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7주간 토요일]어린이축복(마르10,13-16)
야고보 사도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다.(야고 5,13-20)
사랑하는 여러분, 13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14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15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8 그리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소출을 냈습니다.
19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진리를 벗어나 헤맬 때 누가 그 사람을 돌이켜 놓았다면, 20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시며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신다.(마르10,13-16)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야고5,13-20)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 받을 것입니다." (14-15)
야고보는 5장 13절에서 고통 가운에서 기도할 것을 권면한 데 이어, 5장 14-16절에서 특히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위한 믿음의 기도를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앓는'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asthenei; sick)의 원형 '아스테네오'(astheneo)는 부정 불변사 '아'(a)와 '든든하다', '강하다'(1베드5,10)라는 뜻의 동사 '스테노오'(stheno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강하지 않다'는 의미이지만, 대부분 '육체적으로
일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해진 상태' 즉 '병을 앓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용례로 쓰인다.
질병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육체적, 정식적으로 쇠약해지게 만든다. 그래서 야고보는 질병에 시달려 지쳐 있는 자신이 교회로 가기보다는 교회의 원로들을 집으로 부르라고 권면하고 있다.
'원로'에 해당하는 희랍어 '프레스뷔테로스'(presbytheros'; elder)는 '나이 많은'이란 뜻이 있는 '프레스뷔스'(presbys)의 비교급으로서, 문자적으로는 '연장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교회의 직책이나 직분에 대해 이 단어가 쓰이면, 단순히 연장자라는 의미를 넘어 가르침과 행정 등 중요한 역할을 맡은 교회의 대표자를 의미했다.
신약 성경 중 특히 서간들에서 이 용어는 교회의 핵심 직분으로 나타나 있으며 (1티모5,17-19; 티토1,5; 1베드5,1; 2요한1,1), 또한 '감독'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로 알려져 있다(티토1,5.7; 사도20,17; 20,28). 이것을 통해 그들의 임무가 온 양떼를 돌보며 교회 공동체를 다스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원로들은 앓는 성도가 자신들을 청한다면,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당연히 가야 했다(마태8,14; 로카8,41.42.51참조).
한편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는 원로들이 앓는 성도의 청에 응하여 그를 찾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해 주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여기서 '기름'에 해당하는 '엘라이오'(ellaio; with oil)은 '올리브 기름'을 의미한다. 고대 세계에서 병자의 차도를 위해 기름을 바르는 것은 일반적인 행위였다(이사1,6).
요세푸스, 필로, 플라톤의 글에서도 이런 사실이 나오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응급 처치하는 과정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하였고(루카10,46), 예수님의 제자들도 병자들을 고치는 과정에서 기름을 부어 준 것을 볼 수 있다(마르코6,13). 따라서 야고보서 5장 14절은 앓는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실제로 치료 행위도 하라는 권면으로 이해된다.
성경 학자들은 기름 바르는 행위를 병자로 하여금 마음의 위안을 얻도록 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기도 하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자로 구별해 놓는 상징적 행위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병자에게 기름바르고 기도하는 행위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엔 토 오노마티 투 퀴리우'; en to onomati tu kyriu; in the name of the Lord)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구절이 병자 성사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성주간의 성목요일의 성유 축성 미사때에 일년동안 사용할 성유(예비자 성유, 크리스마 성유, 병자 성유)를 교구장 주교님이 축성하면, 그 병자 성유를 가지고 사제들은 병자 성사를 집행하게 된다. 주교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축성한 병자 성유를 가지고 사제들은 병을 심하게 앓고 있거나 수술을 받기 전이나 죽을 위험이 있을 때 찾아가 병자 성사를 집전한다.
병자 성유를 앓는 성도에게 바르는'알레입산테스'(alleipsantes; anointing) 도유 행위와 기도가 바로 치유자이신 성령의 권능을 부르는 것이며, 야고보는 여기서 하느님의 권능의 개입만이 앓는 성도의 병을 낫게 하는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5장 14절에 이어 본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기도'가 확실히 치유의 결과를 발생시킨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앓는 성도들을 위해 행하는 원로들의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원로들이 앓는 성도들을 위해 하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 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병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내려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한편 '구원하고'로 번역된 '소세이'(sosei)의 원형 '소죠'(sozo)는 신약 성경에서 종말론적인 구원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었다(요한12,47; 1코린1,21; 2티모1,9등). 그러나 여기서는 '아픈'에 해당하는 '캄논타'(kamnonta; sick)가 육체적 질병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의미보다는 육체적 질병의 치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더 적합하다(야고1,21; 2,14; 4,12; 5,20).
또한 주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로 번역된 '에게레이'(egerei; will raise up) 역시 죽은 이의 부활과 연관해서도 사용되었으나(로마4,24; 히브11,19; 1베드1,21) 여기서는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마태8,15; 루카5,23; 요한5,8).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질병이 범죄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분명히 나타내 있지 않는 주어는 '앓는 사람', '아픈 사람'이다. 즉 원로들의 기도의 결과가 '앓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었으면'으로 번역된 '페포이에코스'(pepoiekos)는 '행하다'(do)라는 의미를 지닌 '포이에오'(poieo)의 완료 분사로서, 과거의 범죄가 현재에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나타내므로 육체적 질병이 죄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리고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로 번역된 '아페테세타이'(aphethesetai; he will be forgiven)는 '놓아주다', '해방시키다', '용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피에미'(aphiemi)의 미래 수동태로서, 믿음의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죄의 용서를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질병과 죄가 일반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질병이 죄와 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2역대16,7-12; 26,19-21; 마르코2,1-12), 요한 복음 9장 1절 이하의 태생 소경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질병도 있는 것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7성사 제도 안에서 죄가 있는 사람들이 받는 성사는 세례 성사와 고해 성사이며, 나머지 견진, 성체, 혼인, 신품, 병자 성사는 죄가 없는 은총 지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오늘 성경의 본문이 병자 성사를 계시한다면, 먼저 고해 성사를 보고 난 뒤에 병자 성사를 받고, 그 다음 성체 성사를 차례대로 모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빈구석이 있는, 그러나 전적으로 의지하는 단순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유대사회에서는 12세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 짓을 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라 했더니 ‘식사 전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가정에는 18개월이 된 아이였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며 안수를 해 드렸는데 어린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하면 주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의 기도와 가르침이 큰 역사를 이룹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을 할 때....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귀한 존재로 받아 주시며 그들을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몹시 번민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마음을 안 제자들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것을 막습니다. 예수님을 귀찮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를 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그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여유를 갖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배려해야 하겠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갖도록 촉구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려는 어린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린이들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신뢰심이 강하다는 것이지요. 또한, 순수하고 순종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려면 이런 요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깊게 생각할 점은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귀하게 대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인격이 보잘것없었지요.
오늘날도 여성과 어린이들의 인격이 무시를 당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힘든 노동마저 합니다. 따라서 여성과 어린이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그들의 인권이 더욱 향상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