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금요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르 10,1-12)

2018. 5. 25. 오전 7: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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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간 금요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르 10,1-12)


 

야고보 사도는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시니 심판받을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야고 5,9-12)
9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1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2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냐고 묻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마르10,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야고5,9-12)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1)


'사실'로 번역된 '이두'(idu; '보라')는 야고보서 5장 10절과 연관성을 가지면서 야고보서 5장 4절의 경우와 동일하게 수신자들의 관심을 인내의 두번째 모범인 욥에게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끝까지 견디어 낸'으로 번역된 '휘포메이난타스'(hypomeinantas)의 원형 '휘포메노'(hypomeno)는 '~아래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hypo)'머무르다'(마태10,11)라는 의미의 '메노'(meno)의 합성어로서 어떤 상황 아래에서 피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 무거운 짐 아래에서  버티고 견디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과거 분사형으로 쓰여  시련 가운데 흔들림없이 자신의 믿음을 고수한 자들을 가리킨다.

고난이 엄습해 올지라도 도망가지 않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인내하는 자들야고보 당시의 성도들이 행복하다고 칭송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는 행복하다고 합니다'에 해당하는 '마카리죠멘'(makarizomen; we count them happy; we consider blessed those who)현재 직설법으로 쓰였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1.12)라고 말씀하셨다.

또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고 말씀하셨다.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끝까지 온전히 인내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축복이 뒤따른다. 이것은 신실한 주님의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인내한다면, 구약의 예언자들과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자들에 이어 인내의 가장 대표적 인물로 당시 '욥'을 들고 있다. 그러나 '욥'야고보서 5장 9절의 '원망하지 마십시오'라는 야고보의 진술에 위배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불평을 과도하게 늘어 놓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욥기7,11-16; 10,18; 23,2; 30,20-23). 

그러한 '욥'을 어떻게 인내의 좋은 예로 들 수 있는가? 야고보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야고보는 비록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환경을 잘 인내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도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욥'보다 더 극심한 고난을 겪은 자도 없고, 그 극심한 고난을 이겨낸 후 그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은 자도 없다. 따라서 '욥'은 고난 중에 인내한 모범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한편 야고보는 수신자들이 주님께서 '욥'에게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에이데테'(eidete; have seen)'너희가 보았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두 눈으로 본 것처럼 뚜렷이 알고 있다는 표현이다. 

사실 '욥'에게 주어진 결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고난을 인내로 이겨낸 후 잃어버린 물질을 두 배로 돌려받았고, 열 자녀를 다시 새롭게 얻었으며(욥기42,12-17),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더 깊이 알고 그분과 더 친밀하게 통교하게 되었다(욥기42,5).

 

'욥'에게 회복된 가시적인 물질적 축복이나 비가시적이지만 하느님과의 친밀한 통교의 축복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강생 후 고난을 인내한 성도들이 받게 된 축복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비록 고통을 믿음으로 인내한 것에 대한 보상욥과 같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타나지 않고, 스테파노 부제처럼 순교로 끝난다고 할지라도(사도7,55.56) 궁극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하늘에서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믿음으로 인내한 자에게 궁극적으로 축복을 내리신다는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데에 있어 너무나 큰 힘이 된다. 

하느님의 심판과 보상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무고한 고통을 기쁘게 인내할 이유가 전혀 없다(히브12,2; 로마8,18.25; 묵시21,4). 

그리스도교는 현세적 기복 신앙을 조장하지는 않지만, 내세의 삶을 약속하는 희망의 종교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야고보가 제시한 예언자들과 욥의 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며 믿음에 굳게 서서 고난 중에 인내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되는 것이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야고보는 '욥'에게 주신 하느님의 축복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규명한다. 이 구문을 이끄는 접속사 '호티'(hoti)는 이유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욥'에게 주신 결말이 축복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분이 동정심이 크고 너그러우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여기서 '동정심이 크고'라는 의미로 번역된

 '폴뤼스플랑크노스'(pollyspllangchnos;very pitiful)'많은', '큰'을 의미하는 '폴뤼스'(pollys)'창자', '자비심', '동정심'을 의미하는 '스플랑크논'(spllangchnon)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형용사로서 '자비심이 흘러넘치는', '동정심이 많은'이라는 의미이다.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오익티르몬'(oiktirmon;  of tender mercy)도 비슷한 의미를 전달한다.  하느님께 대한 이와 같은 진술은 구약 성경의 일관된 사상이다. 


탈출기 34장 6절에는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라고 시나이 산에 현현하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으며, 다윗 역시 시편 103장 8절에서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고 노래하였다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에게 결혼은 왜 하느냐? 고 했더니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항상 예뻐해 주고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이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고 말했는데 살아가면서 그것도 체험해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면만 봤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면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겠다고 다짐하는 그를 그 약속 변치 않기를 기원하며 마음 다해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면 계약에 충실할 수 있고 계약에 충실함으로써 또 사랑하게 된다는 깨우침을 얻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7-9)고 하시며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부부, 즉 합당하게 결혼한 부부는 두 인격체 이면서도 동시에 한 인격체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쫓아내는 소박 등 남존여비사상이 빚어낸 결혼, 이혼, 재혼은 가부장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가능할지언정 이제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혼인의 단일성, 즉 ‘일부일처’, 그리고 혼인의 불가 해소성 즉 ‘이혼 불가’, 혼인의 성사성 즉‘부부애’, 창조사업의 직접적인 참여, 다시 말하면 ‘자녀의 출산’을 중요시하여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즘 결혼하는 부부 2쌍 중 1쌍이 이혼한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채워주고 계약에 충실하며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고 그리 쉽게 헤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때는 사랑했던 사람이고 아이들의 어머니요, 아버지임이 분명한데 그들을 뒤로 하고 차라리 몰랐던 사람보다도 더 악하게 마주서고 있으니 그러고도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지요? 어려움이 몰려올 때 그래도 사랑해야 할 나의 동반자임을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시다. “말로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1요한3,18).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커지면 그에 상응하는 법률이 만들어 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갈라서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일치를 도모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예레31,3)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써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혼인과 이혼>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혼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둘이 한 몸이 되라는 뜻이고,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일이고,

따라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갈라놓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이혼을 허락할 권한은 없습니다.)


1) 결혼을 앞둔 미혼 남녀의 경우.

혼인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고, 혼인을 결정하는 일들이 모두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일처럼 생각되겠지만,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혼인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는 ‘혼인은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느님을 알기 전부터 이미 혼인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인연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2) 결혼해서 부부로 살고 있는 경우.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들을 부부생활에 대한 조언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로마 12,9).”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에페 4,26-27).”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콜로 3,13-15).”

부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3) 이혼 후 재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조당 상태에 있는 경우.

사제들의 강론들을 보면, 혼인과 가정의 신성함과 거룩함에 대해서만 말하거나,

이혼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만 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결혼 전의 미혼 남녀에게는 그런 강론이 필요하지만, 이미 이혼한 사람들과

조당 상태가 되어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때에는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일이 필요하지만,

이미 넘어져서 다쳤다면, 조심하라는 경고는 소용이 없고,

왜 조심하지 않았느냐고 꾸짖기만 하는 것은 고통을 주는 일만 됩니다.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목자가 할 일입니다.)


조당(阻擋)은 옛날 용어이고, 요즘에는 ‘혼인 장애’ 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혼인 장애(婚姻障碍)’란 혼인을 불법, 또는 무효로 만드는 일체의 사정을 말합니다.

즉 혼인을 불법 또는 무효로 만드는 흠결의 사유를 말합니다.

이 흠결의 사유를 무시하고 어기면서 혼인을 하였다면,

신자로서 정상적인 성사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혼인 장애’ 상태가 됩니다.

‘혼인 장애’ 상태에서는 일곱 가지 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단순한 경우라면 본당의 주임신부가 해결할 수 있지만,

복잡하고 까다로운 경우라면 교구의 혼인 법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영구적인 ‘혼인 장애’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사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하고,

교회와 당사자들이 함께 노력한다면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혼인한 이들에게 분부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으면 혼자 지내든가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1코린 7,10-11).”

(이혼했더라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경우는 ‘혼인 장애’가 아닙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신자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부인에게 신자 아닌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신자 아닌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고,

신자 아닌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자녀도 더러울 터이지만, 사실은 그들도 거룩합니다.

그러나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

그러한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2-15).”

여기서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 라는 말은,

혼인보다 신앙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말한 것인데,

우리 교회가 예외적으로 이혼을 허락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을 ‘바오로 특전’이라고 부릅니다.)


(교구 혼인 법원을 통해서 ‘혼인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흔한 경우가 ‘혼인 무효화 소송’인데,

이것은 혼인이 유효한 혼인성사가 아니었음을 심판해 달라는 소송입니다.

겉으로는 적법하고 유효한 혼인성사처럼 보였지만, 여러 가지 내적인 사정과

모든 상황을 살펴볼 때 혼인성사가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혼인 법원에서 그 혼인은 무효라고 선고하게 되는데,

그 선고를 받게 되면 공식적으로 그 부부가 헤어지는 것이 인정되고,

동시에 ‘혼인 장애’ 상태가 해결되고, 재혼할 수 있게 됩니다.

겉으로만 보면 마치 혼인 법원이 이혼을 허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성사의 유효성을 엄격하게

다시 확인하는 일이고, 성사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7년 2월 24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혼인 생활이란 신뢰의 연속이라 하겠습니다. 만일 앞에 보이는 혼인의 계약을 맺은 배우자도 신뢰하지 못한다면,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혼인의 목적을 ‘자녀 출산과 부부 간의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녀를 낳음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게 되고, 부부 간의 사랑을 통해 서로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감으로써,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혼인이란 하느님의 뜻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요즈음 혼인에 대한 인식도, 부부 사랑에 대한 개념도, 가정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마저도 점점 흐려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지요. 가정에서부터 인격이 형성되고 사랑을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부부 간에, 가족 간에 대화를 많이 해야만 합니다. 부부 간에 힘들 때면 오늘 제1독서 말씀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아울러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에 단 몇 분만이라도 함께 기도드리면 귀한 은총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 모든 가정이 성화되고, 가족들 간에 참된 평화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살롬,  서울에 아침은 참 밝고 맑고 좋습니다.


교형 자매님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이롷게 밝고 맑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말씀을 읽으며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시는데

묻는 바리사이들은 이 세상적것을 가지고 따지고 있어요

현세적인 문제이지요

물론 시비적인 악심도 포함 되어 있어요.

성경 에서보면 그네들은 늘 그래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시면서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말씀 하십니다

그 근본 가르침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강론글 중에서 청주교구 소속 사제중에

반영억라파엘 신부님께서 올리신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 는 제목의 강론글을 접하면서

 "아~~그래도 옳바르게 성경을 가르치시는 사제가 계시는구나!'

했습니다.

신부님강론 글중에서 일부 발췌해 봅니다.

~%%~

오늘 복음에서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예레31,3)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써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바로 윗 글처럼 하느님과 우리들의 신앙 문제이지요

우리들이 세례받아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 백성들입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절절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감히

우리들이 하느님을 저버릴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천주교에선는 그 근본적 가르침이 없어요.

다 나름대로 세상적 가르침만 얘기하는듯  합니다.

적당히 타협하자는 것 같아요.


 아침부터 맘 상한글 올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올바로 알고 그 하느님 사랑에 절절히 가슴 뿌듯한

오늘 하루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 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세요. 살롬.

김종업로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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