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화요일] 따름과 보상 (마르 10,28-31)

2018. 5. 29. 오전 6: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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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8주간 화요일] 따름과 보상 (마르 10,28-31)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모든 희망을 걸라고 한다. (1베드 1,10-16)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10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받을 은총을 두고 예언한 예언자들이 탐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11 그들 안에서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께 닥칠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에 가르쳐 주신  구원의 시간과 방법을 두고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12 예언자들은 그 일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일들이 하늘에서 파견된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을 통하여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복을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르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제1독서(1베드1,10~16)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했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4~15)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4절에서 수신자들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현재 신분을 대조하면서 과거를 단절하고 현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들은 복음을 받기 전에 무지하여 각종 더러운 욕망들을 추구하면서 살았었으나 이제는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 있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순종하는 자녀로서 ~~해서는 안된다'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새 성경이 '~로서'로 번역한 접속사 '호스'(hos)는 자격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영어의 'as'의 의미이다.


그리고 '무지했던 때'에 해당하는 '엔 테 아그노이아'(en te agnoia)에서 '아그노이아'(agnoia)의 원형 '아그노이아'(agnoia)'무지'(ignorance)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희랍어 구약 성경 70인역(lxx)과 신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이방인의 특성인 하느님께 대한 무지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시편79,6; 예레17,30; 갈라4,8; 에페4,18).

이러한 용례는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사욕들을 따라 산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을 때에 행한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욕망'에 해당하는 '에피튀미아이스'(epithymiais)는 복수 명사로서 '사욕들'(lusts; evil desires)이란 의미이다. 원형 '에피튀미아'(epithymia)는 어떤 대상을 향한 욕구라는 의미로서 본래는 가치 중립적 단어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도덕적, 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여 버려야 할 욕망나타내는 용례로 쓰였고(요한8,44; 로마13,14; 에페4,22; 2티모2,22 등), 베드로 전서에서도 동일한 용례로 쓰였다(1베드2,11; 4,2).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경계하여 엄격히 통제하지 않으면 사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죄를 짓게 하며, 자연적인 본능의 충동대로 살게 하는 것들로서 주로 이방인들의 특성인 도덕적 죄악을 가리킨다 (마르4,19; 갈라5,16; 1베드2,11; 4,2; 1요한2,16).

 사도 베드로는 지금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갖추어야 할 실천적인 요구로서 그런 욕망들을 따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베드로 전서 1장 13,14절을 통해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권고한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5~21절을 통해 이렇게 성도들을 향하여 거룩한 삶을 권고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특히 베드로 전서 1장 15~17절에서는 성도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거룩'이라는 것은 어떤 예식이나 의식상(ritual)의 정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유다인들이 지키던 전통, 즉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부지런히 씻거나 장터에서 돌아와 반드시 몸을 씻고 음식을 먹거나 그외에도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관례(마르7,3.4) 등에 관하여 '거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과 통교함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영적, 도덕적 거룩한 정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전서 1장 15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닮은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내면적이거나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공로의 은혜을 입어서 정결(거룩)하게 된' 존재론적인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이 '거룩'을 일상의 구체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행실'('anastrophe'; '아나스트로페'; manner of conversation)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세상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면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10,28-31)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29~30)


마르코 복음 10장 29절'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라고 기록되었지만, 마태오 복음 19장 29절에서는 '내 이름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고, 루카 복음 18장 29절에서는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내 이름', '나와 복음', '하느님의 나라'다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며,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때문에', '~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헤네켄'(heneken; for; for sake)전치사 '헤네카(heneka)소유격인데, 여기서 두 번 언급된 것은  전치사와 함께 쓰인 단어들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예수님 당신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나 집 등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만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버린 사람'에 해당하는 '호스 아페켄'(hos apheken; one who has left)통해서 외적 및 내적 분리를 의미하는 포기를 가르치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내어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갈 수 없다는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 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예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되는 절대적인 기본 조건인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10장 30절의 '백 배'(a hundred times)는 반드시 산술적 의미의 백 배가 아니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내어버린 것의 백 배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많은 보상을 받게 됨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 보상도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그것보다 휠씬 더 소중한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그 보상이 현재와 이 세상의 삶이 끝 난 후 오는 세상인 내세(미래)에 모두 받게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맛보며 살고,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혈육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떄로는 핍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은 영적으로 더 많은 가족을 얻으며, 마음 속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을 주님 안에서 누리고 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참된 내용인 것이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예수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풍요'만이 아니라 '박해'도 겸해서 받는다는 내용이 여기 마르코 복음에만 나온다.

여기서 '박해'에 해당하는 '디오그몬'(diogmon; persecution)원형'디오그모스'(diogmos)이다.


신약에서 '디오그모스'(diogmos) 말고도 '박해'를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코린토 1서 4장 12절에 나오는 '블라스페메오'(blasphemeo)라는 동사이다. 이 동사의 뜻은 '비난하다', '중상하다', '헐뜯다'이다.

이 두 단어는 의미상으로는 모두 '박해', '핍박'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세부적으로는 '블라스페메오'(blasphemeo)'말을 통한 박해'이고,  '디오그모스'(diogmos)'구체적인 행위로 가해지는 박해'를 가리킨다.


여기 본문에서는 '~중에', '~가운데',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메타'(meta; with)와 함께 쓰였는데, '메타 디오그몬'(meta diogmon; with persecution)'박해 중에', '박해 가운데'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이 공관 복음서 중에 마르코 복음에만 기록된 것마르코 복음사가가 자신의 일차적 독자인 로마 신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로마에 있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황제 네로의 극심한 박해 속에 있음을 알고, 그들이 겪고 있는 박해가 그리스도인이면 필연적으로 겪어야 되는 것임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내용을 부각시켰다(마태5,10~12).



2017년 2월 28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비우는 만큼 채워주신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잇속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그 출세라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 삼아 말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를 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그것을 버렸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좋아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함께야).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아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재물, 권력이나 명예. 자식이나 건강을 첫째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관계나 소유물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상의 것들을 버리는 것이 그에 상응해서 천상의 것들을 채우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2011. 03. 01.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 마르 10,28-31

<따름과 보상>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여기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앞에 있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 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른 저희는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으로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이 한 일을 자랑하거나 생색내는 말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해서 한 말로 생각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7-20).”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4).”

(직업을 버리고 가정을 떠나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인생의 진로를 완전히 바꾼 것이고, 사실상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구원과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세속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들의 희망은,

사실은 처음에는 많이 막연하고 어렴풋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기도 했고(마르 9,34),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하기도 했습니다(마르 10,37).


예수님 말씀에서 “나 때문에”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유는

당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 믿음과 희망 없이 그저 속세가 싫어서, 속세를 떠날 목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진정한 ‘버림’도 아니고, 진정한 ‘따름’도 아닙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박해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박해와 고난만 겪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힘들 때도 있고, 힘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혹시 힘든 일을 만나더라도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힘들 때는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힘들지 않을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현실도피처가 아닙니다.)

힘들든지 힘들지 않든지 간에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세속의 재미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기쁨’은

신앙생활을 꾸준히 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뜻을 생각하면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씀 뒤로 옮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든 것을 백 배나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현세에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내세에서 받게 될 ‘풍성한 은총’에 대한 약속이라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그런 것들을 백 배나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은총, 영광, 행복 등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이 말씀을 ‘교회’ 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이 말씀이 내세에서 받게 되는 은총에 대한

약속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지상의 교회 공동체는 내세의 교회 공동체를 미리 보여주고,

미리 체험하게 해 주는 ‘중간 경유지’일 뿐이고,

우리의 진정한 종착점은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단순히 영원히 살게 된다는 뜻만 있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모든 것을,

즉 구원, 생명, 평화, 안식, 행복, 기쁨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그것들을 모두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버려서 영원한 것들을 얻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지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런데’ 라는 접속사는 좀 이상하고,

‘그처럼’, 또는 ‘그렇게’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 높은 자리에 있고, 부유하고, 잘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하라는 경고 말씀이 되고,

동시에 지금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 말씀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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