정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왜 한 제자에 의해 단 한권의 책으로 기록하게 하지 않으시고, 세 권의 공관복음서를 쓰게 하시고 난 뒤에 다시 요한 복음사가를 통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한다.

사실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늘 예수님과 동행했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70년 정도를 더 살면서,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많은 사목을 하였다.


그러한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 21장 25절을 통해 요한 복음서를 다 기록한 뒤에 보여 주는 모습은 하느님 역사의 광대무변함과 그분의 크신 사랑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 요한의 앞날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앞날이 어떠할지 암시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요한의 앞날에 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의 역할이 다르다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목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나를 따라라”(요한 21,19).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많은 양을 돌보다가 마침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사도 요한에게 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사랑을 세상 끝 날까지 증언하고 전해야 하는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다양한 직분과 임무를 맡기십니다. 어느 신분이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지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사도28,16-20. 30-31 요한21,20-25



-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라" -



나이에 상관없이 신록의 영혼으로 살라고 신록의 성모성월 5월입니다. 새벽 기도 시 캄캄한 어둠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창밖 풍경이 점점 해가 떠오르면서 뚜렷한 윤곽으로 들어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 안에 있을 때 ‘있는 그대로’의 분별이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제일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제일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남 판단하지 않는 게 덕(德)이요 자기를 아는 게 지혜(知慧)입니다. 자기를 알아갈 수록 남 판단도 점점 줄어듭니다.

몇 가지 예화를 나눕니다. 석가탄신일을 앞 둔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날이다. 부모는 부모 노릇, 스승과 제자는 그 본분을 다하고 있는지 함께 반성하는 날이다.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모두 함께 뒤를 돌아보면 된다. 팔만대장경을 몇 마디로 요약하면 ‘남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지 마라.’ ‘사람 차별하지 마라.’ 아니겠나. 이렇게 살면 세상 잘 돌아간다.

부처님이 바라는 세상은 남편을, 아내를, 직장 상사를, 동료를 부처님이다 이렇게 여기면 된다. 꼭 절에 가서 절하고 보시하고 이래야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공들이고 눈물 나지 않게 하면 된다. 이게 사람들이 태어난 목적 아니겠나. 이걸 잊으면 안 된다.-

누구나 공감이 가는 지극히 평범한 말씀입니다. 자신을 알아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수록 이웃에 대한 존중과 배려도 함께 감을 깨닫습니다.

사막교부 안토니오에 대한 두 일화도 생각납니다.-안토니오는 하느님의 심판의 깊이에 대해 묵상하다가 주님께 물었다.

“주님, 어째서, 어떤 이들은 젊어서 죽고 또 어떤 이들은 천수를 누리며 삽니까? 왜 가난한 이들이 있고 부유한 이들이 있습니까? 왜 사악한 이들이 번창하고 정의로운 이들이 곤궁 중에 살아갑니까?”

그는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안토니오. 그런 일들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라. 네가 그런 일들에 대해 안다 해도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질없는 질문들은 그만 두고 네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지금 여기서 주어진 본분에 충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제자가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안토니오의 대답이다. “네가 누구이든 네 시선을 늘 하느님께 두라. 또 네가 무엇을 하든 그것을 성경 말씀에 따라하고, 네가 어디에 살든 쉽게 그곳을 떠나지 마라. 이 셋을 지키면 너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누구와 비교하지 않지 않고 제 삶의 자리에 항구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두 분의 학자를 인터뷰했던 수도형제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두 분은 정말 학자입니다. 이분들에게 현실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학문과 현실 참여 둘 다 잘 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학자의 길과 운동가의 길이 있음을 통감한 수도형제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비교나 우월의 대상으로가 아닌 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희망할 수는 있어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할 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참 지혜롭습니다.

아마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간의 미묘한 기류를 통찰한 예수님 같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간의 불필요한 갈등이나 불화의 가능성을 애당초 차단해 버립니다. 애제자의 길과 수제자인 너의 길이 다 다르니 베드로 너는 나를 따라 순교의 죽음까지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똑같이 주님의 제자들이지만 베드로의 길과 바오로의 길은 또 얼마나 다른지요. 비교나 우월의 대상이 아닌 서로 존중해야 할 다 그만의 고유한 사명의 길임을 깨닫습니다.‘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 들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로마에 압송되어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 내적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제 본분의 사명에 항구하고 충실했던 바오로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고 제 본분에 충실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아멘.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